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계보설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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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원

1. 서

 

『임씨상계보감』(전국임씨중앙회 2013)을 보면,「제4장 임씨 상계 계보에 관한 연구조사」편「결언」의 제3항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책150쪽)

 

“선산관은 여러 가지 구보자료에 의하면 충정공 아드님 의미(毅味)공으로부터 계대(系代)되어 왔으나 선산관종친회에서는 약 4백년 간 양저(良貯)공에 계대(繼代) 하고 있으므로 계속 연구해야할 과제...”

 

선산관 계보는 상계보감이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당초는 1766년 최초족 보(병술보) 때부터 시조를 임양저공으로 하고 영암 입향조 임만(蔓)공(고려 말 조선 초 인물)을 중시조 1세로 하는 독자적 상계를 기술하고 있었는데, 일제시기 어떻게 하여 평택관 충정공계 1세조 임언수공의 자라고 하는 의미공이 선산관의 관조이고 임만공의 부가 된다고 하는 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심 보첩이 1924년(갑자)의『팽성임씨대동세보』입니다. 이 보첩이 근거가 되어 최근 발간되는 평택임씨 파보들까지도 선산관을 평택관 파계로 등재 하는 등 선산임씨의 정체성에 흠이 되는 사례가 산견되고 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겠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당기간 선산관 의미계보설을 비롯 임씨상계 전반에 관하여 천착한 바가 있습니다. 그 결과 의미계보설이 포함된 언수공 계보와 관련한 몇 가지 사실에서 그 탐구가 미진하거나 잘못 알려진 내용이 있음을 알게 된 바, 이 글을 통하여 선산 관이 평택관의 파계가 아님을 확실히 하고, 족보 편찬시 등에서 유의해 주실것을 정중히 당부 드리면서 관련 사항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이 글은「임씨 회보」제22호(전국임씨중앙회 2019)에 게재된 필자의 기고문입니다.

 

2. 문제의 발단과 과오의 시정

 

선산임씨는 최초족보『병술보』(1766) 이후 4차『신묘보』(1891)까지 일관되 게「시조 임양저」「중시조 임만」으로 하는 상계 종사를 써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16년 5차『병진보』때 상계 계보를, 시조 임온·중시조 팔급 - 2세 양저~10세 언수-의미-만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후 1956년(병신), 1977년(정사) 수보 때는 또 일부가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자관의 계보를 바꾸게 된 연유에 대해 도유사 임영한씨는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근자에 강진 백양리 종인으로부터 석천(임억령)선생이 수기한 가승을 얻어보니, 시조 온이 쌍목으로 성을 얻었고 중조 팔급이 신라에 벼슬하여 이부상서 가 되고 그 후 계헌(임언수)공이 8남이 있어 각각 군에 봉해졌다. 8군중 선산 군 의미는 석천공의 8세조이다. 석천선생의 덕업과 문장은 백세의 소존(所尊) 이 됨에, 그 조계(祖系)의 소중에 어찌 착오가 있겠는가!”

 

도유사 임영한씨의 이 소론은

① 시조 임양저공과 창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전혀 없이 창보 정신을 무시하고 새로운 관조를 모시고 왔으며,

② 의미공에 대한 평택임씨 정통구보의 기술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③ 무엇보다「석천선생수기가승보」라는 것이 석천선생을 모독하고 선생의 계보를 조작한 위보임을 알면서도 이를 무시하였습니다.(석천 임억령선생은 대사간·강원관찰사 등을 역임한 고위 문반으로서, 3천수에 이르는 시를 쓰시고 호남의 사종으로 추앙받고 있는 뛰어난 문인입니다) 그런데 이 가승보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본바, 20세기 초 일부 평택임씨들사이에 나돌던 언수공의 8미자(八味子)설과 부안임씨·조양임씨 등 일부 관향 의 구보를 참조하여 독단적·자의적으로 만든 위보(僞譜)였습니다.

 

선산관의 평택관으로의 편입시도는, 구한말 노비제도 폐지(1892년 갑오개혁) 호구조사규칙의 제정 시행(1896)과 을사늑약 이후 1909년 새 민적법의 시행 으로 새로이 본관을 갖게 되는 계층이 폭증한 사회 저변의 환경변화와 일제시기「동성출어일조(同姓出於一祖)」라는 관념이 확산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종사(宗史)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시조를 바꾸는 참으로 조상을 욕되게 하는 망거(妄擧)였습니다. 다행히도 선산관은 1995년『을해보』를 수보하면서 상계를 최초보로 원상 복 원하여 이전의 과오를 시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3. 의미공이 등재된 구보 사례

 

의미공은 평택관 일부 파보에 언수공의 미(味)자 항렬 8남 중 7자로 나옵 니다.

필자가 본 구보로는 다음 보첩입니다.

① 1916년『평택임씨세보』(홍성 임정호)의 상계 계보 편에서 언수공의 자로성미·제미·견미·세미(조양군)·선미(두문동선생)·자미(시진군)·의미(일선군)·계미(평원군)를 해당 관향과 함께 쓰고 있습니다. 한편, 손록편에서는 성미·제미·견미 3자의 계보만 등재하고 있습니다.

② 1919년『평택임씨족보』(강릉군 임종식·현식)는 상계 계보편과 손록편 모두에서 위와 같은 8미자를 쓰고 있습니다.

 

4. 정통구보에서의 의미공에 대한 기술

 

평택관 충정공계 여러 족보에서 정통구보로 인용하고 있는, 구보에 나오는 의 미공에 대한 기술내용을 보겠습니다.

① 최초보인 1764년(갑신)『평택임씨족보』손록편에서는 언수공의 자로 성 미·제미·견미 3자와 그 계하를 등재하고 있습니다. 그런 한편, 상계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기문이 나옵니다.

 

“안(按)컨대, 여러 곳의 사보(私譜)에 판의서 기(木奇)의 자가 성미(聖味: 평택군)· 세미(世味: 조양군)·견미(見味 : 진천군)·의미(毅味 : 선산군)·인미(仁味: 나주군)· 자미(自味: 부안군)라 하는데, 우리 선조 충간공(성미)과 동항렬이다. 또한 영삼사공 (희) 아래에도 6미(味)가 있다 하면서 글자가 다른 의미(義味), 형미(亨味)가 있는데 그 증거의 기록이 없어 뒷날의 고(考)로 한다.”

 

② 1804(갑자)·1846(병오)·1897(정유)년『평택임씨족보』

뒤이어 나온 이들 족보에 등재된 언수공 계하는 최초보와 같은 성미·제미·견미 3자와 그 후손입니다. 그런데 앞 상계 편에 나오는 미(味)자 관련 부 기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 있습니다.

