중시조 방주기록에 대한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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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원

1. 중시조의 방주(傍註)기록 변화

 

최초족보『병술보』가 그 휘(諱)와 묘소의 존재로서만 실체를 기록하였던 중시 조 만(蔓)공의 족보상 방주가 다음과 같이 변화하였다.

 

발간연도

손록방주내용

최초 『병술보』

1766 영조42

후손 만(蔓)-묘 영암 계읍천(溪邑川) 가덕산(加德山)

2차 『신사보』

1821 순조21

후손 만-증 예조좌랑 묘 영암 계읍천(界邑川) 가덕산 오좌(午坐) 쌍폄(雙窆)

3차 『을묘보』

1855 철종6

중시조 만-문(文)과 예조좌랑 증 호조판서 묘 영암 계읍천(溪邑川) 가덕산 오좌 쌍폄

4차 『신묘보』

1891 고종28

3차 『을묘보』와 같음

5차 『병진보』

1916

12세 자 만-자(字) 선보(先宝) 전조(前朝) 경술생(庚戌) 태조(太祖)조(朝) 이조좌랑 숙(淑)부인 진주하(河)씨

부(父) 항(沆) 묘 영암 곤일시(昆一始) 가덕산 오좌 쌍폄 유비

6차 『병신보』

1956

5차 『병진보』와 같음

7차 『정사보』

1977

자 만-자 선보 명 홍무3년 공민 경술생

태조조 문과 이조좌랑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중추부사 배 증 정(貞)부인 진주하씨

부 대사간 호 대각재 항 진양군(晉陽君) 즙(楫) 후(后)

묘 영암군 미암면 선황리 구 율(栗)리 전 고암등(鼓岩嶝) 가덕산 오좌 쌍조(雙兆) 유석물(有石物)

8차 『을해보』

1995

후손 만-자 선보 홍무3년 1370 공민 경술생

태조조 문과 예조좌랑 증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중추부사 배위와 묘-7차 『정사보』와 같음

 

2. 방주기록의 진정성

 

(1) 2~4차보의 방주변화와 그 진정성

최초보『병술보』는 방주기록이 아무런 군더더기 없이 오직 묘소의 위치만쓰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진정성 있는 방주기록일 것이다. 그러다가, 2차『신사보』(1821)에서 특별한 사유의 설명없이‘증 예조좌랑’이라는 증직벼슬을 올리고,‘오좌쌍폄’을 보완하고 있다. 벼슬 호칭의 등장은 일말의 전승에 후손의 효심이 작동한 결과로 보인다. 이후 종중에서는「좌랑공」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3차보(1855 을묘보)는‘文’즉‘문과급제’가 추가되면서 벼슬 호칭이‘예조좌랑 증 호조판서’로 바뀌게 된다.

 

별다른 근거의 설명은 없다. 4차보(1891 신묘보)는 3차보 그대로이다. 최초보가 그 방주로, 영면하고 계신 유택의 위치만 쓰고 있음은 인물의 실재사실을 확실히 반영하고 있는 진정성 있는 방주기록이다. 더구나 가덕산 봉우리 아래 7천여 평이 넘는 묘토가 그 옛적부터 지금까지 종토(宗土)로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선림 종문의 큰자부심의 바탕이 된다 할 것이다.

「예조좌랑」의 벼슬과 ‘쌍폄’을 보충하였음은 그 근거여부를 떠나 일말의전승을 찾아내어 보완하였다고 양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뜻에서 2차보의 방주를 공식기록으로 인정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2) 5~8차보의 또 다른 방주기록

그런데, 이러한 4차보까지의 방주기록이 5차『병진보』(1916)에 이르러서는, 아주 그럴사하게 바뀌게 된다. 즉, 자(字)를 선보(先宝), 생년을 전조(前朝 -고려조) 경술생, 벼슬 호칭을 조선 태조조 이조좌랑이라 하고, 배위를 구체화하여‘숙부인(淑夫人) 진주 하(河)씨 부(父) 항(沆)’이라 하고, 묘소 위치는 행정구역(면) 명칭을 첨가하여‘묘 영암 곤일시(昆一始)면 가덕산 오좌 쌍폄 유비(有碑)'로 고쳐 쓰고 있다.

