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의 혼란과 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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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용원
1. 선산임씨 족보상 상계계보 요약 |
차수 |
발간연도 |
상계계보 |
비 고 |
1 |
1766 영조42 병술보 |
∙시조 임양저(林良貯) ∙중시조 만(蔓) |
시조와 설화의 전거 ●「희재공행장」(1590) ●「석천공행장」(1678) ●「석천공묘표」(1692) |
2 |
1821 순조21 신사보 |
∙시조 임양저(林良貯) ∙중시조 만(蔓) |
「시조설화」를 평택보에서 인용 |
3 |
1855 철종6 을묘보 |
∙시조 임양저 -무(珷)-우(祐)·사위 김광좌(金匡佐) ∙중시조 만(蔓) |
|
4 |
1891 고종28 신묘보 |
∙시조 임양저(林良貯) ∙중시조 만 (蔓) |
3차보상계 무·우 취소정정 |
5 |
1916 병진보 |
∙시조 온 중시조 팔급-양저-무(碔·珷)-희-면 -득우-몽주-희윤-정-언수-의미-만 |
도유사 임영한 씨 주도 |
6 |
1956 병신보 |
∙시조 임 팔급·양저-무·희·면·득우· 중조 몽주·정 ∙1세 언수 2세 의미 3세 만 |
1924년 평택관 『팽성임씨대동세보』의 편제 인용 |
7 |
1977 정사보 |
∙원조(遠祖) 온 ∙중조 팔급-양저-무-희·사위 김광좌–면 -득우-몽주-희윤-련-정-완-언수-의미 -만·희(曦) |
1935년 『임씨세가대동보』의 상계와 방주 인용 |
8 |
1995 을해보 |
∙시조 임양저(林良貯) ∙중시조 만 (蔓) |
5~7차보는 잘못되었으므로 최초보로 원상회복한다고 밝힘 |
2. 최초족보의 진정성과 편찬 일화 |
(1) 최초족보『병술보』(1766)의 상계기록과 그 진정성
영조42년(1766) 병술년에 편찬된 선림(善林) 최초족보『병술보』는 손록의시작을,「시조 임양저(林良貯)」라 하고 그 방주(傍註)는 단지「관(官-벼슬) 중랑장(中郎將)」이라고만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여백에“신라조(新羅朝) 경순왕자(敬順王子) 정현지서(貞顯之 壻) 관지(官至) 중랑장(中郎將)”이라는 신분만 부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시조와 그 신분의 전거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1590년경(선조23) 형조판서 윤의중이 쓴「희재공(임백령)행장」에 있었다. 1678년 (숙종4) 김수항이 쓴「석천선생 행적기략」이나 1692년(숙종18) 박세채가 쓴「석천공 묘표」도 그 전거가 된다. 글쓴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문반이었으며 그 연고도 있는 분들이었다. 우리 종문의 자랑스러운 두 선조께서 그 근거를 남기셨던 것이다. 시조 외의 상계에 대해서는,“세계(世系)가 실전되어 그간 몇 대가 지났는지 알 수가 없고, 참고할만한 문헌조차 없어 자손으로서 심히 한스러운 바이나 만 (蔓)공으로부터 지금까지는 그 계승내용이 구슬을 꿰어 잇듯이 분명하므로 만 공을 중시조로 한다.”고 하여 두 분 사이의 상계를 쓰지 못함이 만부득이 한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중시조에 대한 방주도 단지“묘 영암계읍천(溪邑川) 가덕산(加德山)"이라고만 쓰고 있다. 아무런 수식 없이 오직 알고 있는 사실만 기록 족보편찬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2차보 이후 손록방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설화기사는, 이미「희재공행장」에 소재(所載)하고 있으므로 굳이 중복하여 옮겨 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이 진실일터이다.
(2) 서·발문에서 본 보사(譜事)의 일화
1) 후손 계복(桂馥)이 쓴 발문(跋文)을 보면,
“선산임씨가 최초로 족보를 펴내고자 수보(修譜) 준비를 하던 때가 1703년(숙종29) 계미년인데 마침 사고가 생겨 중단하였다가 60년 후 계미년(1763 영조39)에 다시 발의 원근 종족(宗族)이 합심하여 백방으로 참고하고 여러 사 람에게 질문하고 수집하여 편집을 완료, 3년 후 병술년(1766 영조42)에 출판 하니 우리 선림의 세덕유광(世德遺光)이 이제 다시 찬연하여 내세에 불멸할 것이다.… 종족이 오래되어도 친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화목뿐이며 화목하지 않으면 모든 유파(流派)가 같은 뿌리인 줄 모르고 분열되어서 점점 멀어질 것 은 말할 것도 없다” 라는 소회와 당부의 말씀을 남기고 있다.
이를 보면 최초로 족보를 편찬함에 있어 장기간에 걸친 자료수집과 모든 역량을 동원함에 성의를 다하였음을 느끼게 한다. 족보의 체계는 물론 방주 한 자 한 자에 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하였음을 느낀다. 족보 편찬의 태도가 이러할진대 우리의 근원인「시조」와「중시조」가 어찌 참 되다 아니 할 것인가?
2) 원성인(原城人) 이의경(李毅敬)이 쓴 서문을 보면,
이 족보(병술보) 편찬 보사청의 일원인 낙선(樂善)공 (구령공 8세손)께서 서문을 부탁하면서 하신 말씀 중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고사로 말하면, 오 래되고 출세한 분은 시랑(侍郞) 임팔급이고 그 후손 금시위 득우 이하 여러분 이 모두 봉군되었다하지만 문헌이 믿을 것이 없어 올릴 수 없음”을 피력하셨 다 하고 있다. 즉, 낙선공께서는 평택임씨 최초족보(1764년 간)를 보셨을 것이고(그 주관처가 나주 향선재) 평택보의 상계가 신빙성이 없음을 간파하고 계셨음을 알 수가 있다.
3) 위와 같은 사정은『병술보』가 엄격한 고증 하에 역사적 진실과 사실관계에 따라 편찬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수보되는 족보는「시조설화」를 평택보에서 역수입하거나, 시 조와 상계를 함부로 변경하여 선림의 뿌리와 자주성을 왜곡 훼손하는 일마저 발생 선림종문과『병술보』편수 선인들을 욕되게 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이제 이에 대한 진상을 밝혀 종친제현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3. 최초의 혼란과 그 수습 |
(1) 2차『신사보』(1821 순조21)의 잘못
◎「시조설화」기사를 평택보에서 가져와 손록에 인용
우리의 시조 임양저공의 설화기사가 그 원전이「희재임백령공행장」안에 들어있음을 감빡하신 보사임원이 사실상 우리 것인 평택보의 기사를 역수입하여 방주로 등재한 것이다. 그러나, 평택보의 설화기사는 원전인 선림의 설화기사가 변작된 기사이다. 이를 놓친 선림족보는 수보시마다 기사를 윤색하여『을해보』까지 이어졌다.
