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령조(三齡祖) 뒤의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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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억령·백령·구령 세분 령자조(齡字祖)를 뒤이은 주요 선조 몇 분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1) 임호(浩)(1522 중종17~1592 선조25)

구령공의 장자로 호를 구암(龜岩)이라 하였다. 어려서 중부 석천선생 억령공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업을 닦았다. 명종4년(1549)에 사마시, 이듬해 무과에 등제 명종17년(1562) 사옹원 직장에 이르렀다. 동년 11.26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의 거려를 마친 후 벼슬에 연연치 않고 고향에 정착 산림에 은거하여 효제(孝悌) 경독(耕讀)의 한일지사(閑逸之士)로 자부하면서 백성을 순화 선도하여「도의(道義)의 이상향」을 건설하는데 큰 뜻을 세웠다.동장 박규정(함양)과 뜻을 모아 외조부 박세간(난포-구암공의 모친과 규정의 조모가 난포 박씨)의 내외 후손 72인으로 연명(聯名)하여「구림대동계(鳩林大同稧)」를 수계(修稧)하고「영세불망의 뜻」을 세우니, 이것은「두문동 72현」의 옛 충절을 모범으로 한 것이었다 한다.(수계의 뜻은 공께서 쓰신「구림동중수계서(鳩林洞中修稧序)」에 잘 나와 있다.)

 

「구림대동계」는 중종 때 도입된 중국 북송 때의「여씨향약(呂氏鄕約)」이 그 모범인데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 변형시킨 향약계로서, 강령이 상장상부(喪葬相賻) · 환난상구(患難相求) · 과실상규(過失相規) · 보미수합(補米收合) · 강신수목(講信修睦) 등이었으며 몇 차례 중수(重修)되어 혼인상자(婚姻相資) 같은 것이 추가되기도 하여 공제계(共濟契), 상부계(相賻契)같은 성격을 띠면서 지역사회 발전에도 공헌하였다.(자세한 것은 월당공편 77쪽 이하 참조) 이 계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으며(최근의 계원이 80명이었다) 전북 태인의「고현동 향약」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향약계이다. 공께서는 대동계를 수계하면서 「회사정(會社亭)」이라는 정자도 지었다. 이 정자를 짓게 된 연유는 공이 쓰신「회사정 병서(幷序)」에 잘 나와 있는데,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강신수목(講信修睦)할 장소로서의 용도가 주목적이었다. 전란에 파괴되었던 것을 근자에 재건하였다. 동헌(洞憲) 등 16점의 고문서는 1992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종 때의 문신 윤용구가 쓴「구암공행장」이 전하는 일화에 의하면 선조원년(1568)에 임금이“(공과 같은 이는) 재상들이 인정하는 국가의 대기(大器)인데 은거할 일이 아니라”하며 세 번이나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임호는 공신의 아들로서 여러번 불러도 나오지 않으며 녹을 주어 입사 (入仕)케 할 수도 없어, 특별히「남호처사(南湖處士)라는 호로 불러 그 뜻을 표하노라”하였다. 공이 생각하기에 이미 여러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표하라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불궤(不軌-법규에 따르지 아니함)가 될 것 같으므로 부득이「거사(居士)」로 스스로 호하고 요월당 옆 국사암(國師岩) 바위에「구암거사임호지령(龜岩居士林浩之閭)」라는 제명(題名)을 음각하여 둔바, 그 뜻이 여기에 있었다. 공께서 쓰신 여러 글들은『구암집』·「구암공 유고」등으로 전하고 있다. (구암이라는 호는 국사암이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음에 그 연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 임혼(渾)(1522 중종17~ ?)

구령공의 차자이다. (족보상 구암공과 생년이 같다.)

명종8년(1553) 계축 친경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족보에 의하면 호조 정랑을 지내셨으며, 대동찰방으로서 치적이 크셨다한다.『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평안도사(平安都事) (도사(都事)- 관찰사(종2)를 보좌하던 종5품의 관원) (명종16.5.11), 색 낭청 (낭청(郎廳)-당하관의 총칭)(선조13.10.14)의 벼슬기록이 나온다.

 

3) 임현(晛)(1569선조2 ~ 1603 선조36)

구령공의 장증손이다. 조부가 호(浩), 부가 극순(克旬)(진사)이다.

공의 절친 허균(許筠) (선조·광해 때의 문신이고 형조참의 좌찬성에 이르렀다. 누이 허난설헌과 더불어 시문에 탁월하였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 쓴「예조좌랑 강진현감 임현묘지명」에 의하면,

허균은 공과 동년생(1569 선조2)으로“서울 남상곡(南庠谷)에서 같이 컸으며,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부터 늘 같이 배웠다. 선조18년(1585) 봄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영암 구림)으로 내려갔는데연이어 조부모상을 당했다. 선조23년(1590) 비로소 서울에 돌아왔다. 학문이 매우 깊고 넓으며 문장이 마치 시냇물이 넘치고 말이 달리는 것 같아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

 

선조24년(1591) 진사에 뽑히고 선조30년(1597) 여름 알성시에 병과로 급제 벼슬길에 나섰는데 승정원 주서, 예문관 검열·대교(待教)·봉교(奉敎)에 올랐으며, 선조33년(1600) 예조좌랑으로 나갔다. 원래 몸이 쇠약하고 위병이 심하던 차 노부도 모시고 몸도 보살피고자 강진현감을 청원하여 내려갔으며, 질환이 심하여 이듬해(1601) 4월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집으로 돌아갔는데 6월 어느 날 졸하고 말았으니 향년 33세였다.(족보에는 졸년이 1603년이고 향년 35세로 되어있다. - 필자 주) 나와 함께 강 위에 배를 띄워 지내면서 시를 읊고 거문고 타고 노래 불렀으며 지조를 지키고 권세와 재리를 쫓지 않았다. 성품이 소박하고 조용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며 효성이 극진하였다”한다. (남상곡(南庠谷)-남산골을 이르는 듯하다. 남산의 북쪽 골짜기(오늘날 필동)에 명문대가들이 적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소론·남인·북인파들이 주로 살았고 이들 중에는 가난한 선비들이 많아 이들을「남산골 샌님」이라 불렀다.(박지원의「허생전」이 유명) 허균의 집은 이순신 장군과 같은 건천동(乾川洞)(인현동, 초동에 걸친 동네)에 있었다.)