 

이 방주는 7차『정사보』(1977)에서 더욱 가공(架空) 윤색되고 8차『을해보』(1995)까지 그 줄기가 그대로 이어진다. 특히『정사보』의 방주가 가공윤색이 심한 것은 이 방주가 임영한씨가 주도한『임씨세가대동보』(1935) 방주를 인용함에 기인한다. 앞장에서 그 조작성에 관하여 자세히 논급한바와 같이『병진보』의 중시조 방주기록 또한 아무런 근거 없는 임의적 가공(架空)의 산물임을 감히 말씀드린다.

다만, ‘경술생’이라는 생년, 즉 고려 공민왕19년(1370)생이라는 추정은 후술에서 보는바와 같이 김종직의『이존록』기록에 나오는 김종직의 부 김숙자 의 족숙이고 스승인 선산임씨 임재(林載)의 재세시기 추정에 비추어 어느 정도 근접한 추정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있다. 그리고 벼슬호칭의 핵심‘이조좌랑’은 구보의‘예조좌랑’에서 변형한 것으로 보이며,『영암군지』의‘이조정랑’기록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한편,『을해보』(1995)는‘태조조 문과 예조좌랑 증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지중추부사’로 하여 3차보에 나오는‘예조좌랑’,‘증 호조판서’를 환원시키고 있다. 배위는 어떻게 된 것일까? 무슨 근거가 새롭게 나왔기에 1916년에야‘ 진주하씨 하항(河沆)의 따님’이 배위인 것을 알았을까가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침 임종하 종인의 제보가 있어『진양하씨대동보』(2015 을미)를 조사해본 바, 부인 하씨의 부(父)라는 하항은, 호를 각재(覺齋)라 하여「각재공파」의 파조가 되는 분으로 광해(1610) 때 본향인 진주시 수곡면에「대각사(大覺祠)」라는 사우를 세워 봉향하고 있다.

 

중종33년(1538 무술) 생으로 생원시를 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선조23년(1590 경인)에 졸한 분이다.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하항은, 선림으로 치면 만(蔓)자 조(祖) 7세 령(齡)자 조의 자 극(克)자 항렬에 해당하는 연령대의 인물이다. 어떻게 이렇게 마구잡이로 족보를 쓸 수 있었을까? 『병진보』는 시조 임양저 공의 배위도‘연안이씨’라고 써 넣고 있다. 참으로 의아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1977년『정사보』에는 하 항이‘진양군(晉陽君) 즙(楫)의 후(后)’라 하였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즙은 항의 5세손(현손)이며 진양군은 가공(架空)이다. 대사간 벼슬이나 대각재라는 호도 가공이다. 선림의 상계종사 기록을 일대혼란에 빠뜨린 병진보 · 병신보 · 정사보의 조작은 모두 임영한씨가 주도한 일이다. 향후 새로운 족보를 수보하게 된다면 배위와 벼슬기록 등 조작의 흔적을 모두 바로 잡아야함이 후손의 도리일 것이다. 선현들이 당부하기를,‘의고가전(疑固可傳) 와불가전야(訛不可傳地)’라!“의심이 들어도 이미 굳은 의심이라면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되, 그릇되고 속이는사항은 전해서는 안된다.”고 한 경계의 말씀을 새길 필요가 있다.

 

 

* 진양하씨대동보 - 진양 하씨와 관향지명-진양 하씨는 고려 현종(1010~1031) 때 좌사낭중을 지냈으며, 거란과의 강화에 공을 세우고 순국한 하공진(河拱辰)을 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지명은 신라·고려초에는 청주(菁州), 강주(康州)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성종14년(995) 진주(晉州)로 개칭되고 조선 태조 때 진양(晉陽)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태종2년(1402년)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1896년 진주군으로 개편된 후 1939년 진주부와 진양군으로 분리된 후 현재는 진주시로 통합되었다.(시조와 지명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관향명이 진주가 더 합당하지 않을까?)

