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임씨씨족사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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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후인 임 종 필p002.png

善山林씨의 시조는 신라 중랑장 양저(良貯)이십니다.

따라서 선산 林씨의 역사는 장장 천년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공은 신라 말 경순왕이 려조(麗朝)에 귀부하려 할 때, 천년 왕업을 포기하는 것은 왕의 도리가 아니라고, 극구 간언한 만고충신(萬古忠臣)이었습니다.

따라서 선산 林씨의 중심에는 천사충절(千祀忠節)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500년 후 조선건국과 때를 같이하여, 중시조 만(蔓)께서 남락(南落)하시어, 전라도 영암 땅에 뿌리를 내리시면서, 그 자손이 근처 전라 서남지방은 물론, 경상·충청도 등 전국 각지에 널리 산거(散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善山林씨는, 시조와 중시조를 양대지주(兩大支柱)로 모시고, 마치 거대한 현수교(懸垂橋)처럼 남한 천지에 그 비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위의 시조설화에 약간의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즉 양저공께서 경순왕에게 극간한 후, 왕의 노여움을 사서, 즉시 선산으로 유배되었다는 설과, 고려 건국 후 왕건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 자손들을 각읍으로 내쳤(投居)는데, 그 중 선산에 투거 된 후손들이 善山林씨가 되었다는, 2가지 다른 설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① 양저공이 직접 선산으로 유배된 것이냐, 그 자손들이 투거된 것이냐 하는 문제와, ② 경순왕에 의해 유배된 것이냐, 왕건에 의하여 투거(유배)된 것이냐 하는 2가지 설이 이제까지 혼용(混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이것은「이중유배(二重流配)」의 모순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림 최초보인『병술보』(1766)에 실려 있는,「희재(百齡 백령)공 행장」에 이미 그 답이 명쾌하게 나와 있습니다. 즉 우리「시조설화」의 직접출처이기도 한 이 행장에,「고려 태조 왕건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그 자손을 여러 고을로 내쳤는데, 그 중 선산에 정착한 분들이 善山林씨가 되었다.」고 명기(明記)되어 있는 것입니다. 숙종 때 좌상 박세채가 찬한「석천공 임억령 묘표」에도 같은 취지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의식하지 못한 채 막연히 혼용하여 오던, 이러한 잘못과 그 원인을 규명하여 명쾌히 밝혀낸 이는, 고성(固城)파 용원(容源) 종인이며, 그 과정을 본문에 상세히 밝혀 놓았습니다.

 

중시조 만(蔓)조에 대해서도, 그 동안 막연히「남락(南落)…운운」하면서도, 누구도 그 출자(出自)를 밝히지 못하고 있었으며, 기왕에 발간된 8회의 족보(族譜)에서도, 일체 그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 林蘭根(난근)씨의 제보에 의하여, 蔓조의 출자가 개경(개성)이라는 사실(史實)이 밝혀진 것입니다. 즉『영암군지』의「우거(寓居)」란에「林蔓 我 太祖朝 自 開京 移寓 于 本鄕(임만 아 태조조 자 개경 이우 우 본향)」이라고 명기되어 있으며, 또한『영암향교지』와『영암향토지』에도 같은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와 같이 중시조의 출자가「개경(개성)」으로 밝혀짐으로써 우리 善山林씨의 주체성과 역사성이 한결 뚜렷해졌으며, 그 자세한 경위도 본문에 담고 있습니다.

 

한편(여느 성씨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조와 중시조 사이의 역사적 공간(약500년간)이 빈칸, 미지의 공간으로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 기간은 고려조의 전기간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최초보인『병술보』(1766, 영조42)에서도,「其間 不知爲幾代 而且 文獻可考(기간 부지위기대 이차 문헌가고)……」 즉“그 사이가 몇 대인지도 모르며, 또한 참고할 문헌도 없음으로”라고, 빈 공간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도 앞의 용원 종인의 노력으로, 위의 상계대의 빈 공간을 메워줄 징검다리적인 한두가지 사편(史片)을 발굴하였습니다. 즉 조선초기의 유명한 사학자인 善山人 金宗直(김종직)이 쓴『彛尊錄(이존록)』에 자기 선조의 가계(家系)를 밝힌「先公譜圖(선공보도)」가 있어, 여기에 善山金씨의 외척으로, 善山林씨가 나오고 있으며, 그 신분이 선산의 호장(戶長)으로 되어 있습니다. 호장이란, 그 당시 씨족의 우두머리로 그 지역의 지배자이며, 향리(鄕吏)로서, 신라시대의 고위신분 출신 가계임을 반증하는 것이며, 또한 그 직은 대대로 세습(世襲)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로써 우리 善山林씨는 고려시대에도 계속 선산의 유력한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고려사』와『일선지』에도 몇몇분의 林씨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빈공간의 추적 경위도 본문에 상세히 담았으며, 앞으로도 계속 추구할 것입니다.