 

허균은“공의 관을 내리려하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고 슬퍼하였다. 장례식에서“오호, 자승(子昇-임현의 자)이여! 하늘은 왜 그대를 냈다가 또 어째서 이렇게 앗아간단 말인가!”하고 탄식했다. 자식은 1녀만 두었다하는데 족보에는 사위 기록이 없으며, 양자로 기영(起榮 - 생부 학鶴)을 계자(系子)하였다. 묘소가 증조부 구령공의 산소 바로 위쪽에 자리하였음이 특이하다.허균의 문집인『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주고받은 서간, 묘지명 등이 전한다. 정조 때 편찬된『국조인물고』에 이 묘지명과 「석천선생 묘표」(박세채 씀)가 수록되어 있다.

 

4) 임 색(氵策)(1522 중종17~? )

백령공의 차자이다. 명종 11년(1556) 병진 별시 병과에 급제하고 경기도사, 평산부사를 지냈다. 슬하의 자식이 따님 한분이었다.

 

5) 임성익(聖翊)(1594 선조27 ~1675 숙종1)

백령공의 4자 발(潑)(덕원부사)의 손자이고 극충(克忠)(선무랑)의 자. 광해 10년(161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인조11년(1633)계유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조선왕조실록』을 참조하면, 인조 때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장령, 효종 때 사간원 헌납(정5), (능주)목사를 지냈다. 족보 방주에는 세자 시강원 필선·보덕, 좌부빈객(종2)을 지냈다하였으며, 능주 목사를 마친 후 1675년(숙종1) 졸하신바, 특사(特賜)로 예장(禮葬)하니 묘소가 금산군 복수면 목소리에 있다.

 

2. 임진왜란과 선산임씨

 

주지하다시피「임진왜란」은 30만 대군을 준비한 일본군이 1592년(선조25) 임진년 4.13 17만 병력의 대군을 9개부대로 편성해 조선을 침공하기 시작한 후 1598년(선조31) 11.27 전군이 퇴각 완료할 때까지 7년간 조선의 강토를 짓밟고 백성들을 능욕한 대 전란이었습니다.

이 왜란이 일어나자 우리 선산임씨 선조와 척족들 중 전투에 참가하거나 창의(倡義)에 가담하여 국난극복의 최전선에서 싸우신 분들이 계십니다. 이제 족보와 역사기록 등을 참조하여 그 사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임란 창의(倡義) 참전 주요인물 및 그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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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참전 인물들의 사적

1) 임극성(克惺)(1567 명종22~1631 인조9)

구령공의 손자이고 완(浣)의 자이다. 호를 월담(月潭)이라 하였다. 주부를 지냈다. 임란이 일어나자 집안아이들과 노복(奴僕)들을 이끌고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연안·행주·진주 등지의 전투에 참전 승전을 도왔다. 이어 이순신장군의 막하에 들어가 흥판유사(興販有司)에 임명되어 군수물자를 온힘으로 조달 완도 고금도 진지로 조수(漕輸-배로 실어 나름)하였다. 1598년 무술년 10. 4 전란이 끝나갈 무렵 순천 왜교성(倭橋城) 전투에서 적선을 대패시키고, 동월 9일 아침에도 승승장구 하였다.

 

* 이순신과 고금도 및 왜교성 전투-임란 발발 1년 전인 1591.2.13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로 약칭)에 제수 된 이순신은 여수 본영에서 전쟁에 대비하였다. 1592.4.13 임란이 일어난 후 5.7~5.8 옥포·합포·적진포에서 왜군을 처음으로 격파한(흔히「옥포승첩」으로 알려져있다) 이순신은 이후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593.8.30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조선수군을 지휘하였다.

 

강화회담의 결렬로 1597.1.5 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이순신은 1.27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 모진 국문을 당하였다. 정탁의 구명노력으로 4.1 겨우 석방 권율의 휘하로 내려가 백의종군하고 있던 차 7.16 원균(후임삼도수군통제사)이 거제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자 8.3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하였다.1597.9.16. 명량해전에 대승을 거둔 후 1598.2.17 진을 목포 보화도에서 완도고금도로 옮기고 수군재건에 진력하였다. 이때 중요한 임무가 군량미 등 군수물자 조달·운송이었다.한편 1597.8.25 전주성을 함락하였던 일본 좌군은 8.28 주력군이 순천으로 남하 왜교성을 구축한다. 1598.9.20~10.9 조명연합군(이순신·진린·유정)이 순천 왜교성을 공격 왜군의 퇴로를 봉쇄하였으며 11.19 조명연합군은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순신이 순국하였으며, 11.27 전왜군의 퇴각 완료로 7년 간의 왜란이 끝난다.

 

당포·남해·부산·거제 등지의 전투에서 적들을 참획(斬獲)함이 심다(甚多) 하였다. 이에 금계군 박동량(구령공의 외손자. 임란 때 병조좌랑으로 선조의 의주피난길을 호종함)과 석담 유형(역시 구령공의 외손자. 이순신 다음다음의 삼도수군통제사)이 합하여 임금께 계(啓)를 올린바,“임극성의 힘쓴 공적이 장적(壯蹟)하여 김응서 (임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방어사로 임명되어 명제독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다시 전라병마절도사가 되어 권율과 함께 남원의 토적을 소탕하였다.) 와 다를 바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관직을 내렸으나 굳이 사양하며 아뢰기를“저에게 공이 있다면 부모에게 그 영예를 주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임극성은 충효를 겸전하였다”하고 3대를 특별히 추증하면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이 이야기가 유형이 쓴 글에 있다고 족보가 전한다.『호남지(湖南誌)』 (1935)에도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박동량과 유형은 극성공의 고종4촌)

 

2) 임걸(傑)(1574 갑술 선조7~1614 갑인 광해6)

우리공의 5세손이다. 선조21년(1588 만력 무자) 무과에 급제 후 선전관을 지내셨는데, 임란 때 창의에 가담 용만(龍湾)에서 적병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워 훈련원 주부(主簿)를 배수하시고, 통정대부병마절제사에 올랐다고 족보가 전한다.(1855『을묘보』) 무공을 기려 호를 충의(忠義)라 칭하였다.1934년 후손 태익(秦翊)께서 쓰신 공의 행장에는 재종숙 월담공 극성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가하신 일 등 조금 자세한 사적이 소개되어 있다.