 

-임용원

1. 중시조의 방주(傍註)기록 변화

 

최초족보『병술보』가 그 휘(諱)와 묘소의 존재로서만 실체를 기록하였던 중시 조 만(蔓)공의 족보상 방주가 다음과 같이 변화하였다.

 

발간연도

손록방주내용

최초 『병술보』

1766 영조42

후손 만(蔓)-묘 영암 계읍천(溪邑川) 가덕산(加德山)

2차 『신사보』

1821 순조21

후손 만-증 예조좌랑 묘 영암 계읍천(界邑川) 가덕산 오좌(午坐) 쌍폄(雙窆)

3차 『을묘보』

1855 철종6

중시조 만-문(文)과 예조좌랑 증 호조판서 묘 영암 계읍천(溪邑川) 가덕산 오좌 쌍폄

4차 『신묘보』

1891 고종28

3차 『을묘보』와 같음

5차 『병진보』

1916

12세 자 만-자(字) 선보(先宝) 전조(前朝) 경술생(庚戌) 태조(太祖)조(朝) 이조좌랑 숙(淑)부인 진주하(河)씨

부(父) 항(沆) 묘 영암 곤일시(昆一始) 가덕산 오좌 쌍폄 유비

6차 『병신보』

1956

5차 『병진보』와 같음

7차 『정사보』

1977

자 만-자 선보 명 홍무3년 공민 경술생

태조조 문과 이조좌랑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중추부사 배 증 정(貞)부인 진주하씨

부 대사간 호 대각재 항 진양군(晉陽君) 즙(楫) 후(后)

묘 영암군 미암면 선황리 구 율(栗)리 전 고암등(鼓岩嶝) 가덕산 오좌 쌍조(雙兆) 유석물(有石物)

8차 『을해보』

1995

후손 만-자 선보 홍무3년 1370 공민 경술생

태조조 문과 예조좌랑 증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중추부사 배위와 묘-7차 『정사보』와 같음

 

2. 방주기록의 진정성

 

(1) 2~4차보의 방주변화와 그 진정성

최초보『병술보』는 방주기록이 아무런 군더더기 없이 오직 묘소의 위치만쓰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진정성 있는 방주기록일 것이다. 그러다가, 2차『신사보』(1821)에서 특별한 사유의 설명없이‘증 예조좌랑’이라는 증직벼슬을 올리고,‘오좌쌍폄’을 보완하고 있다. 벼슬 호칭의 등장은 일말의 전승에 후손의 효심이 작동한 결과로 보인다. 이후 종중에서는「좌랑공」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3차보(1855 을묘보)는‘文’즉‘문과급제’가 추가되면서 벼슬 호칭이‘예조좌랑 증 호조판서’로 바뀌게 된다.

 

별다른 근거의 설명은 없다. 4차보(1891 신묘보)는 3차보 그대로이다. 최초보가 그 방주로, 영면하고 계신 유택의 위치만 쓰고 있음은 인물의 실재사실을 확실히 반영하고 있는 진정성 있는 방주기록이다. 더구나 가덕산 봉우리 아래 7천여 평이 넘는 묘토가 그 옛적부터 지금까지 종토(宗土)로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선림 종문의 큰자부심의 바탕이 된다 할 것이다.

「예조좌랑」의 벼슬과‘쌍폄’을 보충하였음은 그 근거여부를 떠나 일말의전승을 찾아내어 보완하였다고 양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뜻에서 2차보의 방주를 공식기록으로 인정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2) 5~8차보의 또 다른 방주기록

그런데, 이러한 4차보까지의 방주기록이 5차『병진보』(1916)에 이르러서는, 아주 그럴사하게 바뀌게 된다. 즉, 자(字)를 선보(先宝), 생년을 전조(前朝 -고려조) 경술생, 벼슬 호칭을 조선 태조조 이조좌랑이라 하고, 배위를 구체화하여‘숙부인(淑夫人) 진주 하(河)씨 부(父) 항(沆)’이라 하고, 묘소 위치는 행정구역(면) 명칭을 첨가하여‘묘 영암 곤일시(昆一始)면 가덕산 오좌 쌍폄 유비(有碑)'로 고쳐 쓰고 있다.

