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당(月堂) 임구령(林九齡)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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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구령(林九齡)영정 영암군 서호면 청룡리 영당 봉안 본 영정은 세번째로 그려진 것이며 최초의 원본(후손 태열 소장)은 약 450년 전의 것으로 전남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유품임. |
1. 공은 1501년(연산 7) 신유 5월 25일생으로 석천공보다는 5세, 희재공보다는 3세 연하이며 호를 월당(月堂)이라 하였습니다. 남원 부사로 재임 중 병환으로 1562년(명종 17) 11월 26일 타계하시었습니다.공의 인품을 살펴보면, 형인 석천공이 직접 찬(撰)한「목사공행장」에서
“공의 인품이 활달하고 매사에 강경 단호하며 수염이 아름답고 길어서 허리까지 드리우고…”하였으니 그 성격이 강직 단호하고 그 용모가 수려고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최초 족보에서는「목사공」으로 칭하였습니다.) 공이 관직 재임 중 초상화를 그렸는데 권철(權轍)(공과 같은 형조정랑을 지낸바 있고, 후에 3정승까지 지냄. 권율 장군의 부)이 남긴 상찬(賞讚)의 글을 보면“천성이 곧고 인품이 호걸이라 영매(英邁)한 기상이 세상을 덮는듯하구나. 효와 덕을 갖추고 충으로 공을 세웠으니 그 초상도 위풍 있고 굳센 모습이라 나같이 미천한 사람을 숙연케 하네”라고 읊고 있습니다.
2. 형제간의 정리(情理)가 두터웠고 치산(治産)경영에 밝으셨습니다.
석천공이 그의 행장에서“큰형수(천령공의 부인)와 계매(季妹)(朴伯凝박백응의 모친)가 홀로되어 빈궁하므로 공이 부모로부터 받은 자기 전답과 노비를 나누어주고……”라고 하고 있고,“나(석천공)에게 치산이 서툴다하여 그 농지를 할애하여 10여 섬지기를 나에게 주니, 사람이 하기는 어려운 일을 이렇게 하였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중형(仲兄) 백령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길에 중국 땅 영평(永平)에서 돌연 서거하니 호상을 명령받아(1546 명종 1년 7월 20일) 수천리길을 운구 호송하였습니다. 또한 말년(58세)에는 진남대제(鎭南大堤) 잠두(蠶頭)위에 쌍취정(雙醉亭)을 짓고 석천공과 함께 고기 잡고 거문고 타고 술에 흥취하여 세사를 잊고 형제의 우의를 다졌다고 합니다.
◇ 쌍취정(雙醉亭)
옛「쌍취정」이 있었던 곳은「모정마을」이라 불리는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입니다. 공이 조성한「지남뜰」의 저수지 위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뜰이 내려다보이면서 멀리 우뚝한 월출산의 웅자를 바라볼 수 있는 명지입니다. 정자 바로 아래가 뜰을 위해 조성된 저수지로 지금은 한쪽에 연꽃이 무성하여 연못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월출산 봉우리사이로 해와 달이 떠오를 때 연못의 잔잔한 물결과 어우러지면서 그 광경이 온유하고 그윽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영암최고의 해맞이/달맞이 명소로 알려진 곳입니다.
「요월당」을 중수한 바 있는 공의 외손 박동열(朴東說) (1564~1622) 이 광해6년(1614) 7월에 쓴「쌍취정기」가 족보에 전하는데 그 내용 중「쌍취정」을 짓게 된 경위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박동열은 월당공의 사위 박응복의 둘째 아들)
월당공이 지남뜰을 조성하고 나서“한쪽에는 못을 파고 한쪽에는 정자를 지어 못에는 연꽃을 심고 고기를 키워서 운치를 더하였는데 정자는 처음에 요(堯)임금의「모자불치(茅茨不侈)」(지붕을 띠로 이어 사치스럽지 않게 함 ) 고사의 뜻에 따라「모정(茅亭)」이라 하였다가 다시「쌍취정(雙醉亭)」이라 고쳐 불렀다. 이는 형제지간에「훈지공락(塤篪共樂)」의 이치를 따르고자 함이어라. 즉 형은 훈(塤) 나팔을 불고 아우는 지(篪) 피리를 불며 형제가 서로 화목동락한다는 『시경(詩經)』의 교훈을 따르고자 함이라.