 

3) 임능복(能福) (1577 선조10 정축~1600 선조33 경자)

구령공의 손자이고 완의 자이다. 극성의 동생으로 고성입향조가 된다. 족보가 전하기를, 아명을 만복(晩福)이라 하였다니 늦둥이로 태어나신 듯하다. 어릴 때부터 용감하고 힘이 세었다하며 임란을 당하여 창의(倡義)에 가담 공을 세워 원종공신 가선대부 우림위장을 배수하였다고 한다. 특기할 것은 능복공께서 입향한 곳으로 알려진 경남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는 예전에 연화동으로 불렸는데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적진포(積珍浦)라 불린 포구로서 임진왜란 때 첫 전승지였다.(이순신의 승전보에는 적진포(赤珍浦)로 나온다.)

 

즉 1592.4.13 임란 발발 후 이순신이 여수를 출발 처음으로 출전하여5.7~5.8 옥포·합포·적진포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첫 승전 보고를 올렸던 바로 그 전투지의 한곳이다.(일반적으로 첫 승전이 옥포해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승전보고 장계의 제목이〈옥포파왜병장〉인 때문이며, 장계의 내용에는 이 3지역을 합쳐 첫 승전으로 하고 있다.) 임란 후 광해11년(1619) 남촌진(南村鎭)이 인근 도선에서 이곳으로 이설되어‘남촌’으로도 불린다.(필자 임용원의 고향) 족보에 어릴 때 고성으로 갔다고 쓰여 있으나, 임진왜란의 제반 경과와 백형극성의 행적에 비추어 보면 공의 고성 입향은 어릴 때가 아니라 백형을 따라남해안 전투에 참가한 후 적진포 즉 연화동에 그대로 정착하신 듯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장에서 만난 분 중 경주김씨 무사(金懋師)분이 계셨는데 그 분의 사위가 됨으로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4) 임극협(克協)

억령공의 손자이고 찬(澯)의 자이다. 족보에 의하면, 무과에 급제하고 부장(部將)이셨다하며, 충무공 이순신의 계(啓)에 공을 유력 전공자(戰功者)라 한바, 이 글이 선조32년(1599) 12.16 예조승전록(禮曹承傳錄)에 전한다 한다.

 

5)임광안(光顔)(1539 중종34~1592 선조25)·광민(光閔)(1558 명종13~1592)

기령공의 손자이고 홍(泓)의 자(장남·3남)이다. 족보(1821 신사보, 1855 을묘보)에 의하면, 광안은 만력4년 (1575 선조9) 무과에 등제하고 권지훈련원 봉사(奉事)·수의부위(修義副尉)(종8)·만호를 지내셨고 임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전투에 임하여 힘껏 싸우다 죽산에서 전사하셨다 하며, 동생 광민 또한 무과 후 선전관으로 백형과 함께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셨다 한다.(죽산-안성시 소재 임란 초기 전투지)

 

6) 정운(鄭運)(1543 중종38~ 1592 선조25)

영암출신으로 우원공의 사위 정응정(훈련참군)의 자이다. 1570년(선조3)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금갑도 수군권관·거산(居山)찰방을 거쳐 웅천현감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591년 녹도(고흥군 도양읍 봉암리)만호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서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을 주장하였다.1592년 5.1 이순신이 휘하 장병들을 좌수영 앞바다에 집결시키고 진해루에서 경상도 출전에 대한 토론을 벌였을 때, 정운이“적군을 치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있소? 영남을 내버려두어 오늘에 다 무너지고 나면 내일의 우리일은 또 어떻게 할 것이오? 적이 울타리 밖에 있을 때는 막기가 쉽지만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오고나면 일이 어려워지는 것이오. 영남은 호남의 울타리이고 울타리가 무너지고 나면 여기도 보전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군병을 몰고나가 한편으로 영남을 돕고 또 한편으로 호남을 보호해야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정운의 말을 들자 이순신은 크게 소리 높여 출전을 선언하였다. 옥포·당포·한산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9월의 부산포해전에서 우부장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정운이 순국한 곳이 몰운대(沒雲台) 앞바다인데, 이곳이 몰운대라는 말을 듣고 雲자와 자기이름의 運자가 동음이라며 “내가 이 대에서 죽을 것이다.”하였다 한다. 이순신은 정운을 잃은 것이 못내 애석해 여수 본영으로 돌아와친히 정운을 제사하는 글을 지어 바쳤다. 그리고 이대원 사당에 같이 모시기를 청하는 장계를 올려 선조의 허락을 받았다. (이대원의 사당은 흥양 즉 지금의 도양읍에 있다.)

 

7) 임발영(任發英)(1539 중종34~1593 선조26)

해남출신으로(본관 장흥) 천령공의 사위 임희성(진도군수)의 차자이다. 1568년 선조원년 사마시에 급제한 후 남행선전관을 제수 받았다. 임란 때 종묘서(宗廟署) 영(令)이었는데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가니 임금이“하늘이 임발영을 낳아 내 사직신이 되었다.”고 그의 팔에 써 주고, 그날로 그에게 무과 시험을 보게 하여 급제 후 안주목사를 제수하였으며 이듬해는 운량사(運糧使)로 군량수송에 공을 세웠다. 뒤에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고 예양군(汭陽君)에 봉해졌다.

 

8) 고경신(高敬身)·경형(敬兄) 형제

장흥인으로 억령공의 사위 고맹영(대사간 이조참의 등 역임)의 자들이다.