(2) 3차『을묘보』(1855 철총6)의 잘못
◎ 2세 무(珷)-3세 우(祐)의 등장
시조 임양저공 다음 차로 아래 인물들이 등재된다.
∙ 2세 무(珷)-상호군 겸 판도판사 묘 선산부 남면 서산동
∙ 3세 우(祐)-려조 호성공신 봉 울릉군 묘 상동
∙ 사위 김광좌(金匡佐)-일선인
상계에 양저공의 2세, 3세를 등재 시키는 연유를 발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병술보에 중랑장공의 묘소가 선산야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병술보가아니라 2차 신사보의 오기-필자 주) 창원 종친들이 창원에 이거한 후부터 선산야성의 묘소를 성묘하고 있다. 중랑장·상호군·울릉군 3세의 묘소가 한 벌 안 에 있고 지문에도 뚜렷한 고증이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다.
① 양저공 묘소 이야기가 나오는 2차『신사보』의 설화기사는 평택보에서 인용한 것이고 가짜인데 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② 무(珷)가 선산 야성의 묘주임은 맞다. 그러나 임무(林珷)는 선산김씨 김광좌의 장인으로서 전언에 의하면 자식이 없어 그 딸인 김광좌의 부인이 아버지 묘를 선산김씨 묘역에 모신 것이다.
김광좌는 그의 아들이 취성(就成)(1492 성종23~1551 명종6)·취문(就文)(1509중종4~1570 선조3)인데, 아들형제는 조선중기의 학자·문인이었다. 이 묘역은 김취성의 재실 서산재(西山齋)가 있는 선산김씨 묘역이다. 묘 앞 상석에 쓰인 글자는「통정대부 상호군 임공지묘」이다. 그래서 상호군 임무(珷)라 한 것인데, 공교롭게도 평택임씨족보상 양저공의 자가 임무(林碔) 로 되어있음에 따른 오해였다.(이름 한자(漢字)가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선산김씨 족보에 의하면, 임무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우리와는 별계(別系)의 선산거주 선산임씨이다.
∙ 임봉생(林鳳生)-우인(遇仁)-무(珷)-사위 김광좌(金匡佐)
③ 우(祐)가 어떻게 올려졌는지는 알수가 없다. 묘가 없음도 물론이다.임우는 평택임씨 계열에 두 분이 계신데, 한 분은「울진임씨」로 고려 문종 때 인물이라 하며 울릉군에 봉군되었다 한다. 다른 분은「울진평택관 울릉군파」로서 조선 선조 때 인물이며 호성공신 울릉 군이다.
(3) 4차『신묘보』(1891 고종18)에서의 취소 정정
『을묘보』(1855) 이후 37년 만에『신묘보』(189I)를 수보하면서 구보가 등재한 상계를 따져보니 망거(妄擧)였다 하고 상호군·울릉군 양대를 다시 올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구보의 상계를 취소 정정하였다.
4. 5차『병진보』(1916) 상계 종사를 완전히 파괴 |
(1) 구보를 부정하는 무모하고 독단적인 상계도입
善林족보는 최초보 이후 4차 수보시까지「시조」와「중시조」를 오롯이 지켜왔는데, 1916년『병진보』를 수보하면서 도유사 임영한(英漢)씨의 주도하에 시조를 비롯한 상계 종사와 계보를 아래와 같이 전혀 엉뚱하게 왜곡하여 바꾸었다.
∙ 시조 온(蘊)
∙ 중시조 팔급(八及)-양저(良貯)-무(碔·珷)-희(禧)-면(冕)-득우(得雨)- 몽주(夢周)-희윤(喜胤)-정(楨)-언수(彦脩)-의미(毅味)(언수의 7자)-만(蔓)
이 계보의 특징은
① 선산임씨의 근원을 평택임씨 충정공 임언수계로 만들었다는 점이며
② 근거로 내세운 것이「석천선생수기가승(石川先生手記家乘)」이라는 것인데, 이는 위작(僞作)의 가승보였다.
③ 그런데 이 계보는 정작 평택임씨 정통구보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으며 그중 특히 시조「온」,「언수공의 8자」등은 정통구보에는 나오지 않거나 오히려 부인되고 있던 설이다.
④ 이 계보가 팔급~언수 사이를 부자관계로 계대(繼代)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정통평택임씨구보와는 다르다.(정통구보는 개별나열 방식)
⑤ 만(蔓)공의 부가 된다는 의미(毅味)는 가공의 인물이다.「석천선생수기가승」·「의미」등과 관련하여서는 앞장 임종필씨 글에 자세히 소개되어있는 대로이다.
(2) 상계 계보의 출처는 어디였을까?
1) 우선『병진보』가 수보되는 1916년을 전후한 시기 또는 그 이전 평택임씨 족보 중 정통구보의 상계 계보를 먼저 살펴보고,『병진보』가 채택한 상계와 유사한 상계가 올려져 있는 족보예를 살펴 보겠다.
① 평택임씨 정통구보(1764·1804·1846·1897『평택임씨족보』)의 상계
「팔급·양저-무·희·면·득우·정·1세 언수-성미·견미·제미의 3자」
이 계보가 평택임씨 충정공 언수계의 정설계보이다. 위 구보는 임언수공의 장자 충간공 성미파가 주관하여 발간한 정통성 있는 족보이다. 그 총본산이 나주시 송월동에 있는 성미의 종손 직장공 임첨의 재실 향선재이다. 이 계보의 특징은 상계조를 개별나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외적으로 양저-무의 관계만 부자관계로 하고 있는게 이 또한 특이한 점이다.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언수공의 자는 성미·견미·제미 3자뿐이라는 점이다.더 중요한 것은 언수공의 미(味)자 항 8자(子)설을 별도의 부기문에서 근거없는 설이라 하여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다.(「선산임씨 의미계보설의 진상」에서 상설)
②1916년 충남 홍성 임정호 발행『평택임씨세보』의 상계
「온·팔급·양저·무·희·면·득우·몽주·희윤·련(璉)·정·1세 언수-성미·제미·견미·세미·선미·자미·의미·계미의 8자」
선림『병진보』계보와 거의 비슷하다.『병진보』는「련」이 없고 팔급~언수 사이가 부자관계로 계대(繼代)되어 있는데 이 보첩은 개별나열 방식이다. 방주내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이 보첩은 서·발문이나 행장류가 없는 일종의지방파보이다.
상계편「언수공의 자」에서는 3자 외에 나머지 5자는 모두 ○○군(君)으로 호칭하면서 아래에 해당 관향을 쓰고 있다.「일선군 의미」는「선산·진천」관조 로 되어 있다. 한편 손록에서는 언수공의 계보가 성미·제미·견미 3자만 나온다.