못이 정자를 얻고(池得亭지득정) 정자가 연못을 얻은 듯(亭得地정득지) 두가지의 아름다움이 서로를 드러내어(二美相稱이미상칭) 볼수록 아름답다(看看益佳간간익가). 들에서는 농부들이 격양송(擊壤頌-농부가 태평한 세월과 고마움을 읊는 소리)을 부르며 공을 칭송하고 정자에서는 멀리서 임금을 사모하여 우러르면서 거문고로 스스로를 즐기며 노년을 마치고자함에 화려한 세월과 태평한 세상을 이 정자에서 가히 얻었다 할 것이다.” 이「쌍취정」은 세월이 흘러 관리가 어려웠던지 그 이유를 상고할 수는 없으나 천안 전(全)씨 문중이 인수하여 인근 엄길마을(서호면 엄길리)로 옮겨짓고 이름도「수래정(修來亭)」으로 바꾸었습니다. 지금보아도 옛정취가 물씬한 품격 있는 정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모정마을에서는 옛 쌍취정의 재건을 추진 중이라고 함)
※ 박동열(1564~1622)-광해3년(1611) 7월 30일 나주목사에 피임. 광해5년 6월 실록기사에도 나주목사로 나옴. 광해6년에「쌍취정기」를 쓴 것으로보아 몇년간 나주목사로 재임한 듯함. |
3. 환로(宦路-벼슬길)와 행적을 살펴보면,
1) 공의 행장에 밝혔듯이「어렸을 때 학업이 여의치 못하고 무예도 이루지 못하여」항상 남에게 말하기를“대장부가 하필 과거를 거쳐야 출신(出身)할 수 있단 말이냐”하고 사랑채를 크게 지어 4마리 말로 끄는 높은 수레가 출입할 수 있게 하여“후일에 반드시 내방자가 있을 것이다.”하여 자부심이 대단하셨으니 일찍이 문과를 버리고 다른 길을 모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25세 때 문음(門蔭)으로 사산감역(四山監役)이 되고 다음해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별제(別提)가 되었으며
※ 문음-부(父)·형(兄)등 가문의 관덕(官德)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을 말함. 이 해(1525 중종 20)에는 형 억령공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백령공은 내청요직 을 거쳐 남평현감 이었음.
※ 사산감역-조선시대 군직(軍職)으로 감역관(監役官)(6품) 4명을 두어 동서남 북의 4山을 맡아 감독케 하였음
※ 수성금화사-궁성·도성·도로·교량의 수축과 소화(消火)를 관장하는 관청. 별제는 종5품의 벼슬
3) 36세 때 고향인 영암 구림(鳩林)마을 구저(旧邸)곁에 요월당(邀月堂)을 건축하여 여러 시인 명현들이 출입 시를 수창(酬唱)하였고 40세에 그 유명한 진남언(鎭南堰)을 축조하게 됩니다. 요월당과 진남언 등에 관하여는 뒤에서 상술하겠습니다.
4) 「구령(九齡)」의 이름이 처음『왕조실록』에 나타난 것은 공이 45세 때인 1545년 명종즉위년 9월 1일이었으니 즉, 형 백령이“4등 공신으로 되어있는 구령 등을 3등으로 승훈하여 달라”고 왕에게 주청하는 기록입니다. 그 후 9월 15일 다시 백령의 주청으로「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 2등(二等)」으로 녹훈되었으며, 곧
• 공신도감낭청(功臣都監郎廳)
•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
• 장흥고령(長興庫令)(종5)
• 형조정랑(刑曹正郞)(정5)
•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종5)
• 제용감 첨정(濟用監 僉正)(종4)등으로 1년 미만에 승차를 거듭하였습니다.