 

 

 

본문편성에 있어서, 상계조의 소개는 억령(億齡)·백령(百齡)·구령(九齡)의 세분「삼령조(三齡祖)」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우리 善山林씨를 구축하고 가성(家聲)을 높이신 善山林씨를 대표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상히 밝혀 보이고자 한 부분이 괴마(槐馬) 임백령(林百齡)공에 관한 역사적 진실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괴마공께서는 우리 善山林씨의 기초구조를 조립하신 분입니다. 공께서는「정1품 숭선부원군(嵩善府院君)」으로 승차, 삼공(三公)의 자격(최고위직인 우상)으로,「명종의 승위(承位)에 대한 감사표시」라는 왕실의 중차대한 사신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도중, 타국(中國) 땅에서 장령(壯齡)의 나이로 애석하게 순직(殉職)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행적이나 신상에 대하여『조선왕조실록』정문(正文)의 행간에 후일 추기한 사관(史官)의 사평(史評)이나, 개인 문집의 평가기록에서 심히 폄하·훼손되어 있으며, 그 외 여러 역사서에서도 마찬가지 실정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그 직계 후손 뿐 아니라, 우리 善山林씨 전체에게도 심히 아쉬우며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리하여『명종실록』,『선조실록』등을 소위 韋編三絶(위편삼절-책 끈이 3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숙독하였다는 고사)의 노력으로, 글자 한자 한자 빼놓지 않고 세밀히 검토하고, 5년이란 긴 세월을 거쳐 완성한 것이「충헌 임백령공의 행적편」과 그 부록들입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주력한 곳은,「을사사화(乙巳士禍)」와「삭탈관작(削奪官爵)」조입니다. 소위「을사사화(乙巳士禍)」란 명종 승위(承位)에 즈음하여, 왕권의 안위를 위하여 인종과 명종의 각 외숙인 윤임(尹任)과 윤원형(尹元衡)이 대윤과 소윤의 양파로 갈리어 파쟁을 일으키는데, 이때 자기아들(明宗)의 안위를 위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직접, 대윤파의 사림(윤임, 유관, 유인숙등)을 처단한 정치적 사건이며, 후일 선조(宣祖)대에 이르러 사림들이 허물을 모두 임백령 등에게 물어「삭탈관작」의 비운을 맞게 됩니다.

 

이 사건을 본문에서 철저히 분석하여 밝혀두었습니다. 즉 임백령공이, 사림(士林)(대윤파)을 죽이자고 주장한 자구(字句)는 실록 본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영구(營救)하는 문구만 발견되는 것입니다(다만, 정문의 행간에 삽입된 사평에서만 온갖 폄훼하는 문구가 보인다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이글 본문에서 조목조목 세세히 따져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굳어져 버린 역사를 미력(微力)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으며, 다만 그 진정한 기록의 일부만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하는 충심(衷心)의 일념으로 이 작업을 감행한 것입니다.

 

혹 후일, 후세에 어느 형평(衡平)한 역사관을 가진 역사학도가 나타나서 「임백령에 대한 재조명」을 테마로 다루어 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이글을 남기고자 하는 목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조상에 대한 신설(伸雪)은 오직 그 후손들의 책무라고 생각하고 이를 완수하기 위함도 겸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가, 자손들에게도 널리 읽히고 알리어 위축됨이 없이 생활에 활력소를 고취하기 위한 목적도 겸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혹자가, 만일「임백령 운운」하고 욕하고 폄하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단연코“왕조실록을 한번이라도 읽어보았느냐”고 따질 것입니다. 물론 본고가 완전무결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후일 후손들의 보다나은 천착과 보충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임종필(林鍾弼)종인 이력

* 선산임씨 강진파(종(宗)파)

* 1929년 기사생

*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졸

* 농협중앙회 차장, 강화지부장 등 역임

* 2016년 작고

 

 

선산후인 임 종 필p002.png

善山林씨의 시조는 신라 중랑장 양저(良貯)이십니다.