③ 1919년 강릉군 임현식 발행『평택임씨족보』의 상계
「팔급·양저·무·희·면·득우·몽주·희윤·련·정·1세 언수-성미·제미·견 미·세미·선미·자미·의미·계미의 8자」
위 홍성파보와 비슷한 편제이다. 홍성보와의 차이는「온」이 빠져있다는 점과언수공의 8자 모두 손록이 계보화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보첩에서「의미」는 방주가「통훈대부 이조판서 일선군」이고 계하의 계보 가「의미-연옥(槤玉)- 선엽(善燁)-기석(基錫)-일(鎰)」로 되어 있다.
④ 1927년 간행『임씨세가대동보』의「충정공묘비문」
「팔급-양저-무-희-면-득우-몽주-희윤-련-정-완(玩)-언수-성미·제미·견미·세미·선미·자미·의미·계미의 8자」
이 계보는「충정공(언수)묘비문」에 나오는 계보이다. 홍성·강릉파보와의 차이는「완」이 새로 들어있으며 부자관계로 계대(繼代)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보첩은, 충정공 언수의 장자 충간공 성미파 후손들인 임노철·재기 씨 등이 주동이 되고 예천·조양임씨가 합세하여 만든 단권의 보첩인데 묘비문·행장류 등으로만 편철되어 있다.
이 보첩의 서문과 평택임씨의 가장 비중있는 구보『팽성임씨대동세보』(1924갑자) 언수공 방주를 종합하면, 임노철씨 등이 1917년 경 경북 성주에서 대를 잡고 굿까지 하여 언수공 묘소를 발견하였고 여기서「충정공묘지석」을 발굴하 였다는 것이다. 이 묘지석의 비문이 보첩에 나오는「충정공묘비문」이다. 그러나 이 묘지석은 가짜이다.「가짜 묘지석」을 미리 묻어두고 발굴 쇼를 벌인 것이다. 그래서 평택임씨 종중에서는 족보방주에 이 사실을 쓰고 종친들에 게 현혹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그럼에도 임노철씨 등은 이「가짜 충정공묘 비문」을 세상에 알리고자 단권의 보첩을 발간하였던 것이다.
이「가짜 충정공본비문」계보의 특징은 ㉠ 정통구보에는 없는 상계조를 임의로 추가하고 ㉡ 홍성·강릉 파보의 예와 같이 언수공의 자를 미(味)자 항렬 8자로 하고 ㉢ 각 상계조를 부자관계로 연결 계대(繼代)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유의할만한 점은「가짜 묘지석 발굴소동」이 일어난 시기(1917년 경) 와 선림『병진보』(1916) 발간시기가 비슷한 시기라는 점이다. 이로보아 이 묘비문의 계대내용 등이『병진보』상계 계보에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크다.
⑤ 1935년 간행『임씨세가대동보』의「충정공묘비문」과 족보상계
「온·팔급-양저-무-희-면-득우-몽주-희윤-련-정-완-언수-성미 등 8미(味)자」
이 계보는 전술한 1927년 묘비문 계보에「온」이 추가되어 있다. 그러나 특기할 것은 비문의 내용이 1927년 비문과 많이 바뀌어 있다는 사실이다. 가짜 묘비문이 또 다른 가짜 묘비문으로 바뀐 것이다.
이 보첩은 1927년보 편찬을 주도한 평택임씨 충간공파 인사와 예천·조양임씨 외에 장흥·선산임씨가 새로 참여하여 만든 21책의 대형보첩이다. 본격적 으로 만든 범임씨대동보였다. 선산임씨는 임영한씨가 부유사로 참여 방주기록 등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 위 보첩들의 계보 예를 보면, 선산임씨『병진보』상계와 일치하는 예는없으나 서로 조합하면 거의 근접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하다면, 다음과 같은 추리가 가능해진다.
1900년대 초반 경 평택임씨 일부종인들이 종중의 공식 의견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 분들이 파보 등을 통하여 이설(異說)의 상계를 표명하고 있었는데, 선산임씨 임영한씨 등이 이 분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임씨 상계의 여러 정보를 얻게 된바, 이 정보가 『병진보』 상계 계보작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 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병진보』상계의 출처가 될 만한 단서들을 종합해 보면,임영한씨는 전술한 바의 예와 정보를 바탕으로 여러 타관향 족보를 참조하여 종합적·임의적으로 『병진보』 상계를 만들고 방주를 썼다고 볼 수 있다.
① 시조로 나오는「온(蘊)」은 부안임씨족보(1876·1896)에 처음 나오고 1916년홍성의 평택파보, 1935년의『임씨세가대동보』가 채택하고 있다. 「임온」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온은 중국 당 덕종(780~804) 때 서천절도사추관을 지냈고 소주자사를 지낸 분이다. 그런데 임온이 부안임씨 상계에 오르게 된 연유는, 예천·부안 임씨 선조 서하(西河) 선생 임춘(林椿)의「중추회음서(中秋會飮序)」라는 글에 이 이름이 나옴을 발견하고 임온이 임춘의 선조가 된다고 봄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중추회음서」를 엄밀히 해석해보면 서하 선생은 이 글에 임온의 고사를 인용하였을 뿐이었는데 부안보가 이를 오해하여 서하 선생이 임온의 후손이 된다고 하여 상계에 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위 평택파보와 선림『병진보』가 이를 따른 것이다. (임온에 관하여는 필자가 전국임씨중앙회 2018. 5. 30자「임씨회보」제21호에 기고한 바 있다.)
② 상계의「희윤」은 1854년 부안보에 처음 나온바 있고 그 후 1876, 1896년보에 부기문으로 나오는 상계조이다.
평택임씨는 1924년『팽성임씨대동세보』에서「희윤」을 평택임씨의 또 다른 대파계인 전객령공세춘계의 상계로 공식화하여 지금은 세춘계의 상계로 되어 있다.
③ 상계를 부자관계로 계대(繼代)하고 있음은「가짜 충정공묘비문」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④ 조양임씨의 영향도 컸으리라 짐작이 된다.