 

“조양임씨에 따르면, 학사공(팔급) 아래 미(味)자의 고조(高祖)가 있어 성미(聖味: 전법랑 평택군), 세미(世味: 연희부사 조양군)·견미(見味: 평찰사 진천군)·의미(毅 味: 선산군)·인미(仁味: 나주군)·자미(自味: 부안군)라 하나, 계서(系緖)와 소목(昭 穆)을 어찌 고증하여 그렇다 할까?

부안임씨가 말하길, 계서와 실제가 동떨어지면 천륜지서(天倫之序)가 도착(倒錯)됨이라 하는데, 그보다 더 무엇이 중대사란 말인가? 계서(繼緖)의 실제를 잃게 되면 무 보(無譜)만 못한지라 고쳐야 할 것이다. 이는 임시의 것으로 하고 뒷날의 고(考)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5. 1924년의『팽성임씨대동세보」와 의미공

 

평택관을 중심으로 유수의 임씨 관향이 망라된 최초의 임씨대동보가 1924년 (갑자) 간행된『팽성임씨대동세보』일 것입니다.(총25권)

이 보첩은 19세기 이전까지의 평택관 구보를 계승하면서 전객령공계와 충정공계의 계보를 정립하고 계미(季美)공계도 함께 계보화 하였다는데 그 의의가 있는 임씨 상계계보 연구의 중요한 보첩으로 생각됩니다. 평택관 계보를 보면, 세춘공과 언수공을 각 1세로 계대하고 있는데, 언수공의경우 미(味)자 항렬 자(子)를 6자로 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①구보에서 차자로 등재되어 있던 제미공을 3자로 하고 ②세미공(조양군)을 등재하면서 4자로 하고 ③자미공(시진군)과 의미공(선산군·진천 군)을 각각 5자·6자로 하여 등재한 것입니다. 아울러 구보에서의 미(味)자 설은 삭제하여 공식 폐기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양관·선산관이 처음으로 파계로 등재되었는데 이는 해당관이 스스로 자관 계보를 언수공 계하로 계대하였음에 그 연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반면 구보 부기문에서의 자미(自味)는 부안군이었는데 시진군으로 하여 자로 계대하였음은 아마도 1916년보(홍성)나 1919년보(강릉)의 설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미공의 후계에는 손록을 쓰지 않음)

 

6. 언수공 8미자(八味子)의 등장과 『임씨세가대동보』

 

임씨 상계 종사에 현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보첩이 1927(정 묘)년 및 1934(갑술)~1935년 각각 발간된 『임씨세가대동보』일 것입니다. 1924년 팽성대동세보를 통하여 정리된 언수공의 자 문제가 8미자로 다시 등장하고, 상계 또한 정통 구보와는 다른 계보가 나오고, 종래 개별 나열되었던 상계조를 부자관계로 계대(繼代)하기까지 합니다.

이 보첩은 처음 1927(정묘)년에 평택관 충간공(성미)파 임노철씨 등이 주동이 되고 예천(영수)·조양(병욱)관이 합세하여 비문·행장류를 취합한 단권의 책자를『임씨세가대동보』라는 보명으로 발간합니다. 이 보첩 발간의 주목적은 임노철씨 등이 성주 선남면 신부동에서 발굴하였다 는 충정공 묘지석의 비문을 실어 반포함에 있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묘비문은 가짜였습니다.

 

그 사연이 1924년의 팽성대동세보 언수공 손록방주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정사년(1917) 부정배(不正輩)가 있어 성주군 선남면 신부동 후록에서 대를 잡아 강신굿을 하고 그곳을 파 보았더니 지석(誌石)이 나왔다 운운 하는데, 이는 그 양식이 모두 문법(文法)에 맞지 않고 이치와 전말이 간상(好狀)만 현로(現露)한 것이다.

각처 후손은 그 사위(邪僞)를 배척하여 뒷날의 폐해를 막아야 할 것이다.”

 

이 방주 기록과 1927년 보첩서문을 대조하여 보면 바로 이 가짜 묘지석이 보첩의「충정공묘비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종중의 경고를 무시하고 보첩으로까지 발간 배포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1934(갑술)~1935년에는 21책의 대형보첩을 같은 보명으로 발간 합니다. 발간의 주역들은 1927년보 발간 때의 주역들 외 장흥(영기)·선산(영한)관이 가세합니다.

 

충정공묘비문이 가짜임은 그 내용상의 허점 외에도 1927년보와 1935년보의비문이 서로 다름에서도 단번에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가짜 묘비문과 이를 근거로 한 손록의 언수공 자를 보면, 성미(충간공) · 제미(관산군) · 견미(평원군) · 세미(조양군) · 선미(先味 두문동선생) · 자미(은 진군) · 의미(선산군) · 계미(季味 평원보안군)의 여덟 분입니다.

이 8미자는 앞에서 본 1916년(홍성)·1919년(강릉) 파보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중 선미는 순창관 중연공의 자이고 季味는 季美가 맞습니다. 따라서 저절로 8자가 성립하지도 않으며 거짓임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가짜 충정공묘비문이『임씨상계보감』(전국임씨중앙회간행)에 전재되어 있어 평 택관 일부 파보에서는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나아가 이 보첩의 방주를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가공(架空) 윤색의 요소가 눈에 띄어 그 신빙성이 매우 의문시되는 보첩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일부 종인들께서는 그 실상을 미처 알지 못하고 이 보첩을 신뢰하는 실정이라 마음 한구석 안타까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7. 의미공의 진실과 선산관의 정체성

 

선산관『병진보』(1916)와 평택관『갑자보』(1924)에 나오는「선산군·진천 군 의미」는 가공의 인물입니다. 평택관 정통구보 부기문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아무런 증거가 없어 설로써 끝난 사안입니다. 선산관은, 신라 경순왕 때의 충신이요 왕의 손녀사위·중랑장 임양저공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그 근거가 되는 설화기사도 최초 족보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 설화는 득관 사유도 포함하고 있는 오리지널로서 역사적 사실관계와도 부합합니다.

 

이 점에서, 그 진정성이 의심되는 평택보의 양저공 설화 기사와는 구별됩니다.임양저공은 그 신분과 벼슬에 비추어 신라의 골품제라는 신분제도상 중국도래인 임팔급공의 후예가 될 수 없음 또한 선산관의 독자성과 정체성이 드러나 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시조 임양저공에 관하여는「임씨회보」제19호 2016년 필자 기고문 참조)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선산임씨는 그 관조가 임의미공이 될 수 없는 관향입니다.