이들의 이복형이 고경명(高敬命)(1533 중종28~1592 선조25)이다. 고경명(모친은 남평서씨)은 억령공의 제자로서 1558년(명종13)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후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하는 문제로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직되었는데 고향으로 돌아와 한가로이 지내다가 1581년(선조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된 후 명사원접사종사관·예조정랑을 지내고 순창군수로 재직 중 1588년(선조21) 또 파직되었다. 1590년 1월(선조23) 승문원판교로 다시 등용된 후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가 또 다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을 모으고 두 아들 종후(從厚)·인후(仁厚)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 수원에서 항전하고 있던 광주목사 정윤우에게 인계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전 나주부사 김천일, 전 정언 박광옥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천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하였는데 여기에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6.1 북진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전주·여산·은진 등지에서, 영남 쪽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는 왜적을 막는데 주력하고,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함께 금산의 왜적을 공격할 것을 제의하고 7.10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와 더불어 순절하였다.경신·경형 형제들(모친이 억령공의 서녀)은 이복형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키자 조카 종후를 따라 의분 참전하였는데, 경신은 격문을 가지고 제주도로 가다가 바다에서 순몰 하고, 경형은 진주전투에서 순절하였다.(장흥고씨족보 참조)

 

9) 임환(林懽)(1561 명종16~1608 선조41)

나주인으로 구령공의 장자 호(浩)의 사위이다. 백호 임제(林悌)의 동생이다.선조23년(1590) 진사시에 합격 후 임란이 발발하자 오종도(吳宗道)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무주부사·직산현감·문화현령을 지냈다.(나주임씨족보) 이순신의『난중일기』를 보면 1597년 정유년 11.15 임환과 윤영현이 찾아왔다고 쓰여 있다. 나주임씨 족보에 의하면, 그의 두 번째 부인 제주 양씨는 임란을 맞아 일가가 피난을 가는데 바다에서 적병을 만나자 적장을 속여 일가는 화를 면하게 하고 자신은 바닷물에 빠져 의를 지키고 순절하였다한다. 숙종 때 특명으로 정려각을 세웠다한다.

 

10) 유형(柳珩)(1566 명종21~1615 광해7)

구령공의 사위 유용(柳溶)(경원부사)의 자이다. 본관이 진주 호는 석담(石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 김천일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같이 강화까지 가 활동하다 의주행재소에 가서 선전관이 되었는데 이순신의 군중(軍中)으로 칙사로 가기도하였다. 임란 중 1594년 전주에서 시행된 별시 무과에 급제 다시 선전관이 되었다가 임란 때 설치된 훈련도감의 초관(哨官)(종9품의 초급장교)을 거쳐 1595년 해남현감으로 나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거제 칠천량해전에서(7.16) 원균이 대패한 후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였을 때(8.3) 이순신의 막료가 되어 수군재건에 진력하고 적극 도왔다.(이때 이순신은 전라 쪽에 있었는데 8.19 장흥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한테서 남은 배 12척을 인수받고 나중에 명량해전에서 대승한다)

 

1598년 순천 왜교성 전투 등에 참가하고 특히 노량해전에서 분전한바, 이순신이 전사하고 공도 적탄을 맞았으나 다행히 살아났다. 승전의 공으로 부산진첨절제사에 발탁되고 바로 경상좌수사로 승진하였다. 1600년 충청도 수사(수군절도사), 1601년 전라도 우수사를 거쳐 1602년 5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초대·3대 이순신, 2대 원균, 4대 이시언) 이후 충청병사(병마절도사), 회령부사, 북도병사, 경상좌도 병사, 평안병사를 거치고 황해병사 때 졸하니 세수 50이었다. 후손이 그의 시문과 행장 등을 모아 편수한 유고집『석담유고』에 공과 동시대인이요 이종사촌인 박동량(선조의 의주피난 때 병조좌랑으로 호종)이 공의 행적을 자세히 쓴『행장』이 실려 있다.(유형과 박동량은 구령공의 외손)

 

 

권율의 행적-권율은 영의정 권철(구령공의 초상화를 보고 상찬의 글을 남긴 분)의 아들이고 장인이 이항복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592. 5. 2 한양이 함락된 뒤 전라도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이 되어 서울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하였다. 용인에서 이광이 무모한 공격을 펼쳐 대패하고말았는데 권율은 광주로 퇴각 후사를 계획하였다. 그 후 남원에서 1천여 명의 의군을 모집 7월초 금산 이치(梨峙)에서 왜병을 격퇴 호남을 보존하였다. 그 공으로 곧 전라감사로 승진하였으며 12월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올라 수원 독산산성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 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하여 도성수복작전을 펴기 좋게 행주산성을 택하여 진지를 구축한바, 1593.2.12 공격해오는 왜군을 격퇴 대승을 거두고 4.20 이여송과 함께 한양에 입성하였다. 이 공으로 동년 6. 6 도원수를 제수 받아 영남등지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후 호조판서.충청관찰사 등을 거쳤으나 1597.1.15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재차 도원수가 되어 전란을 지휘하였다.

김응서-임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방어사로 임명되어 명제독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다시 전라병마절도사가 되어 권율과 함께 남원의 토적을 소탕하였다.

월담공의 행적과 유형의 글-유형의 후손 석우가 행장·시문 등을 모아 1935년『석담유고(石潭遺稿)』를 편수한바 있는데 1969년 기정이 정식으로 발간하였으며 1976년 유근창이 주요후손의 행장 등을 포함 국역으로 간행하였다. 월담공의 행적기록을 살펴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유기정의 발문에 의하면 소(疎)·장(狀)등 국가기록은 모두 찾아 싣지 못하였다고 하고 있음으로 보아월담공의행적은 별도 기록에 있을듯하다.

임걸공의 휘(諱)와 계보-병진보(1916)가 공의 휘를「극걸(克傑)」로 고쳐 불렀는데, 이를 따라 1935년(소화10) 간행된『호남지』에「극걸」로 나온다. 그러나 이『호남지」에는 임걸(林乞)이란 분도 소개되어 있는데 그 사적이 같다. 이로보아 공의 휘는 구보대로「걸(傑)」이 맞는 듯하다.(1956 병진보·1977 정사보가「극걸」로 하였으나 1995년 을해보가「걸」로 바로 잡았다) 덧붙여, 우리공의 계보가 구보(최초 병술보1766~4차 신묘보1891)에서는 우리(遇利)-훤(萱)-형(氵冏)-거손(擧遜)-걸(傑)-득의(得義)였는데, 1916년 병진보 때 우리-일령(壹齡)-형(泂)-극걸-거손으로 바꾸었고 병신보(1956)·정사보(1977)가 뒤따랐다. 그러다가 1995년 을해보 때 우리-일령-형(泂)-거손-걸로 조정하였다. 그러나 우리공 자와 손의 휘에 관하여는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공의 졸년-을묘보(1855)는 선조37년 갑진(1604)이라 하였는데 1956년 병신보 때 광해 6년 갑인(1614)으로 바꾸었으며 1995년 을해보에서는 1614년 졸 향년 41세로 정정하였다.