조양 임씨는 1742년 처음으로 족보를 발간하였는데 그 때는 시조가「조양군(兆陽君) 임세미(世味)」였다. 그런데 1803년 2차 수보 때 조양임씨가 평택임씨계에 실근원이 있다고 하면서 세미공을 충정공 언수의 자로 편입하였다. 이 사실은 선산임씨가 언수공의 7자라는「선산군 임의미」의 계하가 되는 구실로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 실제로 선림『병진보』는 팔급·양저 방주기록에 조양임씨족보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⑤ 조양임씨족보의 팔급방주 등이 순창임씨족보(1789·1804)와 유사한 점이많은데, 순창임씨 족보도 참조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3) 1900년대 초반의 시대상황과『병진보』발간 경위
『병진보』(1916)는 전보『신묘보』(1891)가 발간된 지 26년 만에 발간되었는데 이는 통상의 기간보다 빠른 편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1900년대 초반 즈음의 시대상황도 함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즉,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노비제도가 폐지되고, 1896년 새로운「호구조사규칙」이 공포되었으며, 1909년 새「민적법」이 시행되면서 호구조사나 호적등록시「본관」이 필수기재사항이 되어 족보편찬이 급격히 늘게 된다. 다른 한편 19세기 초 중반에는 동성출어일조(同姓出於一祖)라는 관념이 확산되기 시작, 조양관을 필두로 부안·예천관은 물론 심지어 진천관 까지도「임팔급」을 우리나라 임씨 시조로 하는 기류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시대환경의 변화에 따라 일부 평택임씨 종인들이 임언수공의 8미자설을 내세워 이른바 팔림설(八林設)을 제기 여러 임씨들의 참여를 부추긴 측면도 있다.이렇게 타관향 계보나 족보의 예, 시대상황을 종합하여 유추해 보면,
① 『병진보』가 근거로 내세우는「석천선생수기가승」즉「선산임씨세계단(世系單)」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명확치 않더라도-그러나 명백한 위보(僞譜)였다-1900년 대 초반 당시에는 이미 여러 임씨관향들이「임팔급」을 시조로대동계보를 이루자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있었음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② 「가짜 충정공묘비문」관련 인사들이나 참조한 족보(조양·순창·부안 등)의 연고지도 모두 호남지방이 그 기반으로, 이들 인사들과의 교류에서 선산임씨도 조양임씨와 마찬가지로 평택임씨에 실근원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확신으로 바뀌어 『병진보』편찬의 밑바탕 의식이 되었을 것으로 보는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4차수보 때까지 연면히 내려온『병술보』의 창보정신 내면의 깊은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일부종인들께서 개인의견을 앞세워 신성한 종사(宗 史)를 왜곡 파괴하고 만 것이『병진보』수보였다.
이러한 처사는, 엄중한 종사를 가벼이 여겨 임의적·독단적으로 중시조를 가공(架空)의 인물에 연접시켜 독자성을 훼손한 것이며, 더구나 우리의 시조 「임양저」공 마저 평택임씨 시조「임팔급」의 자로 계대(繼代)하고(평택보 상계는 별론으로 함) 근거 없는 상계를 설정하고 선림(善林)을 평택관으로 편입하여 선산임씨의 종사와 정체성을 훼손하고만 해종행위였다.
(4) 『병진보』상계의 허위성
『병진보』상계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 진정성을 인정할 수 없다.
① 선상임씨족보는 최초족보『병술보』에서 시조와 중시조를 확실한 근거 하에 명확히 밝혔으며, 시조의 근거가 되는 오리지널 설화를 간직하고 있었고, 그설화는 역사적 사실관계와도 부합한다.
② 시조 임양저공은 그 신분(중랑장·경순왕자 사위)상 신라의 엄격한 신분제인「골품제」에 비추어 결코 중국 도래인 임팔급의 자 또는 그 후예가 될 수없다.
③ 선산임씨가 선산의 호장종문이라는 사실은 시조의 신분이 합당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④ 역사기록상 경주에 고위직의 임씨가 존재하였다는 사실 즉, 강주(진주)태수이며 그 딸이 고려태조 왕건의 비가 된 임언(林彦)의 예는 선산임씨가 경주를 발원지로 하였음이 맞다는 간접증거가 된다.
⑤ 『병진보』의 상계 인물들은 임양저공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임씨와 관련이 없거나(임온), 실증 된 바가 없는 어쩌면 가공(架空)의 인물들이다. 특히 우리의 중시조만공의 부가 된다는 의미는 명백히 가공의 인물이다. -언수공의 자로 거명된 8미의 자중 선미(先味)는 순창관조 중연의 자이고 나머지 자미(自味)·의미(毅味)·계미(季味)는 모두 가공이다.
5. 6차『병신보』(1956) 상계의 특징과 출처 |
1956년 간행된 6차 족보『병신보』수보 도유사는 전보『병진보』와 같은 임영한씨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족보의 체계와 상계를 1924년의 『팽성임씨대동세보』를따르고 있다. 상계 계보는 다음과 같으며 방주까지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시조 임팔급·양저-무·희·면·득우·중조(中祖) 몽주·정·1세 언수」「언수의 자」는『팽성보』가 성미·견미·제미·세미·자미·의미의 6자만 등재하였는데,『병신보』는 선미(先味)·계미(季味)까지 포함하여 전보와 같이 여전히 8자를 고집하고 있다.
善林의 계보는 물론「언수-의미-만-진-간」으로 이어지고 있다.『팽성임씨대동세보』는 평택임씨 정통구보의 맥을 이으면서 1924년 범임씨대동보의 형태로 간행된 25권의 대형보첩이다. 지금은 평택임씨 각파에서 족보편수 때 전거로 삼고 있는 중요한 보첩이다. 그렇게 요란하게 소동을 일으키면서 간행한『병진보』상계를 버리고 새로이『팽성임씨대동세보』상계를 따르게 된 연유를 밝히는 어떠한 설명도 없다.
6. 7차『정사보』(1977) 상계의 특징과 출처 |
1977년 간행된 7차 족보『정사보』(도유사 임평준)는 1935년 간행된『임씨세가대동보』라는 보첩의 상계와 방주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또다시 족보의 체계와 상계를 바꾼 것이다.
『임씨세가대동보』는 그 계보도「가짜 충정공묘비문」에 근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방주의 내용도 많은 가공(架空)으로 윤색되어 있다. 특히 상계 방주는 거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보첩이다. 이 보첩편찬 주역의 한분이 임영한씨 였는데 결과적으로 임영한씨는 선산임씨족보 발간사에 오점을 남긴 3개보첩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하신 셈이다.
7. 『을해보』(1995) 발간과 상계의 혼란 수습 |
1916년 병진보, 1956년 병신보, 1977년 정사보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① 최초보~4차보에 대한 존경과 검토 배려는 결한 채, 줏대와 일관성조차 없었다.
② 어찌하여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리고 우리의 존숭받는 선조 석천 선생의계보를 조작하여 가짜 가승보를 만들었을까하는 의구심이며,
③ 평택임씨 계보에 연접할 의도로 가짜 가승보를 만들고, 이를 근거로 내세운 종중 지도자를 둔 우리는 한때나마 독립을 빼앗긴 나라꼴을 당한 셈이었는데, 거개의 종친들은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고,
④ 아직도 한국임씨는 한 종족(宗族)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종인이계시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 세족보는 선산임씨의 독자성과 연면한 종사를 왜곡하였으며 그 정체성을 훼손하고 말았다.그러나 다행히도 1995년『을해보』를 수보하면서 도유사 임태정(전국종친회장)·부유사 임종필씨 등에 의해 최초족보『병술보』의 창보정신으로 돌아가『병술보』의 원뜻대로 시조·중시조를 원상으로 복원하고, 병진보·병신보·정사보에서의 종사 혼란과 왜곡을 바로 잡고 수습하였음은 참으로 우리의 근원이신 조상이 도우신 일로 생각된다.