 

8. 「충정공묘비문」의 진실

 

위와 같이 우리 선산임씨가 평택임씨의 계열파계가 될 수 없음이 진실임에도 평택임씨 ‘임언수공의 5남 임의미’가 우리의 관조가 된다는 의미계보설이 계속 주장되고 있으며, 그 핵심근거로 내세우는 증빙이 전술한 『임씨세가대동보』라는 보첩에 실려 있는 「충정공묘비문」이라하고 있습니다. (이 글 뒤에 첨부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1934(갑술년)~1935년 2차로 간행된 『임씨세가대동보』에 실린「충정공묘비문」의 한글번역비문입니다, 이에, 이 주장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부연하여 밝혀드리고자 합니다.

 

1) 먼저 「충정공」은 평택임씨의 양대파계 중 하나인 충정공계(다른 파계는 전객령공계) 1세조 임언수공으로, 고려말 공민왕·우왕대에 득세한 임성미(삼사우사·충간공), 임견미(영삼사사·평원부원군), 임제미(개성판윤)의 3자를 둔 분으로서 사후 평성부원군으로 피봉되고 충정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입니다.

 

2) 평택임씨 충정공계족보에는 언수공의 자로 위 3자만 등재되어 내려오다 1924년(갑자) 『팽성임씨대동세보』를 만들면서 이 3자 외에 4자 세미(조양군·조양임씨관조), 5자 자미(시진군), 6자 의미(선산군·진천군)의 3자를 추가하고, 조양임씨와 선산임씨의 계보손록도 함께 등재하게 됩니다.(자미계열은 등재치 않음)이렇게 조양임씨와 선산임씨가 합보형식까지 취하면서 평택임씨의 파계가 된 연유는 조양임씨의 경우 이미 1803년 족보에서 관조 임세미공을 임언수의 3자로 계대하여 평택관에 스스로 계대한 바 있으며, 선산임씨 또한 1916년(병진)족보에서 선산임씨 중시조 임만공이 임언수의 7자 임의미의 자가 된다고 하면서 평택관에 스스로 계대함에 따른 것입니다.

 

3) 충정공 임언수의 묘소는 그 소재지가 불명하다고 평택임씨족보가 밝히고 있는데도, 『임씨세가대동보』편찬 종인들이 임의로 “성산 지금의 성주 교하 지금의 선남면 고양라 지금의 신부동”에 공과 두 부인의 묘가 있다고 하면서 여기서 이 비문이 새겨진 묘지석을 발굴했다 하고 있습니다.

 

4) 이 글에 첨부한 비문대조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27년(정묘년) 및 1934년(갑술년)~1935년 간행 대동보첩의 비문내용이 완연히 다릅니다.대를 잡고 굿을 하기까지하여 찾아냈다는 묘비문이 어찌 1927년 보책과 1935년 보책의 것이 다를 수 있을까요?

 

5) 비문의 형식과 내용을 보더라도 우리가 익히 보아온 여느 묘비문의 형식과 내용과는 사뭇다릅니다. 그래서 평택임씨족보(1924년보)도 언수공 방주에서 “그 양식이 문법에 가깝지 않고, 그 이치와 전말이 간상(奸狀)만 현로(現露)하였다. 고로 각 처 후손은 그 사위(邪僞)를 배척할 것이로다.”라고 종문에 경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6) 바로 핵심문제는 첨부한 「충정공묘비문」번역문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① 비문 하단부에 기술하고 있는 아들들의 내용을 보면, “아들 다섯분을 두셨는데, 큰 아들은 좌찬성이신 충간공 성미이고, 둘째아들은 평원부원군이신 견미이고, 셋째아들은 관산군이신 제미이고. 넷째아들은 이부상서좌복야조양군 세미이고, 다섯째아들은 선산군이고 시호가 문정공인 의미이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역문에는 세 아들이 빠져있습니다.(원비문 참조) 즉, 5자 선미·6자 자미·8자 계미가 빠졌습니다. 그 이유인즉 5자 선미는 순창임씨 관조 중연의 자로서 순창관의 강력한 항의가 있었고, 6자 자미는 은진군으로 되어 있으나 은진임씨측에서 인정치 않았으며, 8자 계미(季味)는 季美를 잘못알고 있는 것으로 항의성 지적을 받은 터라 번역문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의미계보설 주장자는 이러한 내막은 물론 1924년 평택임씨족보(갑자보)에서 선산임씨 손록이 등재되어 있는줄 또한 모르고 “충정공 5남” 선산군 의미공이 “평택임씨족보책에 선산군 의미공으로 나홀로 외롭게 1인만 등재되어 후손없이 붕떠 있습니다.”라고 하기까지 합니다.의미의 언수공 자 서열이 족보에는 6자 비문에는 7자로 나오는 줄 또한 모르고 번역문에 따라 ‘충정공 5남’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② 결정적 미스는 번역비문 맨 하단의 비문일자 표기에 있습니다. 즉 하단의 “정묘년(1387년) 고선(음력3월) 등본(사본) 인간(인쇄)” 문구에서 정묘년의 서기년도를 비문번역자가 엉뚱하게 착각하여 글쓴이로 되어 있는 세미공의 생졸년대(고려말)에 해당하는 정묘년을 찾아 1387년이라 번역한 것입니다.이 정묘년은 비문이 실린 『임씨세가대동보』 초간본이 인쇄 간행(印刊)된 1927년 정묘년을 말하는 년도인데도 비문번역자가 이를 착각한 것입니다. 즉, 이 묘비문은 1387년 정묘년(강어단알) 음력3월(고선절)에 언수공의 자 세미공이 쓴 글이 아닙니다. 비문내용 또한 거의 조작된 글입니다.

 

◎ 충정공 묘비문(忠貞公 墓碑文)

 

공(公)의 성(姓)은 임씨(林氏)요 이름은 언수(彦脩), 자(字)는 국경(國擎), 호(號)는 계헌(桂軒)이며 관향(貫鄕)이 평택(平澤)이다.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 갑오(1294)년 출생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307) 사마문과시(司馬文科試)에 합격하여 관직이 금은자광록대부(金銀紫光祿大夫) 대광영찬성문하시중평장사(大匡領贊成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다.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封)하고 시호(諡號)는 충정공(忠貞公)이다.

명(明) 홍무(洪武) 17년(1384) 고려 폐왕(廢王) 신우(辛禑) 갑자(甲子, 1384)년에 돌아가셨다. 향년(享年) 91세였다.