공이 형조정랑(刑曹正郞)임을 입증하는「추관계회도축(秋官契會圖軸)」이 발견되었으니, 이것은 당시 추관(秋官)(형조刑曹출신)들의 계모임을 그려서 각자 나누어 소장한 희귀자료로서 지금으로 말하면「합동기념사진」쯤 되는 것으로『을해보』(1995)편찬 당시 고 임완회(林完會)씨가 구하여 제공한 것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보면 이와 똑같은 형식으로 된「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가나오는데, 1531년(중종 26) 경 그려진 이 계회도를 보면 백령공이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의 그림입니다. 즉「희재(希齋) 임백령(林百齡) 인순(仁順) 숭선인(嵩善人) 생우홍치무오(生于弘治戊午) 경진하(庚辰夏) 사가(賜暇)……부(父) 충순 휘 우형(忠順 諱 遇亨)」으로 나와 있으며, 계원으로서는 장옥(張玉), 허자(許磁), 송인수(宋麟壽), 송순(宋純), 주세붕(周世鵬), 임백령 등 12명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임백령공편에서 상술)
5) 형 백령공이 중국사신의 귀국길에 중국 땅 영평부(永平府)에서 급서(急逝)(명종1년 6.29)함에 절충장군(折衝將軍)(정3 당상관) 행(行) 부호군(副護軍)의 직함을 제수 받고 호상(護喪)의 임무를 맡아 이를 마친 후, 그 해에
• 남양도후부사(南陽都護府使)(종3)
• 광주목사(光州牧使)(정3)
• 홍주목사(洪州牧使)(정3)를 지내고
• 공신중삭연(功臣仲朔宴)(1560 명종 15)에 초대된 뒤 마지막으로
• 남원도후부사(南原都護府使)(종3)에 제수되었으며 재임 중 병환으로 졸(卒)하였습니다.
참고로 옛 족보에 공의 직함을 보면「광·나주 목사 겸 나주진관첨절제사(光·羅州牧使 兼 羅州鎭管僉節制使)」로 되어 있는데, 왕조실록에 나주목사 제수사실은 없으며,「나주진관병마첨절제사」는 광주목사가 반드시 겸하게 되어 있는 직책이며, 뒤에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역임하였으므로「광·홍주 목사(光·洪州牧使)」의 호칭이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 관직명은 왕조실록, 경국대전의 규정 등을 참고하면「증(贈)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선산군(資憲大夫 戶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善山君)」이 옳은 관직명입니다.
『경국대전』(호조편)에“친공신은 사후(死後) 비록 낮은 직에 있던 자라도 정2품을 추증”하며“모두 군을 봉한다.”라는 규정에 의하여 공이 생존 시 「통정대부 광주목사」(정3품)에서「자헌대부 호조판서」(정2품)직으로 추증되고「선산군」으로 봉해진 것입니다. 또 생존 시에 현직에「행(行)」자가 붙은 것은 공이「2등공신」(정2품 직급)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직책은「광주목사」(정3품)직에재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직급보다 낮은 관직에는「행(行)」높은 관직에는「수(守)」를 붙임)
과거 거제출신 종친께서“어렸을 때 우리는「공신파」의 손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는데 무슨 뜻이냐?”하기에 구령공이 2등공신임을 설명하였더니 비로소 납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려서 조상의 뿌리에 대하여 입으로 전해들은 교육은 마치 종교와 같은 것이어서 언제나 마음의 밑바닥에 깊이 잠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우리의 시조는 임양저공”이라고 굳게 믿어 내려온 윗대의 사실을 되새기게 합니다.