 

 

1. 억령·백령·구령 세분 령자조(齡字祖)를 뒤이은 주요 선조 몇 분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1) 임호(浩)(1522 중종17~1592 선조25)

구령공의 장자로 호를 구암(龜岩)이라 하였다. 어려서 중부 석천선생 억령공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업을 닦았다. 명종4년(1549)에 사마시, 이듬해 무과에 등제 명종17년(1562) 사옹원 직장에 이르렀다. 동년 11.26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의 거려를 마친 후 벼슬에 연연치 않고 고향에 정착 산림에 은거하여 효제(孝悌) 경독(耕讀)의 한일지사(閑逸之士)로 자부하면서 백성을 순화 선도하여「도의(道義)의 이상향」을 건설하는데 큰 뜻을 세웠다.동장 박규정(함양)과 뜻을 모아 외조부 박세간(난포-구암공의 모친과 규정의 조모가 난포 박씨)의 내외 후손 72인으로 연명(聯名)하여「구림대동계(鳩林大同稧)」를 수계(修稧)하고「영세불망의 뜻」을 세우니, 이것은「두문동 72현」의 옛 충절을 모범으로 한 것이었다 한다.(수계의 뜻은 공께서 쓰신「구림동중수계서(鳩林洞中修稧序)」에 잘 나와 있다.)

 

「구림대동계」는 중종 때 도입된 중국 북송 때의「여씨향약(呂氏鄕約)」이 그 모범인데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 변형시킨 향약계로서, 강령이 상장상부(喪葬相賻) · 환난상구(患難相求) · 과실상규(過失相規) · 보미수합(補米收合) · 강신수목(講信修睦) 등이었으며 몇 차례 중수(重修)되어 혼인상자(婚姻相資) 같은 것이 추가되기도 하여 공제계(共濟契), 상부계(相賻契)같은 성격을 띠면서 지역사회 발전에도 공헌하였다.(자세한 것은 월당공편 77쪽 이하 참조) 이 계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으며(최근의 계원이 80명이었다) 전북 태인의「고현동 향약」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향약계이다. 공께서는 대동계를 수계하면서 「회사정(會社亭)」이라는 정자도 지었다. 이 정자를 짓게 된 연유는 공이 쓰신「회사정 병서(幷序)」에 잘 나와 있는데,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강신수목(講信修睦)할 장소로서의 용도가 주목적이었다. 전란에 파괴되었던 것을 근자에 재건하였다. 동헌(洞憲) 등 16점의 고문서는 1992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종 때의 문신 윤용구가 쓴「구암공행장」이 전하는 일화에 의하면 선조원년(1568)에 임금이“(공과 같은 이는) 재상들이 인정하는 국가의 대기(大器)인데 은거할 일이 아니라”하며 세 번이나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임호는 공신의 아들로서 여러번 불러도 나오지 않으며 녹을 주어 입사 (入仕)케 할 수도 없어, 특별히「남호처사(南湖處士)라는 호로 불러 그 뜻을 표하노라”하였다. 공이 생각하기에 이미 여러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표하라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불궤(不軌-법규에 따르지 아니함)가 될 것 같으므로 부득이「거사(居士)」로 스스로 호하고 요월당 옆 국사암(國師岩) 바위에「구암거사임호지령(龜岩居士林浩之閭)」라는 제명(題名)을 음각하여 둔바, 그 뜻이 여기에 있었다. 공께서 쓰신 여러 글들은『구암집』·「구암공 유고」등으로 전하고 있다. (구암이라는 호는 국사암이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음에 그 연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 임혼(渾)(1522 중종17~ ?)

구령공의 차자이다. (족보상 구암공과 생년이 같다.)

명종8년(1553) 계축 친경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족보에 의하면 호조 정랑을 지내셨으며, 대동찰방으로서 치적이 크셨다한다.『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평안도사(平安都事) (도사(都事)- 관찰사(종2)를 보좌하던 종5품의 관원) (명종16.5.11), 색 낭청 (낭청(郎廳)-당하관의 총칭)(선조13.10.14)의 벼슬기록이 나온다.

 

3) 임현(晛)(1569선조2 ~ 1603 선조36)

구령공의 장증손이다. 조부가 호(浩), 부가 극순(克旬)(진사)이다.

공의 절친 허균(許筠) (선조·광해 때의 문신이고 형조참의 좌찬성에 이르렀다. 누이 허난설헌과 더불어 시문에 탁월하였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 쓴「예조좌랑 강진현감 임현묘지명」에 의하면,

허균은 공과 동년생(1569 선조2)으로“서울 남상곡(南庠谷)에서 같이 컸으며,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부터 늘 같이 배웠다. 선조18년(1585) 봄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영암 구림)으로 내려갔는데연이어 조부모상을 당했다. 선조23년(1590) 비로소 서울에 돌아왔다. 학문이 매우 깊고 넓으며 문장이 마치 시냇물이 넘치고 말이 달리는 것 같아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

 

선조24년(1591) 진사에 뽑히고 선조30년(1597) 여름 알성시에 병과로 급제 벼슬길에 나섰는데 승정원 주서, 예문관 검열·대교(待教)·봉교(奉敎)에 올랐으며, 선조33년(1600) 예조좌랑으로 나갔다. 원래 몸이 쇠약하고 위병이 심하던 차 노부도 모시고 몸도 보살피고자 강진현감을 청원하여 내려갔으며, 질환이 심하여 이듬해(1601) 4월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집으로 돌아갔는데 6월 어느 날 졸하고 말았으니 향년 33세였다.(족보에는 졸년이 1603년이고 향년 35세로 되어있다. - 필자 주) 나와 함께 강 위에 배를 띄워 지내면서 시를 읊고 거문고 타고 노래 불렀으며 지조를 지키고 권세와 재리를 쫓지 않았다. 성품이 소박하고 조용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며 효성이 극진하였다”한다. (남상곡(南庠谷)-남산골을 이르는 듯하다. 남산의 북쪽 골짜기(오늘날 필동)에 명문대가들이 적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소론·남인·북인파들이 주로 살았고 이들 중에는 가난한 선비들이 많아 이들을「남산골 샌님」이라 불렀다.(박지원의「허생전」이 유명) 허균의 집은 이순신 장군과 같은 건천동(乾川洞)(인현동, 초동에 걸친 동네)에 있었다.)