태당(太唐) 연당(蓮堂) 학사공(學士公) 온공(蘊公)을 시조(始祖)로 하여 여러 대(代)를 이어왔는데 팽성(彭城) 한림학사(翰林學士)이고 시호(諡號)가 충절공(忠節公)인 팔급공(八及公)이 그의 11대조(代祖)이시다.

충절공(忠節公)은 큰아들 태사상장군(太師上將軍)이시고 시호가 충무공(忠武公)이신 양저를 낳으시고,

충무공(忠武公)은 상장군(上將軍)이시고 시호가 충렬공(忠烈公)이신 무(碔)를 낳으시고,

충렬공(忠烈公)은 영삼사(領三司) 평성백(平城伯)이시고 시호(諡號)가 충숙공(忠肅公)이신 희(禧)를 낳으시고,

충숙공(忠肅公)은 평장사(平章事)이신 면(冕)을 낳으시고,

평장사공(平章事公)은 시금위(侍禁衛)이신 득우(得雨)를 낳으시고,

시금위공(侍禁衛公)은 평찰품사(評察稟事)이신 몽주(夢周)를 낳으시고,

평찰품사공(評察稟事公)은 통학권장(統學勸長)이신 희윤(喜胤)을 낳으시고,

권장공(勸長公)은 평장사(平章事)이신 연(璉)을 낳으시고,

평장사공(平章事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신 정(禎)을 낳으시고,

시중랑공(侍中郞公)은 좌찬성(左贊成)이신 완(玩)을 낳으시니 언수공(彦脩公)의 아버지이시다.

어머니는 이조전서(吏曹典書)이신 광산(光山) 김황(金煌)의 따님이시다.

부인(夫人)은 정경부인(貞敬夫人) 김포 공씨(金浦) 공씨(公氏)인데 문하평리사(門下評理事)이신 공한기(公閑奇, 舊譜에는 永純)의 따님이시다.

계부인(繼夫人)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여산(礪山) 송씨(宋氏)인데 평장사(平章事)이신 송심(宋深)의 따님이시다.

성산(星山) 지금의 성주성(星州城) 동쪽 교하(交河), 지금의 선남면(船南面) 고양리(古襄里) 지금의 신부동(新扶洞)에 경좌(庚坐)(近西)로 세 분의 묘(墓)가 있다.

아들 다섯 분을 두셨는데 큰아들은 좌찬성(左贊成)이신 충간공(忠簡公) 성미(成味)이고, 둘째 아들은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이신 견미(堅味)이고, 셋째 아들은 관산군(冠山君)이신 제미(齊味)이고, 넷째 아들은 이부상서(吏部尙書) 좌복야(左僕射)인 조양군(兆陽君) 세미(世味)이고, 다섯 째 아들은 선산군(善山君)이고 시호(諡號)가 문정공(文靖公)인 의미(毅味)이시다.

아들 세미(世味)가 삼가 기록(記錄)합니다. 지석문과 비문이 서로 부합되기 때문에 따로따로 글을 짓지 아니한다.

정묘년(丁卯年, 1387년) 고선(姑洗, 음력 3월) 등본(謄本)(사본寫本) 인간(印刊)(인쇄印刷)

 

1927년(정묘년)

1934(갑술년)~1935년보

◎ 彦脩-字 國擎, 號 桂軒

景定 甲子生

   ※ 景定(경정)-남송(南宋)의 연호

      甲子生은 1264년생

彦脩-좌동

元統 16년 忠烈 甲午生

※ 元統(원통)-원 순제 때의 연호. 16년은 없다.

   충렬 갑오생은 1294년생.

壬午司馬 甲申文科

三重大匡 太尉 吏部尙書

左僕射 平城府院君 諡 忠貞

丁未 司馬文科

金銀紫光祿大夫 大匡

領贊成 門下侍中平章事

平城府院君 諡 忠貞公

至正 甲午卒 享年91

※ 至正(지정)-원 순제 때 연호

   甲午卒-향년 91로 하면 1354년졸

明洪武 17年 辛禑 甲子卒 91

※ 洪武(홍무)-明 태조 연호

   17년은 1384년 甲子(1384)이다. 향년 91

 

蘊-大唐 蓮堂學士 시조

       屢傳八及

八及-皇朝 翰林學士 彭城侯

  諡 忠節 其遠祖 屢傳至良貯

八及-翰林學士 彭城侯

    諡 忠節공 언수공 11세조

良貯-太子太師 上將軍

  諡 忠武 언수공의 10세조

良貯-太子太師 上將軍

   諡 忠武

자 碔-상장군 시 충렬공

자 碔-좌동(左同)

자 禧-領三司 平城伯 諡 忠肅

자 禧-좌동(左同)

자 冕-平章事

자 冕-좌동(左同)

자 得雨-侍禁衛

자 得雨-좌동(左同)

자 夢周-評察禀事

자 夢周-좌동(左同)

자 喜胤-統學勸長

자 喜胤-좌동(左同)

자 璉-平章事

자 璉-좌동(左同)

자 楨-門下侍中

자 楨-좌동(左同)

자 玩-左贊成 公의 考(父)

자 玩-좌동(左同)

 妣-光山金煌女

妣-光山金煌女

配金浦公氏 閑奇女(舊譜 永純)

좌동(左同)

配 礪山宋氏 深女

좌동(左同)

星山 今 星州域東 交河 今 航南面

  古襄里 今 新扶洞 庚坐 三位祔

좌동(左同)

生八男

生八男

長子 成味-文 左贊成 忠簡公

長子 成味-左同

二子 齊味-開城判尹

二子 齊味-冠山君

三子 堅味-文 平章事 平院君

三子 堅味-左同

四子 世味-吏部尙書 左僕射 兆陽君

四子 世味-左同

五子 先味-南平章事 杜門洞先生

五子 先味-左同

六子 自味-文禮部尙書 恩津君

六子 自味-左同

七子 毅味-南上護軍 一善君

七子 毅味-善山君 諡文靖公

八子 季味-文平章事 平原保安君

八子 季味-左同

子 世味 謹誌

子 世味 謹識

歲 彊圉單閼 姑洗節 謄本印刊 誌石文與碑文互相符合故不爲 各章印刊焉

誌石文與碑文互相符合故不爲 各章 歲 彊圉單閼姑洗節謄本印刊焉

 

※ 强圉(강어)-丁, 單閼(단알)-卯 즉 「丁卯년」(『임씨세가대동보』가 인간(印刊)되는 1927년) 姑洗節(고선절)-음3월

-임용원

1. 서

 

『임씨상계보감』(전국임씨중앙회 2013)을 보면,「제4장 임씨 상계 계보에 관한 연구조사」편「결언」의 제3항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책150쪽)

 

“선산관은 여러 가지 구보자료에 의하면 충정공 아드님 의미(毅味)공으로부터 계대(系代)되어 왔으나 선산관종친회에서는 약 4백년 간 양저(良貯)공에 계대(繼代) 하고 있으므로 계속 연구해야할 과제...”