4. 공이 남원부사 재임 중 병환으로 서거(1562. 11. 26)하자 왕(명종)이 왕 18년(1563) 정월 30일에 예조좌랑 정철(鄭澈)을 파견하여 그 영위(靈位)에 치제문(致祭文)을 올려 제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이는 국왕이 국상(國喪)으로 상사를 다스리게 하는 것으로, 고관대작이나 대학자 또는 나라에 공이 큰 사람에 한하는 것으로서 매우 드문 일입니다. 공이 공훈을 받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중종 39년(1544) 11월 15일 중종이 승하하고 11월 20일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8개월만인 1545년(을사) 7월 1일 승하하게 되는데(당시 30세), 이어서 7월 6일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그 모친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됩니다. 이즈음 인종의 외척인 소위 대윤파와 명종의 외척 소윤파간에 권력다툼이 심하였는데 이러한 어수선한 정국 하에서 어린 임금의 집권초기에 불안정한 왕권의 기반을 다지고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는데 공을 세운 것입니다. (석천공이 쓰신 공의「행장」에 관련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의 인품과 공적을 추모하면서 왕이 직접 제문을 내려 보내 치제케 함은, 국왕으로 부터의 은전이자 가문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번역문은 다음과 같으며 명종의「어제치제문(御製致祭文)」원문과 그 주석은 따로 첨부하였습니다.(210~213쪽 참조)
왕이 지어 내리신 치제문(致祭文)
아아, 헤아리건대 세(歲)가 이어 내려와 가정(嘉靖)
42년(1563 명종 18) 계해년이 되어 정월 30일에,
국왕은 신하인 예조좌랑 정철(鄭澈)을 보내어
증 추성협익 정난위사공신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선산군이며, 그 직이 추성협익 정난위사공신 통정대부
광주목사 나주진관병마첨절제사 홍주목사 남원도호부사인
임구령의 영위(靈位)에 오로지 이 분을 생각하면서
그 죽음을 애도하는 제사를 올리며 이르노니,
그 기품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고, 그 정령(精靈)이
온 산악에 종(鐘)을 울리는 도다.
남녘 땅 끝에서 재질을 쌓고 서울에서 때를 기다렸네.
몸은 비록 하급직에 있었으나 마음은 오직 왕실의 안위에 있었네.
지난 갑진·을사년에 이성(二聖 - 인종·명종)이 계속 옥좌에
올랐으나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고 나라는 위태롭고
적신(賊臣)들은 역모를 꾀하며 변고가 조석으로 일어나서
종묘사직이 위기일발에 이르도다.
자성(慈聖)(대비-문정왕후)이 울부짖고
어린 임금(명종)이 고립되었을 때
경은 때맞추어 충군분발하여 재앙을 쓸어낼 것을 맹세하였네.
원신(元臣) 몇몇과 함께 마음과 힘을 합쳐서
만 번 죽을지라도 성(誠)을 다하여
효경(梟獍)(어미아비를 잡아먹는 짐승)같은 무리들을 처벌케 하였네.
넘어질 뻔한 나라를 부축하고 하마터면 쓰러졌을 사직을 지켰음에,
그 공은 으뜸이요 그 예(禮)는 엄하며 질서를 존숭하고 의리를 돈독케 한 것이라.
「대려(帶礪)의 맹세」(공신의 집안은 영구히 단절시키지 않는다는 맹세)는 깊고
이름은 인각(麟閣)(공신을 기리는 누각)에 올랐으되,
약소하나마 과인이 하사한 것이 그 공적을 기렸다고 말하기 어려워서
웅주(雄州)(남원을 뜻함)를 제수하여 향촌 거소를 바꾸어 보아
나라와 더불어 같이 편안하고 오래도록 복록을 누리게 하려 하였더니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졸거할 줄 어찌 알았으리.
과인이 그냥 슬퍼만 하고 온 나라를 아픔으로
얽어매어 두어야만 하겠는가.
이에 약소한 제물을 보내어
그 진실한 충성에 보답하고자 하노라
5. 끝으로 공의 구저(旧邸)와「진남제(鎭南堤)」등 사적에 관하여 알아보겠 습니다.