- 임용원
1. 선산임씨 족보상 상계계보 요약 |
차수 |
발간연도 |
상계계보 |
비 고 |
1 |
1766 영조42 병술보 |
∙시조 임양저(林良貯) ∙중시조 만(蔓) |
시조와 설화의 전거 ●「희재공행장」(1590) ●「석천공행장」(1678) ●「석천공묘표」(1692) |
2 |
1821 순조21 신사보 |
∙시조 임양저(林良貯) ∙중시조 만(蔓) |
「시조설화」를 평택보에서 인용 |
3 |
1855 철종6 을묘보 |
∙시조 임양저 -무(珷)-우(祐)·사위 김광좌(金匡佐) ∙중시조 만(蔓) |
|
4 |
1891 고종28 신묘보 |
∙시조 임양저(林良貯) ∙중시조 만 (蔓) |
3차보상계 무·우 취소정정 |
5 |
1916 병진보 |
∙시조 온 중시조 팔급-양저-무(碔·珷)-희-면 -득우-몽주-희윤-정-언수-의미-만 |
도유사 임영한 씨 주도 |
6 |
1956 병신보 |
∙시조 임 팔급·양저-무·희·면·득우· 중조 몽주·정 ∙1세 언수 2세 의미 3세 만 |
1924년 평택관 『팽성임씨대동세보』의 편제 인용 |
7 |
1977 정사보 |
∙원조(遠祖) 온 ∙중조 팔급-양저-무-희·사위 김광좌–면 -득우-몽주-희윤-련-정-완-언수-의미 -만·희(曦) |
1935년 『임씨세가대동보』의 상계와 방주 인용 |
8 |
1995 을해보 |
∙시조 임양저(林良貯) ∙중시조 만 (蔓) |
5~7차보는 잘못되었으므로 최초보로 원상회복한다고 밝힘 |
2. 최초족보의 진정성과 편찬 일화 |
(1) 최초족보『병술보』(1766)의 상계기록과 그 진정성
영조42년(1766) 병술년에 편찬된 선림(善林) 최초족보『병술보』는 손록의시작을,「시조 임양저(林良貯)」라 하고 그 방주(傍註)는 단지「관(官-벼슬) 중랑장(中郎將)」이라고만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여백에“신라조(新羅朝) 경순왕자(敬順王子) 정현지서(貞顯之 壻) 관지(官至) 중랑장(中郎將)”이라는 신분만 부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시조와 그 신분의 전거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1590년경(선조23) 형조판서 윤의중이 쓴「희재공(임백령)행장」에 있었다. 1678년 (숙종4) 김수항이 쓴「석천선생 행적기략」이나 1692년(숙종18) 박세채가 쓴「석천공 묘표」도 그 전거가 된다. 글쓴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문반이었으며 그 연고도 있는 분들이었다. 우리 종문의 자랑스러운 두 선조께서 그 근거를 남기셨던 것이다. 시조 외의 상계에 대해서는,“세계(世系)가 실전되어 그간 몇 대가 지났는지 알 수가 없고, 참고할만한 문헌조차 없어 자손으로서 심히 한스러운 바이나 만 (蔓)공으로부터 지금까지는 그 계승내용이 구슬을 꿰어 잇듯이 분명하므로 만 공을 중시조로 한다.”고 하여 두 분 사이의 상계를 쓰지 못함이 만부득이 한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중시조에 대한 방주도 단지“묘 영암계읍천(溪邑川) 가덕산(加德山)"이라고만 쓰고 있다. 아무런 수식 없이 오직 알고 있는 사실만 기록 족보편찬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2차보 이후 손록방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설화기사는, 이미「희재공행장」에 소재(所載)하고 있으므로 굳이 중복하여 옮겨 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이 진실일터이다.
(2) 서·발문에서 본 보사(譜事)의 일화
1) 후손 계복(桂馥)이 쓴 발문(跋文)을 보면,
“선산임씨가 최초로 족보를 펴내고자 수보(修譜) 준비를 하던 때가 1703년(숙종29) 계미년인데 마침 사고가 생겨 중단하였다가 60년 후 계미년(1763 영조39)에 다시 발의 원근 종족(宗族)이 합심하여 백방으로 참고하고 여러 사 람에게 질문하고 수집하여 편집을 완료, 3년 후 병술년(1766 영조42)에 출판 하니 우리 선림의 세덕유광(世德遺光)이 이제 다시 찬연하여 내세에 불멸할 것이다.… 종족이 오래되어도 친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화목뿐이며 화목하지 않으면 모든 유파(流派)가 같은 뿌리인 줄 모르고 분열되어서 점점 멀어질 것 은 말할 것도 없다” 라는 소회와 당부의 말씀을 남기고 있다.
이를 보면 최초로 족보를 편찬함에 있어 장기간에 걸친 자료수집과 모든 역량을 동원함에 성의를 다하였음을 느끼게 한다. 족보의 체계는 물론 방주 한 자 한 자에 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하였음을 느낀다. 족보 편찬의 태도가 이러할진대 우리의 근원인「시조」와「중시조」가 어찌 참 되다 아니 할 것인가?
2) 원성인(原城人) 이의경(李毅敬)이 쓴 서문을 보면,
이 족보(병술보) 편찬 보사청의 일원인 낙선(樂善)공 (구령공 8세손)께서 서문을 부탁하면서 하신 말씀 중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고사로 말하면, 오 래되고 출세한 분은 시랑(侍郞) 임팔급이고 그 후손 금시위 득우 이하 여러분 이 모두 봉군되었다하지만 문헌이 믿을 것이 없어 올릴 수 없음”을 피력하셨 다 하고 있다. 즉, 낙선공께서는 평택임씨 최초족보(1764년 간)를 보셨을 것이고(그 주관처가 나주 향선재) 평택보의 상계가 신빙성이 없음을 간파하고 계셨음을 알 수가 있다.
3) 위와 같은 사정은『병술보』가 엄격한 고증 하에 역사적 진실과 사실관계에 따라 편찬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수보되는 족보는「시조설화」를 평택보에서 역수입하거나, 시 조와 상계를 함부로 변경하여 선림의 뿌리와 자주성을 왜곡 훼손하는 일마저 발생 선림종문과『병술보』편수 선인들을 욕되게 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이제 이에 대한 진상을 밝혀 종친제현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3. 최초의 혼란과 그 수습 |
(1) 2차『신사보』(1821 순조21)의 잘못
◎「시조설화」기사를 평택보에서 가져와 손록에 인용
우리의 시조 임양저공의 설화기사가 그 원전이「희재임백령공행장」안에 들어있음을 감빡하신 보사임원이 사실상 우리 것인 평택보의 기사를 역수입하여 방주로 등재한 것이다. 그러나, 평택보의 설화기사는 원전인 선림의 설화기사가 변작된 기사이다. 이를 놓친 선림족보는 수보시마다 기사를 윤색하여『을해보』까지 이어졌다.