 

선산관 계보는 상계보감이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당초는 1766년 최초족 보(병술보) 때부터 시조를 임양저공으로 하고 영암 입향조 임만(蔓)공(고려 말 조선 초 인물)을 중시조 1세로 하는 독자적 상계를 기술하고 있었는데, 일제시기 어떻게 하여 평택관 충정공계 1세조 임언수공의 자라고 하는 의미공이 선산관의 관조이고 임만공의 부가 된다고 하는 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심 보첩이 1924년(갑자)의『팽성임씨대동세보』입니다. 이 보첩이 근거가 되어 최근 발간되는 평택임씨 파보들까지도 선산관을 평택관 파계로 등재 하는 등 선산임씨의 정체성에 흠이 되는 사례가 산견되고 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겠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당기간 선산관 의미계보설을 비롯 임씨상계 전반에 관하여 천착한 바가 있습니다. 그 결과 의미계보설이 포함된 언수공 계보와 관련한 몇 가지 사실에서 그 탐구가 미진하거나 잘못 알려진 내용이 있음을 알게 된 바, 이 글을 통하여 선산 관이 평택관의 파계가 아님을 확실히 하고, 족보 편찬시 등에서 유의해 주실것을 정중히 당부 드리면서 관련 사항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이 글은「임씨 회보」제22호(전국임씨중앙회 2019)에 게재된 필자의 기고문입니다.

 

2. 문제의 발단과 과오의 시정

 

선산임씨는 최초족보『병술보』(1766) 이후 4차『신묘보』(1891)까지 일관되 게「시조 임양저」「중시조 임만」으로 하는 상계 종사를 써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16년 5차『병진보』때 상계 계보를, 시조 임온·중시조 팔급 - 2세 양저~10세 언수-의미-만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후 1956년(병신), 1977년(정사) 수보 때는 또 일부가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자관의 계보를 바꾸게 된 연유에 대해 도유사 임영한씨는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근자에 강진 백양리 종인으로부터 석천(임억령)선생이 수기한 가승을 얻어보니, 시조 온이 쌍목으로 성을 얻었고 중조 팔급이 신라에 벼슬하여 이부상서 가 되고 그 후 계헌(임언수)공이 8남이 있어 각각 군에 봉해졌다. 8군중 선산 군 의미는 석천공의 8세조이다. 석천선생의 덕업과 문장은 백세의 소존(所尊) 이 됨에, 그 조계(祖系)의 소중에 어찌 착오가 있겠는가!”

 

도유사 임영한씨의 이 소론은

① 시조 임양저공과 창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전혀 없이 창보 정신을 무시하고 새로운 관조를 모시고 왔으며,

② 의미공에 대한 평택임씨 정통구보의 기술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③ 무엇보다「석천선생수기가승보」라는 것이 석천선생을 모독하고 선생의 계보를 조작한 위보임을 알면서도 이를 무시하였습니다.(석천 임억령선생은 대사간·강원관찰사 등을 역임한 고위 문반으로서, 3천수에 이르는 시를 쓰시고 호남의 사종으로 추앙받고 있는 뛰어난 문인입니다) 그런데 이 가승보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본바, 20세기 초 일부 평택임씨들사이에 나돌던 언수공의 8미자(八味子)설과 부안임씨·조양임씨 등 일부 관향 의 구보를 참조하여 독단적·자의적으로 만든 위보(僞譜)였습니다.

 

선산관의 평택관으로의 편입시도는, 구한말 노비제도 폐지(1892년 갑오개혁) 호구조사규칙의 제정 시행(1896)과 을사늑약 이후 1909년 새 민적법의 시행 으로 새로이 본관을 갖게 되는 계층이 폭증한 사회 저변의 환경변화와 일제시기「동성출어일조(同姓出於一祖)」라는 관념이 확산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종사(宗史)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시조를 바꾸는 참으로 조상을 욕되게 하는 망거(妄擧)였습니다. 다행히도 선산관은 1995년『을해보』를 수보하면서 상계를 최초보로 원상 복 원하여 이전의 과오를 시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3. 의미공이 등재된 구보 사례

 

의미공은 평택관 일부 파보에 언수공의 미(味)자 항렬 8남 중 7자로 나옵 니다.

필자가 본 구보로는 다음 보첩입니다.

① 1916년『평택임씨세보』(홍성 임정호)의 상계 계보 편에서 언수공의 자로성미·제미·견미·세미(조양군)·선미(두문동선생)·자미(시진군)·의미(일선군)·계미(평원군)를 해당 관향과 함께 쓰고 있습니다. 한편, 손록편에서는 성미·제미·견미 3자의 계보만 등재하고 있습니다.

② 1919년『평택임씨족보』(강릉군 임종식·현식)는 상계 계보편과 손록편 모두에서 위와 같은 8미자를 쓰고 있습니다.

 

4. 정통구보에서의 의미공에 대한 기술

 

평택관 충정공계 여러 족보에서 정통구보로 인용하고 있는, 구보에 나오는 의 미공에 대한 기술내용을 보겠습니다.

① 최초보인 1764년(갑신)『평택임씨족보』손록편에서는 언수공의 자로 성 미·제미·견미 3자와 그 계하를 등재하고 있습니다. 그런 한편, 상계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기문이 나옵니다.

 

“안(按)컨대, 여러 곳의 사보(私譜)에 판의서 기(木奇)의 자가 성미(聖味: 평택군)· 세미(世味: 조양군)·견미(見味 : 진천군)·의미(毅味 : 선산군)·인미(仁味: 나주군)· 자미(自味: 부안군)라 하는데, 우리 선조 충간공(성미)과 동항렬이다. 또한 영삼사공 (희) 아래에도 6미(味)가 있다 하면서 글자가 다른 의미(義味), 형미(亨味)가 있는데 그 증거의 기록이 없어 뒷날의 고(考)로 한다.”

 

② 1804(갑자)·1846(병오)·1897(정유)년『평택임씨족보』

뒤이어 나온 이들 족보에 등재된 언수공 계하는 최초보와 같은 성미·제미·견미 3자와 그 후손입니다. 그런데 앞 상계 편에 나오는 미(味)자 관련 부 기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 있습니다.