 

허균은“공의 관을 내리려하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고 슬퍼하였다. 장례식에서“오호, 자승(子昇-임현의 자)이여! 하늘은 왜 그대를 냈다가 또 어째서 이렇게 앗아간단 말인가!”하고 탄식했다. 자식은 1녀만 두었다하는데 족보에는 사위 기록이 없으며, 양자로 기영(起榮 - 생부 학鶴)을 계자(系子)하였다. 묘소가 증조부 구령공의 산소 바로 위쪽에 자리하였음이 특이하다.허균의 문집인『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주고받은 서간, 묘지명 등이 전한다. 정조 때 편찬된『국조인물고』에 이 묘지명과 「석천선생 묘표」(박세채 씀)가 수록되어 있다.

 

4) 임 색(氵策)(1522 중종17~? )

백령공의 차자이다. 명종 11년(1556) 병진 별시 병과에 급제하고 경기도사, 평산부사를 지냈다. 슬하의 자식이 따님 한분이었다.

 

5) 임성익(聖翊)(1594 선조27 ~1675 숙종1)

백령공의 4자 발(潑)(덕원부사)의 손자이고 극충(克忠)(선무랑)의 자. 광해 10년(161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인조11년(1633)계유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조선왕조실록』을 참조하면, 인조 때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장령, 효종 때 사간원 헌납(정5), (능주)목사를 지냈다. 족보 방주에는 세자 시강원 필선·보덕, 좌부빈객(종2)을 지냈다하였으며, 능주 목사를 마친 후 1675년(숙종1) 졸하신바, 특사(特賜)로 예장(禮葬)하니 묘소가 금산군 복수면 목소리에 있다.

 

2. 임진왜란과 선산임씨

 

주지하다시피「임진왜란」은 30만 대군을 준비한 일본군이 1592년(선조25) 임진년 4.13 17만 병력의 대군을 9개부대로 편성해 조선을 침공하기 시작한 후 1598년(선조31) 11.27 전군이 퇴각 완료할 때까지 7년간 조선의 강토를 짓밟고 백성들을 능욕한 대 전란이었습니다.

이 왜란이 일어나자 우리 선산임씨 선조와 척족들 중 전투에 참가하거나 창의(倡義)에 가담하여 국난극복의 최전선에서 싸우신 분들이 계십니다. 이제 족보와 역사기록 등을 참조하여 그 사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임란 창의(倡義) 참전 주요인물 및 그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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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참전 인물들의 사적

1) 임극성(克惺)(1567 명종22~1631 인조9)

구령공의 손자이고 완(浣)의 자이다. 호를 월담(月潭)이라 하였다. 주부를 지냈다. 임란이 일어나자 집안아이들과 노복(奴僕)들을 이끌고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연안·행주·진주 등지의 전투에 참전 승전을 도왔다. 이어 이순신장군의 막하에 들어가 흥판유사(興販有司)에 임명되어 군수물자를 온힘으로 조달 완도 고금도 진지로 조수(漕輸-배로 실어 나름)하였다. 1598년 무술년 10. 4 전란이 끝나갈 무렵 순천 왜교성(倭橋城) 전투에서 적선을 대패시키고, 동월 9일 아침에도 승승장구 하였다.

 

* 이순신과 고금도 및 왜교성 전투-임란 발발 1년 전인 1591.2.13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로 약칭)에 제수 된 이순신은 여수 본영에서 전쟁에 대비하였다. 1592.4.13 임란이 일어난 후 5.7~5.8 옥포·합포·적진포에서 왜군을 처음으로 격파한(흔히「옥포승첩」으로 알려져있다) 이순신은 이후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593.8.30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조선수군을 지휘하였다.

 

강화회담의 결렬로 1597.1.5 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이순신은 1.27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 모진 국문을 당하였다. 정탁의 구명노력으로 4.1 겨우 석방 권율의 휘하로 내려가 백의종군하고 있던 차 7.16 원균(후임삼도수군통제사)이 거제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자 8.3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하였다.1597.9.16. 명량해전에 대승을 거둔 후 1598.2.17 진을 목포 보화도에서 완도고금도로 옮기고 수군재건에 진력하였다. 이때 중요한 임무가 군량미 등 군수물자 조달·운송이었다.한편 1597.8.25 전주성을 함락하였던 일본 좌군은 8.28 주력군이 순천으로 남하 왜교성을 구축한다. 1598.9.20~10.9 조명연합군(이순신·진린·유정)이 순천 왜교성을 공격 왜군의 퇴로를 봉쇄하였으며 11.19 조명연합군은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순신이 순국하였으며, 11.27 전왜군의 퇴각 완료로 7년 간의 왜란이 끝난다.

 

당포·남해·부산·거제 등지의 전투에서 적들을 참획(斬獲)함이 심다(甚多) 하였다. 이에 금계군 박동량(구령공의 외손자. 임란 때 병조좌랑으로 선조의 의주피난길을 호종함)과 석담 유형(역시 구령공의 외손자. 이순신 다음다음의 삼도수군통제사)이 합하여 임금께 계(啓)를 올린바,“임극성의 힘쓴 공적이 장적(壯蹟)하여 김응서 (임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방어사로 임명되어 명제독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다시 전라병마절도사가 되어 권율과 함께 남원의 토적을 소탕하였다.) 와 다를 바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관직을 내렸으나 굳이 사양하며 아뢰기를“저에게 공이 있다면 부모에게 그 영예를 주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임극성은 충효를 겸전하였다”하고 3대를 특별히 추증하면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이 이야기가 유형이 쓴 글에 있다고 족보가 전한다.『호남지(湖南誌)』 (1935)에도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박동량과 유형은 극성공의 고종4촌)

 

2) 임걸(傑)(1574 갑술 선조7~1614 갑인 광해6)

우리공의 5세손이다. 선조21년(1588 만력 무자) 무과에 급제 후 선전관을 지내셨는데, 임란 때 창의에 가담 용만(龍湾)에서 적병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워 훈련원 주부(主簿)를 배수하시고, 통정대부병마절제사에 올랐다고 족보가 전한다.(1855『을묘보』) 무공을 기려 호를 충의(忠義)라 칭하였다.1934년 후손 태익(秦翊)께서 쓰신 공의 행장에는 재종숙 월담공 극성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가하신 일 등 조금 자세한 사적이 소개되어 있다.