(2) 3차『을묘보』(1855 철총6)의 잘못
◎ 2세 무(珷)-3세 우(祐)의 등장
시조 임양저공 다음 차로 아래 인물들이 등재된다.
∙ 2세 무(珷)-상호군 겸 판도판사 묘 선산부 남면 서산동
∙ 3세 우(祐)-려조 호성공신 봉 울릉군 묘 상동
∙ 사위 김광좌(金匡佐)-일선인
상계에 양저공의 2세, 3세를 등재 시키는 연유를 발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병술보에 중랑장공의 묘소가 선산야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병술보가아니라 2차 신사보의 오기-필자 주) 창원 종친들이 창원에 이거한 후부터 선산야성의 묘소를 성묘하고 있다. 중랑장·상호군·울릉군 3세의 묘소가 한 벌 안 에 있고 지문에도 뚜렷한 고증이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다.
① 양저공 묘소 이야기가 나오는 2차『신사보』의 설화기사는 평택보에서 인용한 것이고 가짜인데 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② 무(珷)가 선산 야성의 묘주임은 맞다. 그러나 임무(林珷)는 선산김씨 김광좌의 장인으로서 전언에 의하면 자식이 없어 그 딸인 김광좌의 부인이 아버지 묘를 선산김씨 묘역에 모신 것이다.
김광좌는 그의 아들이 취성(就成)(1492 성종23~1551 명종6)·취문(就文)(1509중종4~1570 선조3)인데, 아들형제는 조선중기의 학자·문인이었다. 이 묘역은 김취성의 재실 서산재(西山齋)가 있는 선산김씨 묘역이다. 묘 앞 상석에 쓰인 글자는「통정대부 상호군 임공지묘」이다. 그래서 상호군 임무(珷)라 한 것인데, 공교롭게도 평택임씨족보상 양저공의 자가 임무(林碔) 로 되어있음에 따른 오해였다.(이름 한자(漢字)가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선산김씨 족보에 의하면, 임무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우리와는 별계(別系)의 선산거주 선산임씨이다.
∙ 임봉생(林鳳生)-우인(遇仁)-무(珷)-사위 김광좌(金匡佐)
③ 우(祐)가 어떻게 올려졌는지는 알수가 없다. 묘가 없음도 물론이다.임우는 평택임씨 계열에 두 분이 계신데, 한 분은「울진임씨」로 고려 문종 때 인물이라 하며 울릉군에 봉군되었다 한다. 다른 분은「울진평택관 울릉군파」로서 조선 선조 때 인물이며 호성공신 울릉 군이다.
(3) 4차『신묘보』(1891 고종18)에서의 취소 정정
『을묘보』(1855) 이후 37년 만에『신묘보』(189I)를 수보하면서 구보가 등재한 상계를 따져보니 망거(妄擧)였다 하고 상호군·울릉군 양대를 다시 올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구보의 상계를 취소 정정하였다.
4. 5차『병진보』(1916) 상계 종사를 완전히 파괴 |
(1) 구보를 부정하는 무모하고 독단적인 상계도입
善林족보는 최초보 이후 4차 수보시까지「시조」와「중시조」를 오롯이 지켜왔는데, 1916년『병진보』를 수보하면서 도유사 임영한(英漢)씨의 주도하에 시조를 비롯한 상계 종사와 계보를 아래와 같이 전혀 엉뚱하게 왜곡하여 바꾸었다.
∙ 시조 온(蘊)
∙ 중시조 팔급(八及)-양저(良貯)-무(碔·珷)-희(禧)-면(冕)-득우(得雨)- 몽주(夢周)-희윤(喜胤)-정(楨)-언수(彦脩)-의미(毅味)(언수의 7자)-만(蔓)
이 계보의 특징은
① 선산임씨의 근원을 평택임씨 충정공 임언수계로 만들었다는 점이며
② 근거로 내세운 것이「석천선생수기가승(石川先生手記家乘)」이라는 것인데, 이는 위작(僞作)의 가승보였다.
③ 그런데 이 계보는 정작 평택임씨 정통구보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으며 그중 특히 시조「온」,「언수공의 8자」등은 정통구보에는 나오지 않거나 오히려 부인되고 있던 설이다.
④ 이 계보가 팔급~언수 사이를 부자관계로 계대(繼代)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정통평택임씨구보와는 다르다.(정통구보는 개별나열 방식)
⑤ 만(蔓)공의 부가 된다는 의미(毅味)는 가공의 인물이다.「석천선생수기가승」·「의미」등과 관련하여서는 앞장 임종필씨 글에 자세히 소개되어있는 대로이다.
(2) 상계 계보의 출처는 어디였을까?
1) 우선『병진보』가 수보되는 1916년을 전후한 시기 또는 그 이전 평택임씨 족보 중 정통구보의 상계 계보를 먼저 살펴보고,『병진보』가 채택한 상계와 유사한 상계가 올려져 있는 족보예를 살펴 보겠다.
① 평택임씨 정통구보(1764·1804·1846·1897『평택임씨족보』)의 상계
「팔급·양저-무·희·면·득우·정·1세 언수-성미·견미·제미의 3자」
이 계보가 평택임씨 충정공 언수계의 정설계보이다. 위 구보는 임언수공의 장자 충간공 성미파가 주관하여 발간한 정통성 있는 족보이다. 그 총본산이 나주시 송월동에 있는 성미의 종손 직장공 임첨의 재실 향선재이다. 이 계보의 특징은 상계조를 개별나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외적으로 양저-무의 관계만 부자관계로 하고 있는게 이 또한 특이한 점이다.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언수공의 자는 성미·견미·제미 3자뿐이라는 점이다.더 중요한 것은 언수공의 미(味)자 항 8자(子)설을 별도의 부기문에서 근거없는 설이라 하여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다.(「선산임씨 의미계보설의 진상」에서 상설)
②1916년 충남 홍성 임정호 발행『평택임씨세보』의 상계
「온·팔급·양저·무·희·면·득우·몽주·희윤·련(璉)·정·1세 언수-성미·제미·견미·세미·선미·자미·의미·계미의 8자」
선림『병진보』계보와 거의 비슷하다.『병진보』는「련」이 없고 팔급~언수 사이가 부자관계로 계대(繼代)되어 있는데 이 보첩은 개별나열 방식이다. 방주내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이 보첩은 서·발문이나 행장류가 없는 일종의지방파보이다.
상계편「언수공의 자」에서는 3자 외에 나머지 5자는 모두 ○○군(君)으로 호칭하면서 아래에 해당 관향을 쓰고 있다.「일선군 의미」는「선산·진천」관조 로 되어 있다. 한편 손록에서는 언수공의 계보가 성미·제미·견미 3자만 나온다.