 

“조양임씨에 따르면, 학사공(팔급) 아래 미(味)자의 고조(高祖)가 있어 성미(聖味: 전법랑 평택군), 세미(世味: 연희부사 조양군)·견미(見味: 평찰사 진천군)·의미(毅 味: 선산군)·인미(仁味: 나주군)·자미(自味: 부안군)라 하나, 계서(系緖)와 소목(昭 穆)을 어찌 고증하여 그렇다 할까?

부안임씨가 말하길, 계서와 실제가 동떨어지면 천륜지서(天倫之序)가 도착(倒錯)됨이라 하는데, 그보다 더 무엇이 중대사란 말인가? 계서(繼緖)의 실제를 잃게 되면 무 보(無譜)만 못한지라 고쳐야 할 것이다. 이는 임시의 것으로 하고 뒷날의 고(考)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5. 1924년의『팽성임씨대동세보」와 의미공

 

평택관을 중심으로 유수의 임씨 관향이 망라된 최초의 임씨대동보가 1924년 (갑자) 간행된『팽성임씨대동세보』일 것입니다.(총25권)

이 보첩은 19세기 이전까지의 평택관 구보를 계승하면서 전객령공계와 충정공계의 계보를 정립하고 계미(季美)공계도 함께 계보화 하였다는데 그 의의가 있는 임씨 상계계보 연구의 중요한 보첩으로 생각됩니다. 평택관 계보를 보면, 세춘공과 언수공을 각 1세로 계대하고 있는데, 언수공의경우 미(味)자 항렬 자(子)를 6자로 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①구보에서 차자로 등재되어 있던 제미공을 3자로 하고 ②세미공(조양군)을 등재하면서 4자로 하고 ③자미공(시진군)과 의미공(선산군·진천 군)을 각각 5자·6자로 하여 등재한 것입니다. 아울러 구보에서의 미(味)자 설은 삭제하여 공식 폐기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양관·선산관이 처음으로 파계로 등재되었는데 이는 해당관이 스스로 자관 계보를 언수공 계하로 계대하였음에 그 연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반면 구보 부기문에서의 자미(自味)는 부안군이었는데 시진군으로 하여 자로 계대하였음은 아마도 1916년보(홍성)나 1919년보(강릉)의 설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미공의 후계에는 손록을 쓰지 않음)

 

6. 언수공 8미자(八味子)의 등장과 『임씨세가대동보』

 

임씨 상계 종사에 현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보첩이 1927(정 묘)년 및 1934(갑술)~1935년 각각 발간된 『임씨세가대동보』일 것입니다. 1924년 팽성대동세보를 통하여 정리된 언수공의 자 문제가 8미자로 다시 등장하고, 상계 또한 정통 구보와는 다른 계보가 나오고, 종래 개별 나열되었던 상계조를 부자관계로 계대(繼代)하기까지 합니다.

이 보첩은 처음 1927(정묘)년에 평택관 충간공(성미)파 임노철씨 등이 주동이 되고 예천(영수)·조양(병욱)관이 합세하여 비문·행장류를 취합한 단권의 책자를『임씨세가대동보』라는 보명으로 발간합니다. 이 보첩 발간의 주목적은 임노철씨 등이 성주 선남면 신부동에서 발굴하였다 는 충정공 묘지석의 비문을 실어 반포함에 있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묘비문은 가짜였습니다.

 

그 사연이 1924년의 팽성대동세보 언수공 손록방주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정사년(1917) 부정배(不正輩)가 있어 성주군 선남면 신부동 후록에서 대를 잡아 강신굿을 하고 그곳을 파 보았더니 지석(誌石)이 나왔다 운운 하는데, 이는 그 양식이 모두 문법(文法)에 맞지 않고 이치와 전말이 간상(好狀)만 현로(現露)한 것이다.

각처 후손은 그 사위(邪僞)를 배척하여 뒷날의 폐해를 막아야 할 것이다.”

 

이 방주 기록과 1927년 보첩서문을 대조하여 보면 바로 이 가짜 묘지석이 보첩의「충정공묘비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종중의 경고를 무시하고 보첩으로까지 발간 배포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1934(갑술)~1935년에는 21책의 대형보첩을 같은 보명으로 발간 합니다. 발간의 주역들은 1927년보 발간 때의 주역들 외 장흥(영기)·선산(영한)관이 가세합니다.

 

충정공묘비문이 가짜임은 그 내용상의 허점 외에도 1927년보와 1935년보의비문이 서로 다름에서도 단번에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가짜 묘비문과 이를 근거로 한 손록의 언수공 자를 보면, 성미(충간공) · 제미(관산군) · 견미(평원군) · 세미(조양군) · 선미(先味 두문동선생) · 자미(은 진군) · 의미(선산군) · 계미(季味 평원보안군)의 여덟 분입니다.

이 8미자는 앞에서 본 1916년(홍성)·1919년(강릉) 파보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중 선미는 순창관 중연공의 자이고 季味는 季美가 맞습니다. 따라서 저절로 8자가 성립하지도 않으며 거짓임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가짜 충정공묘비문이『임씨상계보감』(전국임씨중앙회간행)에 전재되어 있어 평 택관 일부 파보에서는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나아가 이 보첩의 방주를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가공(架空) 윤색의 요소가 눈에 띄어 그 신빙성이 매우 의문시되는 보첩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일부 종인들께서는 그 실상을 미처 알지 못하고 이 보첩을 신뢰하는 실정이라 마음 한구석 안타까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7. 의미공의 진실과 선산관의 정체성

 

선산관『병진보』(1916)와 평택관『갑자보』(1924)에 나오는「선산군·진천 군 의미」는 가공의 인물입니다. 평택관 정통구보 부기문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아무런 증거가 없어 설로써 끝난 사안입니다. 선산관은, 신라 경순왕 때의 충신이요 왕의 손녀사위·중랑장 임양저공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그 근거가 되는 설화기사도 최초 족보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 설화는 득관 사유도 포함하고 있는 오리지널로서 역사적 사실관계와도 부합합니다.

 

이 점에서, 그 진정성이 의심되는 평택보의 양저공 설화 기사와는 구별됩니다.임양저공은 그 신분과 벼슬에 비추어 신라의 골품제라는 신분제도상 중국도래인 임팔급공의 후예가 될 수 없음 또한 선산관의 독자성과 정체성이 드러나 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시조 임양저공에 관하여는「임씨회보」제19호 2016년 필자 기고문 참조)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선산임씨는 그 관조가 임의미공이 될 수 없는 관향입니다.