따라서 선산 林씨의 역사는 장장 천년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공은 신라 말 경순왕이 려조(麗朝)에 귀부하려 할 때, 천년 왕업을 포기하는 것은 왕의 도리가 아니라고, 극구 간언한 만고충신(萬古忠臣)이었습니다.

따라서 선산 林씨의 중심에는 천사충절(千祀忠節)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500년 후 조선건국과 때를 같이하여, 중시조 만(蔓)께서 남락(南落)하시어, 전라도 영암 땅에 뿌리를 내리시면서, 그 자손이 근처 전라 서남지방은 물론, 경상·충청도 등 전국 각지에 널리 산거(散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善山林씨는, 시조와 중시조를 양대지주(兩大支柱)로 모시고, 마치 거대한 현수교(懸垂橋)처럼 남한 천지에 그 비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위의 시조설화에 약간의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즉 양저공께서 경순왕에게 극간한 후, 왕의 노여움을 사서, 즉시 선산으로 유배되었다는 설과, 고려 건국 후 왕건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 자손들을 각읍으로 내쳤(投居)는데, 그 중 선산에 투거 된 후손들이 善山林씨가 되었다는, 2가지 다른 설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① 양저공이 직접 선산으로 유배된 것이냐, 그 자손들이 투거된 것이냐 하는 문제와, ② 경순왕에 의해 유배된 것이냐, 왕건에 의하여 투거(유배)된 것이냐 하는 2가지 설이 이제까지 혼용(混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이것은「이중유배(二重流配)」의 모순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림 최초보인『병술보』(1766)에 실려 있는,「희재(百齡 백령)공 행장」에 이미 그 답이 명쾌하게 나와 있습니다. 즉 우리「시조설화」의 직접출처이기도 한 이 행장에,「고려 태조 왕건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그 자손을 여러 고을로 내쳤는데, 그 중 선산에 정착한 분들이 善山林씨가 되었다.」고 명기(明記)되어 있는 것입니다. 숙종 때 좌상 박세채가 찬한「석천공 임억령 묘표」에도 같은 취지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의식하지 못한 채 막연히 혼용하여 오던, 이러한 잘못과 그 원인을 규명하여 명쾌히 밝혀낸 이는, 고성(固城)파 용원(容源) 종인이며, 그 과정을 본문에 상세히 밝혀 놓았습니다.

 

중시조 만(蔓)조에 대해서도, 그 동안 막연히「남락(南落)…운운」하면서도, 누구도 그 출자(出自)를 밝히지 못하고 있었으며, 기왕에 발간된 8회의 족보(族譜)에서도, 일체 그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 林蘭根(난근)씨의 제보에 의하여, 蔓조의 출자가 개경(개성)이라는 사실(史實)이 밝혀진 것입니다. 즉『영암군지』의「우거(寓居)」란에「林蔓 我 太祖朝 自 開京 移寓 于 本鄕(임만 아 태조조 자 개경 이우 우 본향)」이라고 명기되어 있으며, 또한『영암향교지』와『영암향토지』에도 같은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와 같이 중시조의 출자가「개경(개성)」으로 밝혀짐으로써 우리 善山林씨의 주체성과 역사성이 한결 뚜렷해졌으며, 그 자세한 경위도 본문에 담고 있습니다.

 

한편(여느 성씨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조와 중시조 사이의 역사적 공간(약500년간)이 빈칸, 미지의 공간으로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 기간은 고려조의 전기간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최초보인『병술보』(1766, 영조42)에서도,「其間 不知爲幾代 而且 文獻可考(기간 부지위기대 이차 문헌가고)……」 즉“그 사이가 몇 대인지도 모르며, 또한 참고할 문헌도 없음으로”라고, 빈 공간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도 앞의 용원 종인의 노력으로, 위의 상계대의 빈 공간을 메워줄 징검다리적인 한두가지 사편(史片)을 발굴하였습니다. 즉 조선초기의 유명한 사학자인 善山人 金宗直(김종직)이 쓴『彛尊錄(이존록)』에 자기 선조의 가계(家系)를 밝힌「先公譜圖(선공보도)」가 있어, 여기에 善山金씨의 외척으로, 善山林씨가 나오고 있으며, 그 신분이 선산의 호장(戶長)으로 되어 있습니다. 호장이란, 그 당시 씨족의 우두머리로 그 지역의 지배자이며, 향리(鄕吏)로서, 신라시대의 고위신분 출신 가계임을 반증하는 것이며, 또한 그 직은 대대로 세습(世襲)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로써 우리 善山林씨는 고려시대에도 계속 선산의 유력한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고려사』와『일선지』에도 몇몇분의 林씨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빈공간의 추적 경위도 본문에 상세히 담았으며, 앞으로도 계속 추구할 것입니다.