③ 1919년 강릉군 임현식 발행『평택임씨족보』의 상계
「팔급·양저·무·희·면·득우·몽주·희윤·련·정·1세 언수-성미·제미·견 미·세미·선미·자미·의미·계미의 8자」
위 홍성파보와 비슷한 편제이다. 홍성보와의 차이는「온」이 빠져있다는 점과언수공의 8자 모두 손록이 계보화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보첩에서「의미」는 방주가「통훈대부 이조판서 일선군」이고 계하의 계보 가「의미-연옥(槤玉)- 선엽(善燁)-기석(基錫)-일(鎰)」로 되어 있다.
④ 1927년 간행『임씨세가대동보』의「충정공묘비문」
「팔급-양저-무-희-면-득우-몽주-희윤-련-정-완(玩)-언수-성미·제미·견미·세미·선미·자미·의미·계미의 8자」
이 계보는「충정공(언수)묘비문」에 나오는 계보이다. 홍성·강릉파보와의 차이는「완」이 새로 들어있으며 부자관계로 계대(繼代)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보첩은, 충정공 언수의 장자 충간공 성미파 후손들인 임노철·재기 씨 등이 주동이 되고 예천·조양임씨가 합세하여 만든 단권의 보첩인데 묘비문·행장류 등으로만 편철되어 있다.
이 보첩의 서문과 평택임씨의 가장 비중있는 구보『팽성임씨대동세보』(1924갑자) 언수공 방주를 종합하면, 임노철씨 등이 1917년 경 경북 성주에서 대를 잡고 굿까지 하여 언수공 묘소를 발견하였고 여기서「충정공묘지석」을 발굴하 였다는 것이다. 이 묘지석의 비문이 보첩에 나오는「충정공묘비문」이다. 그러나 이 묘지석은 가짜이다.「가짜 묘지석」을 미리 묻어두고 발굴 쇼를 벌인 것이다. 그래서 평택임씨 종중에서는 족보방주에 이 사실을 쓰고 종친들에 게 현혹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그럼에도 임노철씨 등은 이「가짜 충정공묘 비문」을 세상에 알리고자 단권의 보첩을 발간하였던 것이다.
이「가짜 충정공본비문」계보의 특징은 ㉠ 정통구보에는 없는 상계조를 임의로 추가하고 ㉡ 홍성·강릉 파보의 예와 같이 언수공의 자를 미(味)자 항렬 8자로 하고 ㉢ 각 상계조를 부자관계로 연결 계대(繼代)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유의할만한 점은「가짜 묘지석 발굴소동」이 일어난 시기(1917년 경) 와 선림『병진보』(1916) 발간시기가 비슷한 시기라는 점이다. 이로보아 이 묘비문의 계대내용 등이『병진보』상계 계보에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크다.
⑤ 1935년 간행『임씨세가대동보』의「충정공묘비문」과 족보상계
「온·팔급-양저-무-희-면-득우-몽주-희윤-련-정-완-언수-성미 등 8미(味)자」
이 계보는 전술한 1927년 묘비문 계보에「온」이 추가되어 있다. 그러나 특기할 것은 비문의 내용이 1927년 비문과 많이 바뀌어 있다는 사실이다. 가짜 묘비문이 또 다른 가짜 묘비문으로 바뀐 것이다.
이 보첩은 1927년보 편찬을 주도한 평택임씨 충간공파 인사와 예천·조양임씨 외에 장흥·선산임씨가 새로 참여하여 만든 21책의 대형보첩이다. 본격적 으로 만든 범임씨대동보였다. 선산임씨는 임영한씨가 부유사로 참여 방주기록 등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 위 보첩들의 계보 예를 보면, 선산임씨『병진보』상계와 일치하는 예는없으나 서로 조합하면 거의 근접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하다면, 다음과 같은 추리가 가능해진다.
1900년대 초반 경 평택임씨 일부종인들이 종중의 공식 의견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 분들이 파보 등을 통하여 이설(異說)의 상계를 표명하고 있었는데, 선산임씨 임영한씨 등이 이 분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임씨 상계의 여러 정보를 얻게 된바, 이 정보가 『병진보』 상계 계보작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 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병진보』상계의 출처가 될 만한 단서들을 종합해 보면,임영한씨는 전술한 바의 예와 정보를 바탕으로 여러 타관향 족보를 참조하여 종합적·임의적으로 『병진보』 상계를 만들고 방주를 썼다고 볼 수 있다.
① 시조로 나오는「온(蘊)」은 부안임씨족보(1876·1896)에 처음 나오고 1916년홍성의 평택파보, 1935년의『임씨세가대동보』가 채택하고 있다. 「임온」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온은 중국 당 덕종(780~804) 때 서천절도사추관을 지냈고 소주자사를 지낸 분이다. 그런데 임온이 부안임씨 상계에 오르게 된 연유는, 예천·부안 임씨 선조 서하(西河) 선생 임춘(林椿)의「중추회음서(中秋會飮序)」라는 글에 이 이름이 나옴을 발견하고 임온이 임춘의 선조가 된다고 봄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중추회음서」를 엄밀히 해석해보면 서하 선생은 이 글에 임온의 고사를 인용하였을 뿐이었는데 부안보가 이를 오해하여 서하 선생이 임온의 후손이 된다고 하여 상계에 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위 평택파보와 선림『병진보』가 이를 따른 것이다. (임온에 관하여는 필자가 전국임씨중앙회 2018. 5. 30자「임씨회보」제21호에 기고한 바 있다.)
② 상계의「희윤」은 1854년 부안보에 처음 나온바 있고 그 후 1876, 1896년보에 부기문으로 나오는 상계조이다.
평택임씨는 1924년『팽성임씨대동세보』에서「희윤」을 평택임씨의 또 다른 대파계인 전객령공세춘계의 상계로 공식화하여 지금은 세춘계의 상계로 되어 있다.
③ 상계를 부자관계로 계대(繼代)하고 있음은「가짜 충정공묘비문」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④ 조양임씨의 영향도 컸으리라 짐작이 된다.