 

8. 「충정공묘비문」의 진실

 

위와 같이 우리 선산임씨가 평택임씨의 계열파계가 될 수 없음이 진실임에도 평택임씨 ‘임언수공의 5남 임의미’가 우리의 관조가 된다는 의미계보설이 계속 주장되고 있으며, 그 핵심근거로 내세우는 증빙이 전술한 『임씨세가대동보』라는 보첩에 실려 있는 「충정공묘비문」이라하고 있습니다. (이 글 뒤에 첨부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1934(갑술년)~1935년 2차로 간행된 『임씨세가대동보』에 실린「충정공묘비문」의 한글번역비문입니다, 이에, 이 주장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부연하여 밝혀드리고자 합니다.

 

1) 먼저 「충정공」은 평택임씨의 양대파계 중 하나인 충정공계(다른 파계는 전객령공계) 1세조 임언수공으로, 고려말 공민왕·우왕대에 득세한 임성미(삼사우사·충간공), 임견미(영삼사사·평원부원군), 임제미(개성판윤)의 3자를 둔 분으로서 사후 평성부원군으로 피봉되고 충정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입니다.

 

2) 평택임씨 충정공계족보에는 언수공의 자로 위 3자만 등재되어 내려오다 1924년(갑자) 『팽성임씨대동세보』를 만들면서 이 3자 외에 4자 세미(조양군·조양임씨관조), 5자 자미(시진군), 6자 의미(선산군·진천군)의 3자를 추가하고, 조양임씨와 선산임씨의 계보손록도 함께 등재하게 됩니다.(자미계열은 등재치 않음)이렇게 조양임씨와 선산임씨가 합보형식까지 취하면서 평택임씨의 파계가 된 연유는 조양임씨의 경우 이미 1803년 족보에서 관조 임세미공을 임언수의 3자로 계대하여 평택관에 스스로 계대한 바 있으며, 선산임씨 또한 1916년(병진)족보에서 선산임씨 중시조 임만공이 임언수의 7자 임의미의 자가 된다고 하면서 평택관에 스스로 계대함에 따른 것입니다.

 

3) 충정공 임언수의 묘소는 그 소재지가 불명하다고 평택임씨족보가 밝히고 있는데도, 『임씨세가대동보』편찬 종인들이 임의로 “성산 지금의 성주 교하 지금의 선남면 고양라 지금의 신부동”에 공과 두 부인의 묘가 있다고 하면서 여기서 이 비문이 새겨진 묘지석을 발굴했다 하고 있습니다.

 

4) 이 글에 첨부한 비문대조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27년(정묘년) 및 1934년(갑술년)~1935년 간행 대동보첩의 비문내용이 완연히 다릅니다.대를 잡고 굿을 하기까지하여 찾아냈다는 묘비문이 어찌 1927년 보책과 1935년 보책의 것이 다를 수 있을까요?

 

5) 비문의 형식과 내용을 보더라도 우리가 익히 보아온 여느 묘비문의 형식과 내용과는 사뭇다릅니다. 그래서 평택임씨족보(1924년보)도 언수공 방주에서 “그 양식이 문법에 가깝지 않고, 그 이치와 전말이 간상(奸狀)만 현로(現露)하였다. 고로 각 처 후손은 그 사위(邪僞)를 배척할 것이로다.”라고 종문에 경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6) 바로 핵심문제는 첨부한 「충정공묘비문」번역문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① 비문 하단부에 기술하고 있는 아들들의 내용을 보면, “아들 다섯분을 두셨는데, 큰 아들은 좌찬성이신 충간공 성미이고, 둘째아들은 평원부원군이신 견미이고, 셋째아들은 관산군이신 제미이고. 넷째아들은 이부상서좌복야조양군 세미이고, 다섯째아들은 선산군이고 시호가 문정공인 의미이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역문에는 세 아들이 빠져있습니다.(원비문 참조) 즉, 5자 선미·6자 자미·8자 계미가 빠졌습니다. 그 이유인즉 5자 선미는 순창임씨 관조 중연의 자로서 순창관의 강력한 항의가 있었고, 6자 자미는 은진군으로 되어 있으나 은진임씨측에서 인정치 않았으며, 8자 계미(季味)는 季美를 잘못알고 있는 것으로 항의성 지적을 받은 터라 번역문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의미계보설 주장자는 이러한 내막은 물론 1924년 평택임씨족보(갑자보)에서 선산임씨 손록이 등재되어 있는줄 또한 모르고 “충정공 5남” 선산군 의미공이 “평택임씨족보책에 선산군 의미공으로 나홀로 외롭게 1인만 등재되어 후손없이 붕떠 있습니다.”라고 하기까지 합니다.의미의 언수공 자 서열이 족보에는 6자 비문에는 7자로 나오는 줄 또한 모르고 번역문에 따라 ‘충정공 5남’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② 결정적 미스는 번역비문 맨 하단의 비문일자 표기에 있습니다. 즉 하단의 “정묘년(1387년) 고선(음력3월) 등본(사본) 인간(인쇄)” 문구에서 정묘년의 서기년도를 비문번역자가 엉뚱하게 착각하여 글쓴이로 되어 있는 세미공의 생졸년대(고려말)에 해당하는 정묘년을 찾아 1387년이라 번역한 것입니다.이 정묘년은 비문이 실린 『임씨세가대동보』 초간본이 인쇄 간행(印刊)된 1927년 정묘년을 말하는 년도인데도 비문번역자가 이를 착각한 것입니다. 즉, 이 묘비문은 1387년 정묘년(강어단알) 음력3월(고선절)에 언수공의 자 세미공이 쓴 글이 아닙니다. 비문내용 또한 거의 조작된 글입니다.

 

◎ 충정공 묘비문(忠貞公 墓碑文)

 

공(公)의 성(姓)은 임씨(林氏)요 이름은 언수(彦脩), 자(字)는 국경(國擎), 호(號)는 계헌(桂軒)이며 관향(貫鄕)이 평택(平澤)이다.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 갑오(1294)년 출생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307) 사마문과시(司馬文科試)에 합격하여 관직이 금은자광록대부(金銀紫光祿大夫) 대광영찬성문하시중평장사(大匡領贊成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다.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封)하고 시호(諡號)는 충정공(忠貞公)이다.

명(明) 홍무(洪武) 17년(1384) 고려 폐왕(廢王) 신우(辛禑) 갑자(甲子, 1384)년에 돌아가셨다. 향년(享年) 91세였다.