 

 

 

본문편성에 있어서, 상계조의 소개는 억령(億齡)·백령(百齡)·구령(九齡)의 세분「삼령조(三齡祖)」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우리 善山林씨를 구축하고 가성(家聲)을 높이신 善山林씨를 대표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상히 밝혀 보이고자 한 부분이 괴마(槐馬) 임백령(林百齡)공에 관한 역사적 진실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괴마공께서는 우리 善山林씨의 기초구조를 조립하신 분입니다. 공께서는「정1품 숭선부원군(嵩善府院君)」으로 승차, 삼공(三公)의 자격(최고위직인 우상)으로,「명종의 승위(承位)에 대한 감사표시」라는 왕실의 중차대한 사신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도중, 타국(中國) 땅에서 장령(壯齡)의 나이로 애석하게 순직(殉職)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행적이나 신상에 대하여『조선왕조실록』정문(正文)의 행간에 후일 추기한 사관(史官)의 사평(史評)이나, 개인 문집의 평가기록에서 심히 폄하·훼손되어 있으며, 그 외 여러 역사서에서도 마찬가지 실정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그 직계 후손 뿐 아니라, 우리 善山林씨 전체에게도 심히 아쉬우며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리하여『명종실록』,『선조실록』등을 소위 韋編三絶(위편삼절-책 끈이 3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숙독하였다는 고사)의 노력으로, 글자 한자 한자 빼놓지 않고 세밀히 검토하고, 5년이란 긴 세월을 거쳐 완성한 것이「충헌 임백령공의 행적편」과 그 부록들입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주력한 곳은,「을사사화(乙巳士禍)」와「삭탈관작(削奪官爵)」조입니다. 소위「을사사화(乙巳士禍)」란 명종 승위(承位)에 즈음하여, 왕권의 안위를 위하여 인종과 명종의 각 외숙인 윤임(尹任)과 윤원형(尹元衡)이 대윤과 소윤의 양파로 갈리어 파쟁을 일으키는데, 이때 자기아들(明宗)의 안위를 위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직접, 대윤파의 사림(윤임, 유관, 유인숙등)을 처단한 정치적 사건이며, 후일 선조(宣祖)대에 이르러 사림들이 허물을 모두 임백령 등에게 물어「삭탈관작」의 비운을 맞게 됩니다.

 

이 사건을 본문에서 철저히 분석하여 밝혀두었습니다. 즉 임백령공이, 사림(士林)(대윤파)을 죽이자고 주장한 자구(字句)는 실록 본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영구(營救)하는 문구만 발견되는 것입니다(다만, 정문의 행간에 삽입된 사평에서만 온갖 폄훼하는 문구가 보인다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이글 본문에서 조목조목 세세히 따져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굳어져 버린 역사를 미력(微力)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으며, 다만 그 진정한 기록의 일부만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하는 충심(衷心)의 일념으로 이 작업을 감행한 것입니다.

 

혹 후일, 후세에 어느 형평(衡平)한 역사관을 가진 역사학도가 나타나서 「임백령에 대한 재조명」을 테마로 다루어 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이글을 남기고자 하는 목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조상에 대한 신설(伸雪)은 오직 그 후손들의 책무라고 생각하고 이를 완수하기 위함도 겸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가, 자손들에게도 널리 읽히고 알리어 위축됨이 없이 생활에 활력소를 고취하기 위한 목적도 겸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혹자가, 만일「임백령 운운」하고 욕하고 폄하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단연코“왕조실록을 한번이라도 읽어보았느냐”고 따질 것입니다. 물론 본고가 완전무결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후일 후손들의 보다나은 천착과 보충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임종필(林鍾弼)종인 이력

* 선산임씨 강진파(종(宗)파)

* 1929년 기사생

*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졸

* 농협중앙회 차장, 강화지부장 등 역임

* 2016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