 

이 방주는 7차『정사보』(1977)에서 더욱 가공(架空) 윤색되고 8차『을해보』(1995)까지 그 줄기가 그대로 이어진다. 특히『정사보』의 방주가 가공윤색이 심한 것은 이 방주가 임영한씨가 주도한『임씨세가대동보』(1935) 방주를 인용함에 기인한다. 앞장에서 그 조작성에 관하여 자세히 논급한바와 같이『병진보』의 중시조 방주기록 또한 아무런 근거 없는 임의적 가공(架空)의 산물임을 감히 말씀드린다.

다만,‘경술생’이라는 생년, 즉 고려 공민왕19년(1370)생이라는 추정은 후술에서 보는바와 같이 김종직의『이존록』기록에 나오는 김종직의 부 김숙자 의 족숙이고 스승인 선산임씨 임재(林載)의 재세시기 추정에 비추어 어느 정도 근접한 추정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있다. 그리고 벼슬호칭의 핵심‘이조좌랑’은 구보의‘예조좌랑’에서 변형한 것으로 보이며,『영암군지』의‘이조정랑’기록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한편,『을해보』(1995)는‘태조조 문과 예조좌랑 증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지중추부사’로 하여 3차보에 나오는‘예조좌랑’,‘증 호조판서’를 환원시키고 있다. 배위는 어떻게 된 것일까? 무슨 근거가 새롭게 나왔기에 1916년에야‘ 진주하씨 하항(河沆)의 따님’이 배위인 것을 알았을까가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침 임종하 종인의 제보가 있어『진양하씨대동보』(2015 을미)를 조사해본 바, 부인 하씨의 부(父)라는 하항은, 호를 각재(覺齋)라 하여「각재공파」의 파조가 되는 분으로 광해(1610) 때 본향인 진주시 수곡면에「대각사(大覺祠)」라는 사우를 세워 봉향하고 있다.

 

중종33년(1538 무술) 생으로 생원시를 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선조23년(1590 경인)에 졸한 분이다.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하항은, 선림으로 치면 만(蔓)자 조(祖) 7세 령(齡)자 조의 자 극(克)자 항렬에 해당하는 연령대의 인물이다. 어떻게 이렇게 마구잡이로 족보를 쓸 수 있었을까? 『병진보』는 시조 임양저 공의 배위도‘연안이씨’라고 써 넣고 있다. 참으로 의아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1977년『정사보』에는 하 항이‘진양군(晉陽君) 즙(楫)의 후(后)’라 하였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즙은 항의 5세손(현손)이며 진양군은 가공(架空)이다. 대사간 벼슬이나 대각재라는 호도 가공이다. 선림의 상계종사 기록을 일대혼란에 빠뜨린 병진보 · 병신보 · 정사보의 조작은 모두 임영한씨가 주도한 일이다. 향후 새로운 족보를 수보하게 된다면 배위와 벼슬기록 등 조작의 흔적을 모두 바로 잡아야함이 후손의 도리일 것이다. 선현들이 당부하기를,‘의고가전(疑固可傳) 와불가전야(訛不可傳地)’라!“의심이 들어도 이미 굳은 의심이라면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되, 그릇되고 속이는사항은 전해서는 안된다.”고 한 경계의 말씀을 새길 필요가 있다.

 

 

* 진양하씨대동보 - 진양 하씨와 관향지명-진양 하씨는 고려 현종(1010~1031) 때 좌사낭중을 지냈으며, 거란과의 강화에 공을 세우고 순국한 하공진(河拱辰)을 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지명은 신라·고려초에는 청주(菁州), 강주(康州)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성종14년(995) 진주(晉州)로 개칭되고 조선 태조 때 진양(晉陽)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태종2년(1402년)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1896년 진주군으로 개편된 후 1939년 진주부와 진양군으로 분리된 후 현재는 진주시로 통합되었다.(시조와 지명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관향명이 진주가 더 합당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