태당(太唐) 연당(蓮堂) 학사공(學士公) 온공(蘊公)을 시조(始祖)로 하여 여러 대(代)를 이어왔는데 팽성(彭城) 한림학사(翰林學士)이고 시호(諡號)가 충절공(忠節公)인 팔급공(八及公)이 그의 11대조(代祖)이시다.

충절공(忠節公)은 큰아들 태사상장군(太師上將軍)이시고 시호가 충무공(忠武公)이신 양저를 낳으시고,

충무공(忠武公)은 상장군(上將軍)이시고 시호가 충렬공(忠烈公)이신 무(碔)를 낳으시고,

충렬공(忠烈公)은 영삼사(領三司) 평성백(平城伯)이시고 시호(諡號)가 충숙공(忠肅公)이신 희(禧)를 낳으시고,

충숙공(忠肅公)은 평장사(平章事)이신 면(冕)을 낳으시고,

평장사공(平章事公)은 시금위(侍禁衛)이신 득우(得雨)를 낳으시고,

시금위공(侍禁衛公)은 평찰품사(評察稟事)이신 몽주(夢周)를 낳으시고,

평찰품사공(評察稟事公)은 통학권장(統學勸長)이신 희윤(喜胤)을 낳으시고,

권장공(勸長公)은 평장사(平章事)이신 연(璉)을 낳으시고,

평장사공(平章事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신 정(禎)을 낳으시고,

시중랑공(侍中郞公)은 좌찬성(左贊成)이신 완(玩)을 낳으시니 언수공(彦脩公)의 아버지이시다.

어머니는 이조전서(吏曹典書)이신 광산(光山) 김황(金煌)의 따님이시다.

부인(夫人)은 정경부인(貞敬夫人) 김포 공씨(金浦) 공씨(公氏)인데 문하평리사(門下評理事)이신 공한기(公閑奇, 舊譜에는 永純)의 따님이시다.

계부인(繼夫人)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여산(礪山) 송씨(宋氏)인데 평장사(平章事)이신 송심(宋深)의 따님이시다.

성산(星山) 지금의 성주성(星州城) 동쪽 교하(交河), 지금의 선남면(船南面) 고양리(古襄里) 지금의 신부동(新扶洞)에 경좌(庚坐)(近西)로 세 분의 묘(墓)가 있다.

아들 다섯 분을 두셨는데 큰아들은 좌찬성(左贊成)이신 충간공(忠簡公) 성미(成味)이고, 둘째 아들은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이신 견미(堅味)이고, 셋째 아들은 관산군(冠山君)이신 제미(齊味)이고, 넷째 아들은 이부상서(吏部尙書) 좌복야(左僕射)인 조양군(兆陽君) 세미(世味)이고, 다섯 째 아들은 선산군(善山君)이고 시호(諡號)가 문정공(文靖公)인 의미(毅味)이시다.

아들 세미(世味)가 삼가 기록(記錄)합니다. 지석문과 비문이 서로 부합되기 때문에 따로따로 글을 짓지 아니한다.

정묘년(丁卯年, 1387년) 고선(姑洗, 음력 3월) 등본(謄本)(사본寫本) 인간(印刊)(인쇄印刷)

 

1927년(정묘년)

1934(갑술년)~1935년보

◎ 彦脩-字 國擎, 號 桂軒

景定 甲子生

   ※ 景定(경정)-남송(南宋)의 연호

      甲子生은 1264년생

彦脩-좌동

元統 16년 忠烈 甲午生

※ 元統(원통)-원 순제 때의 연호. 16년은 없다.

   충렬 갑오생은 1294년생.

壬午司馬 甲申文科

三重大匡 太尉 吏部尙書

左僕射 平城府院君 諡 忠貞

丁未 司馬文科

金銀紫光祿大夫 大匡

領贊成 門下侍中平章事

平城府院君 諡 忠貞公

至正 甲午卒 享年91

※ 至正(지정)-원 순제 때 연호

   甲午卒-향년 91로 하면 1354년졸

明洪武 17年 辛禑 甲子卒 91

※ 洪武(홍무)-明 태조 연호

   17년은 1384년 甲子(1384)이다. 향년 91

 

蘊-大唐 蓮堂學士 시조

       屢傳八及

八及-皇朝 翰林學士 彭城侯

  諡 忠節 其遠祖 屢傳至良貯

八及-翰林學士 彭城侯

    諡 忠節공 언수공 11세조

良貯-太子太師 上將軍

  諡 忠武 언수공의 10세조

良貯-太子太師 上將軍

   諡 忠武

자 碔-상장군 시 충렬공

자 碔-좌동(左同)

자 禧-領三司 平城伯 諡 忠肅

자 禧-좌동(左同)

자 冕-平章事

자 冕-좌동(左同)

자 得雨-侍禁衛

자 得雨-좌동(左同)

자 夢周-評察禀事

자 夢周-좌동(左同)

자 喜胤-統學勸長

자 喜胤-좌동(左同)

자 璉-平章事

자 璉-좌동(左同)

자 楨-門下侍中

자 楨-좌동(左同)

자 玩-左贊成 公의 考(父)

자 玩-좌동(左同)

 妣-光山金煌女

妣-光山金煌女

配金浦公氏 閑奇女(舊譜 永純)

좌동(左同)

配 礪山宋氏 深女

좌동(左同)

星山 今 星州域東 交河 今 航南面

  古襄里 今 新扶洞 庚坐 三位祔

좌동(左同)

生八男

生八男

長子 成味-文 左贊成 忠簡公

長子 成味-左同

二子 齊味-開城判尹

二子 齊味-冠山君

三子 堅味-文 平章事 平院君

三子 堅味-左同

四子 世味-吏部尙書 左僕射 兆陽君

四子 世味-左同

五子 先味-南平章事 杜門洞先生

五子 先味-左同

六子 自味-文禮部尙書 恩津君

六子 自味-左同

七子 毅味-南上護軍 一善君

七子 毅味-善山君 諡文靖公

八子 季味-文平章事 平原保安君

八子 季味-左同

子 世味 謹誌

子 世味 謹識

歲 彊圉單閼 姑洗節 謄本印刊 誌石文與碑文互相符合故不爲 各章印刊焉

誌石文與碑文互相符合故不爲 各章 歲 彊圉單閼姑洗節謄本印刊焉

 

※ 强圉(강어)-丁, 單閼(단알)-卯 즉 「丁卯년」(『임씨세가대동보』가 인간(印刊)되는 1927년) 姑洗節(고선절)-음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