 

3) 임능복(能福) (1577 선조10 정축~1600 선조33 경자)

구령공의 손자이고 완의 자이다. 극성의 동생으로 고성입향조가 된다. 족보가 전하기를, 아명을 만복(晩福)이라 하였다니 늦둥이로 태어나신 듯하다. 어릴 때부터 용감하고 힘이 세었다하며 임란을 당하여 창의(倡義)에 가담 공을 세워 원종공신 가선대부 우림위장을 배수하였다고 한다. 특기할 것은 능복공께서 입향한 곳으로 알려진 경남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는 예전에 연화동으로 불렸는데 역사서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적진포(積珍浦)라 불린 포구로서 임진왜란 때 첫 전승지였다.(이순신의 승전보에는 적진포(赤珍浦)로 나온다.)

 

즉 1592.4.13 임란 발발 후 이순신이 여수를 출발 처음으로 출전하여5.7~5.8 옥포·합포·적진포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첫 승전 보고를 올렸던 바로 그 전투지의 한곳이다.(일반적으로 첫 승전이 옥포해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승전보고 장계의 제목이〈옥포파왜병장〉인 때문이며, 장계의 내용에는 이 3지역을 합쳐 첫 승전으로 하고 있다.) 임란 후 광해11년(1619) 남촌진(南村鎭)이 인근 도선에서 이곳으로 이설되어‘남촌’으로도 불린다.(필자 임용원의 고향) 족보에 어릴 때 고성으로 갔다고 쓰여 있으나, 임진왜란의 제반 경과와 백형극성의 행적에 비추어 보면 공의 고성 입향은 어릴 때가 아니라 백형을 따라남해안 전투에 참가한 후 적진포 즉 연화동에 그대로 정착하신 듯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장에서 만난 분 중 경주김씨 무사(金懋師)분이 계셨는데 그 분의 사위가 됨으로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4) 임극협(克協)

억령공의 손자이고 찬(澯)의 자이다. 족보에 의하면, 무과에 급제하고 부장(部將)이셨다하며, 충무공 이순신의 계(啓)에 공을 유력 전공자(戰功者)라 한바, 이 글이 선조32년(1599) 12.16 예조승전록(禮曹承傳錄)에 전한다 한다.

 

5)임광안(光顔)(1539 중종34~1592 선조25)·광민(光閔)(1558 명종13~1592)

기령공의 손자이고 홍(泓)의 자(장남·3남)이다. 족보(1821 신사보, 1855 을묘보)에 의하면, 광안은 만력4년 (1575 선조9) 무과에 등제하고 권지훈련원 봉사(奉事)·수의부위(修義副尉)(종8)·만호를 지내셨고 임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전투에 임하여 힘껏 싸우다 죽산에서 전사하셨다 하며, 동생 광민 또한 무과 후 선전관으로 백형과 함께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셨다 한다.(죽산-안성시 소재 임란 초기 전투지)

 

6) 정운(鄭運)(1543 중종38~ 1592 선조25)

영암출신으로 우원공의 사위 정응정(훈련참군)의 자이다. 1570년(선조3)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금갑도 수군권관·거산(居山)찰방을 거쳐 웅천현감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591년 녹도(고흥군 도양읍 봉암리)만호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서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을 주장하였다.1592년 5.1 이순신이 휘하 장병들을 좌수영 앞바다에 집결시키고 진해루에서 경상도 출전에 대한 토론을 벌였을 때, 정운이“적군을 치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있소? 영남을 내버려두어 오늘에 다 무너지고 나면 내일의 우리일은 또 어떻게 할 것이오? 적이 울타리 밖에 있을 때는 막기가 쉽지만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오고나면 일이 어려워지는 것이오. 영남은 호남의 울타리이고 울타리가 무너지고 나면 여기도 보전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군병을 몰고나가 한편으로 영남을 돕고 또 한편으로 호남을 보호해야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정운의 말을 들자 이순신은 크게 소리 높여 출전을 선언하였다. 옥포·당포·한산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9월의 부산포해전에서 우부장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정운이 순국한 곳이 몰운대(沒雲台) 앞바다인데, 이곳이 몰운대라는 말을 듣고 雲자와 자기이름의 運자가 동음이라며 “내가 이 대에서 죽을 것이다.”하였다 한다. 이순신은 정운을 잃은 것이 못내 애석해 여수 본영으로 돌아와친히 정운을 제사하는 글을 지어 바쳤다. 그리고 이대원 사당에 같이 모시기를 청하는 장계를 올려 선조의 허락을 받았다. (이대원의 사당은 흥양 즉 지금의 도양읍에 있다.)

 

7) 임발영(任發英)(1539 중종34~1593 선조26)

해남출신으로(본관 장흥) 천령공의 사위 임희성(진도군수)의 차자이다. 1568년 선조원년 사마시에 급제한 후 남행선전관을 제수 받았다. 임란 때 종묘서(宗廟署) 영(令)이었는데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가니 임금이“하늘이 임발영을 낳아 내 사직신이 되었다.”고 그의 팔에 써 주고, 그날로 그에게 무과 시험을 보게 하여 급제 후 안주목사를 제수하였으며 이듬해는 운량사(運糧使)로 군량수송에 공을 세웠다. 뒤에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고 예양군(汭陽君)에 봉해졌다.

 

8) 고경신(高敬身)·경형(敬兄) 형제

장흥인으로 억령공의 사위 고맹영(대사간 이조참의 등 역임)의 자들이다.