조양 임씨는 1742년 처음으로 족보를 발간하였는데 그 때는 시조가「조양군(兆陽君) 임세미(世味)」였다. 그런데 1803년 2차 수보 때 조양임씨가 평택임씨계에 실근원이 있다고 하면서 세미공을 충정공 언수의 자로 편입하였다. 이 사실은 선산임씨가 언수공의 7자라는「선산군 임의미」의 계하가 되는 구실로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 실제로 선림『병진보』는 팔급·양저 방주기록에 조양임씨족보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⑤ 조양임씨족보의 팔급방주 등이 순창임씨족보(1789·1804)와 유사한 점이많은데, 순창임씨 족보도 참조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3) 1900년대 초반의 시대상황과『병진보』발간 경위
『병진보』(1916)는 전보『신묘보』(1891)가 발간된 지 26년 만에 발간되었는데 이는 통상의 기간보다 빠른 편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1900년대 초반 즈음의 시대상황도 함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즉,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노비제도가 폐지되고, 1896년 새로운「호구조사규칙」이 공포되었으며, 1909년 새「민적법」이 시행되면서 호구조사나 호적등록시「본관」이 필수기재사항이 되어 족보편찬이 급격히 늘게 된다. 다른 한편 19세기 초 중반에는 동성출어일조(同姓出於一祖)라는 관념이 확산되기 시작, 조양관을 필두로 부안·예천관은 물론 심지어 진천관 까지도「임팔급」을 우리나라 임씨 시조로 하는 기류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시대환경의 변화에 따라 일부 평택임씨 종인들이 임언수공의 8미자설을 내세워 이른바 팔림설(八林設)을 제기 여러 임씨들의 참여를 부추긴 측면도 있다.이렇게 타관향 계보나 족보의 예, 시대상황을 종합하여 유추해 보면,
① 『병진보』가 근거로 내세우는「석천선생수기가승」즉「선산임씨세계단(世系單)」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명확치 않더라도-그러나 명백한 위보(僞譜)였다-1900년 대 초반 당시에는 이미 여러 임씨관향들이「임팔급」을 시조로대동계보를 이루자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있었음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② 「가짜 충정공묘비문」관련 인사들이나 참조한 족보(조양·순창·부안 등)의 연고지도 모두 호남지방이 그 기반으로, 이들 인사들과의 교류에서 선산임씨도 조양임씨와 마찬가지로 평택임씨에 실근원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확신으로 바뀌어 『병진보』편찬의 밑바탕 의식이 되었을 것으로 보는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4차수보 때까지 연면히 내려온『병술보』의 창보정신 내면의 깊은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일부종인들께서 개인의견을 앞세워 신성한 종사(宗 史)를 왜곡 파괴하고 만 것이『병진보』수보였다.
이러한 처사는, 엄중한 종사를 가벼이 여겨 임의적·독단적으로 중시조를 가공(架空)의 인물에 연접시켜 독자성을 훼손한 것이며, 더구나 우리의 시조 「임양저」공 마저 평택임씨 시조「임팔급」의 자로 계대(繼代)하고(평택보 상계는 별론으로 함) 근거 없는 상계를 설정하고 선림(善林)을 평택관으로 편입하여 선산임씨의 종사와 정체성을 훼손하고만 해종행위였다.
(4) 『병진보』상계의 허위성
『병진보』상계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 진정성을 인정할 수 없다.
① 선상임씨족보는 최초족보『병술보』에서 시조와 중시조를 확실한 근거 하에 명확히 밝혔으며, 시조의 근거가 되는 오리지널 설화를 간직하고 있었고, 그설화는 역사적 사실관계와도 부합한다.
② 시조 임양저공은 그 신분(중랑장·경순왕자 사위)상 신라의 엄격한 신분제인「골품제」에 비추어 결코 중국 도래인 임팔급의 자 또는 그 후예가 될 수없다.
③ 선산임씨가 선산의 호장종문이라는 사실은 시조의 신분이 합당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④ 역사기록상 경주에 고위직의 임씨가 존재하였다는 사실 즉, 강주(진주)태수이며 그 딸이 고려태조 왕건의 비가 된 임언(林彦)의 예는 선산임씨가 경주를 발원지로 하였음이 맞다는 간접증거가 된다.
⑤ 『병진보』의 상계 인물들은 임양저공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임씨와 관련이 없거나(임온), 실증 된 바가 없는 어쩌면 가공(架空)의 인물들이다. 특히 우리의 중시조만공의 부가 된다는 의미는 명백히 가공의 인물이다. -언수공의 자로 거명된 8미의 자중 선미(先味)는 순창관조 중연의 자이고 나머지 자미(自味)·의미(毅味)·계미(季味)는 모두 가공이다.
5. 6차『병신보』(1956) 상계의 특징과 출처 |
1956년 간행된 6차 족보『병신보』수보 도유사는 전보『병진보』와 같은 임영한씨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족보의 체계와 상계를 1924년의 『팽성임씨대동세보』를따르고 있다. 상계 계보는 다음과 같으며 방주까지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시조 임팔급·양저-무·희·면·득우·중조(中祖) 몽주·정·1세 언수」「언수의 자」는『팽성보』가 성미·견미·제미·세미·자미·의미의 6자만 등재하였는데,『병신보』는 선미(先味)·계미(季味)까지 포함하여 전보와 같이 여전히 8자를 고집하고 있다.
善林의 계보는 물론「언수-의미-만-진-간」으로 이어지고 있다.『팽성임씨대동세보』는 평택임씨 정통구보의 맥을 이으면서 1924년 범임씨대동보의 형태로 간행된 25권의 대형보첩이다. 지금은 평택임씨 각파에서 족보편수 때 전거로 삼고 있는 중요한 보첩이다. 그렇게 요란하게 소동을 일으키면서 간행한『병진보』상계를 버리고 새로이『팽성임씨대동세보』상계를 따르게 된 연유를 밝히는 어떠한 설명도 없다.
6. 7차『정사보』(1977) 상계의 특징과 출처 |
1977년 간행된 7차 족보『정사보』(도유사 임평준)는 1935년 간행된『임씨세가대동보』라는 보첩의 상계와 방주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또다시 족보의 체계와 상계를 바꾼 것이다.
『임씨세가대동보』는 그 계보도「가짜 충정공묘비문」에 근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방주의 내용도 많은 가공(架空)으로 윤색되어 있다. 특히 상계 방주는 거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보첩이다. 이 보첩편찬 주역의 한분이 임영한씨 였는데 결과적으로 임영한씨는 선산임씨족보 발간사에 오점을 남긴 3개보첩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하신 셈이다.
7. 『을해보』(1995) 발간과 상계의 혼란 수습 |
1916년 병진보, 1956년 병신보, 1977년 정사보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① 최초보~4차보에 대한 존경과 검토 배려는 결한 채, 줏대와 일관성조차 없었다.
② 어찌하여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리고 우리의 존숭받는 선조 석천 선생의계보를 조작하여 가짜 가승보를 만들었을까하는 의구심이며,
③ 평택임씨 계보에 연접할 의도로 가짜 가승보를 만들고, 이를 근거로 내세운 종중 지도자를 둔 우리는 한때나마 독립을 빼앗긴 나라꼴을 당한 셈이었는데, 거개의 종친들은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고,
④ 아직도 한국임씨는 한 종족(宗族)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종인이계시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 세족보는 선산임씨의 독자성과 연면한 종사를 왜곡하였으며 그 정체성을 훼손하고 말았다.그러나 다행히도 1995년『을해보』를 수보하면서 도유사 임태정(전국종친회장)·부유사 임종필씨 등에 의해 최초족보『병술보』의 창보정신으로 돌아가『병술보』의 원뜻대로 시조·중시조를 원상으로 복원하고, 병진보·병신보·정사보에서의 종사 혼란과 왜곡을 바로 잡고 수습하였음은 참으로 우리의 근원이신 조상이 도우신 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