이들의 이복형이 고경명(高敬命)(1533 중종28~1592 선조25)이다. 고경명(모친은 남평서씨)은 억령공의 제자로서 1558년(명종13)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후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하는 문제로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직되었는데 고향으로 돌아와 한가로이 지내다가 1581년(선조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된 후 명사원접사종사관·예조정랑을 지내고 순창군수로 재직 중 1588년(선조21) 또 파직되었다. 1590년 1월(선조23) 승문원판교로 다시 등용된 후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가 또 다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을 모으고 두 아들 종후(從厚)·인후(仁厚)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 수원에서 항전하고 있던 광주목사 정윤우에게 인계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전 나주부사 김천일, 전 정언 박광옥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천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하였는데 여기에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6.1 북진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전주·여산·은진 등지에서, 영남 쪽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는 왜적을 막는데 주력하고,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함께 금산의 왜적을 공격할 것을 제의하고 7.10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와 더불어 순절하였다.경신·경형 형제들(모친이 억령공의 서녀)은 이복형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키자 조카 종후를 따라 의분 참전하였는데, 경신은 격문을 가지고 제주도로 가다가 바다에서 순몰 하고, 경형은 진주전투에서 순절하였다.(장흥고씨족보 참조)

 

9) 임환(林懽)(1561 명종16~1608 선조41)

나주인으로 구령공의 장자 호(浩)의 사위이다. 백호 임제(林悌)의 동생이다.선조23년(1590) 진사시에 합격 후 임란이 발발하자 오종도(吳宗道)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무주부사·직산현감·문화현령을 지냈다.(나주임씨족보) 이순신의『난중일기』를 보면 1597년 정유년 11.15 임환과 윤영현이 찾아왔다고 쓰여 있다. 나주임씨 족보에 의하면, 그의 두 번째 부인 제주 양씨는 임란을 맞아 일가가 피난을 가는데 바다에서 적병을 만나자 적장을 속여 일가는 화를 면하게 하고 자신은 바닷물에 빠져 의를 지키고 순절하였다한다. 숙종 때 특명으로 정려각을 세웠다한다.

 

10) 유형(柳珩)(1566 명종21~1615 광해7)

구령공의 사위 유용(柳溶)(경원부사)의 자이다. 본관이 진주 호는 석담(石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 김천일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같이 강화까지 가 활동하다 의주행재소에 가서 선전관이 되었는데 이순신의 군중(軍中)으로 칙사로 가기도하였다. 임란 중 1594년 전주에서 시행된 별시 무과에 급제 다시 선전관이 되었다가 임란 때 설치된 훈련도감의 초관(哨官)(종9품의 초급장교)을 거쳐 1595년 해남현감으로 나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거제 칠천량해전에서(7.16) 원균이 대패한 후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였을 때(8.3) 이순신의 막료가 되어 수군재건에 진력하고 적극 도왔다.(이때 이순신은 전라 쪽에 있었는데 8.19 장흥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한테서 남은 배 12척을 인수받고 나중에 명량해전에서 대승한다)

 

1598년 순천 왜교성 전투 등에 참가하고 특히 노량해전에서 분전한바, 이순신이 전사하고 공도 적탄을 맞았으나 다행히 살아났다. 승전의 공으로 부산진첨절제사에 발탁되고 바로 경상좌수사로 승진하였다. 1600년 충청도 수사(수군절도사), 1601년 전라도 우수사를 거쳐 1602년 5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초대·3대 이순신, 2대 원균, 4대 이시언) 이후 충청병사(병마절도사), 회령부사, 북도병사, 경상좌도 병사, 평안병사를 거치고 황해병사 때 졸하니 세수 50이었다. 후손이 그의 시문과 행장 등을 모아 편수한 유고집『석담유고』에 공과 동시대인이요 이종사촌인 박동량(선조의 의주피난 때 병조좌랑으로 호종)이 공의 행적을 자세히 쓴『행장』이 실려 있다.(유형과 박동량은 구령공의 외손)

 

 

권율의 행적-권율은 영의정 권철(구령공의 초상화를 보고 상찬의 글을 남긴 분)의 아들이고 장인이 이항복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592. 5. 2 한양이 함락된 뒤 전라도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이 되어 서울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하였다. 용인에서 이광이 무모한 공격을 펼쳐 대패하고말았는데 권율은 광주로 퇴각 후사를 계획하였다. 그 후 남원에서 1천여 명의 의군을 모집 7월초 금산 이치(梨峙)에서 왜병을 격퇴 호남을 보존하였다. 그 공으로 곧 전라감사로 승진하였으며 12월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올라 수원 독산산성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 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하여 도성수복작전을 펴기 좋게 행주산성을 택하여 진지를 구축한바, 1593.2.12 공격해오는 왜군을 격퇴 대승을 거두고 4.20 이여송과 함께 한양에 입성하였다. 이 공으로 동년 6. 6 도원수를 제수 받아 영남등지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후 호조판서.충청관찰사 등을 거쳤으나 1597.1.15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재차 도원수가 되어 전란을 지휘하였다.

김응서-임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방어사로 임명되어 명제독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다시 전라병마절도사가 되어 권율과 함께 남원의 토적을 소탕하였다.

월담공의 행적과 유형의 글-유형의 후손 석우가 행장·시문 등을 모아 1935년『석담유고(石潭遺稿)』를 편수한바 있는데 1969년 기정이 정식으로 발간하였으며 1976년 유근창이 주요후손의 행장 등을 포함 국역으로 간행하였다. 월담공의 행적기록을 살펴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유기정의 발문에 의하면 소(疎)·장(狀)등 국가기록은 모두 찾아 싣지 못하였다고 하고 있음으로 보아월담공의행적은 별도 기록에 있을듯하다.

임걸공의 휘(諱)와 계보-병진보(1916)가 공의 휘를「극걸(克傑)」로 고쳐 불렀는데, 이를 따라 1935년(소화10) 간행된『호남지』에「극걸」로 나온다. 그러나 이『호남지」에는 임걸(林乞)이란 분도 소개되어 있는데 그 사적이 같다. 이로보아 공의 휘는 구보대로「걸(傑)」이 맞는 듯하다.(1956 병진보·1977 정사보가「극걸」로 하였으나 1995년 을해보가「걸」로 바로 잡았다) 덧붙여, 우리공의 계보가 구보(최초 병술보1766~4차 신묘보1891)에서는 우리(遇利)-훤(萱)-형(氵冏)-거손(擧遜)-걸(傑)-득의(得義)였는데, 1916년 병진보 때 우리-일령(壹齡)-형(泂)-극걸-거손으로 바꾸었고 병신보(1956)·정사보(1977)가 뒤따랐다. 그러다가 1995년 을해보 때 우리-일령-형(泂)-거손-걸로 조정하였다. 그러나 우리공 자와 손의 휘에 관하여는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공의 졸년-을묘보(1855)는 선조37년 갑진(1604)이라 하였는데 1956년 병신보 때 광해 6년 갑인(1614)으로 바꾸었으며 1995년 을해보에서는 1614년 졸 향년 41세로 정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