◇ 구림마을과 도선국사(道詵國師) 설화
월당공의 옛집이 있었던 구림마을(현 군서면 서구림리)은 동쪽으로 영암의 얼굴 월출산의 웅자속에 월당공이 이룩하신「지남뜰」을 지척에 두고 있는 곳으로 왕인 박사와 도선 국사의 탄생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도선국사의 설화는 탄생에서 부터 행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중 주요한 것을 소개하면, 그의 어머니는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맑은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꾼 후 도선을 얻었다하고 열다섯 살 때 월유산 화엄사에서 머리를 깎고 여러 절과 산을 다니며 수행하였으며 효공왕이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는 설화가 있고, 또 다른 설화로는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처녀적에 연못 속에 있는 오이를 먹고 아이를 가져 도선을 낳았다는 설화도 있고, 다른 하나로 월출산 아래 성기동 골짜기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 오던 참외를 먹고 잉태하여 도선을 낳았다는 설화도 있습니다.(성기동은 왕인 박사의 탄생지로 여기는 곳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고 보니 남의 이목이 두려워 아이를 숲에다 버렸는데 며칠 후에 가보았더니 비둘기 떼가 아이를 보살피고 있었다합니다. 이에 신기하게 여겨 도로 데려다 길렀다 하며‘구림(鳩林)’이라는 마을 이름은‘비둘기 숲’이라는 뜻으로 바로 이 설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후 도선은 열세 살 때 당나라로 가서 풍수비보설을 배우고 헌강왕 1년(875) 49세의 나이로 신라에 돌아온 후 송악(개성) 왕륭의 집에서 훌륭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왕건의 출생을 예언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전국의 지기(地氣)를 비보(裨補)하는 사찰 500여 곳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도선은 태조 왕건의 출생을 예언한 덕에 고려 역대 왕들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으며 태조 왕건은 그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아, 자손들에게 남긴「훈요십조」2조에서‘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하면서 함부로 절을 세우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였습니다.
◇ 국사암(國師岩)과 요월당(邀月堂)
월당공의 옛집은 구림마을 안쪽인데 그곳에는 특이하게도 거북이 형상의 커다란 바위가 마치 언덕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도선국사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이 바위를「국사암」으로 불러 표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월당공의 옛집은 바로 도선국사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입니다. 대를 이어 이 집에 살게 된 공의 장자 임호(林浩)공은 국사암 측면에「龜岩居士林浩之閭隆慶 五年(구암거사임호지려융경5년)」라는 글자를 새겨 옛집의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바위 앞은 널찍한 마당으로 되어있는데 안쪽으로 사랑채「요월당」이 있었다합니다. (閭 : 시골,마을,신선이 사는곳 등의 뜻, 융경 5년 : 1571년 선조 4년)
옛집 일대의 현재 모습은 낭주(郎州) 최(崔)씨의 문중제각「덕성당」을 비롯 기념비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낭주 - 신라 경덕왕때 영암군으로 칭하였다가 고려성종때 낭주로 승격, 고려현종때 다시 영암군으로 복칭) 아마도 월당공의 후예가 떠난 뒤 낭주 최씨가 일대를 인수한 듯합니다. 선림의 두번째 족보『신사보』(1821 순조21)를 보니「요월당」을 중수한 기사가 월당공 행장에 첨가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종31년(1536년) 공의 36세 때 지었다. 양응정·고경명·황정욱·백광훈·윤두수·윤근수·임제 등 여러 명사들이 출입하며 시를 수창하였다. 임란 때 왜적이 정자의 동남쪽에 불을 지르다가 그 크고 아름다움에 놀라 곧 끄고 임억령·황정욱 두분 시의 편액을 보고는 시에 매료되어 그 편액을 가져갔다 한다. 그 20년 후 외손 박동열(朴東說)이 나주목사 때 중수하고 다시 그 57년 후 5대손 익서(益瑞) (인조3년(1625)생~숙종5년(1679)졸) 가 보수하고, 또 21년 후 6대손 석형(碩衡) (효종10년(1659)생~영조1년(1725)졸) 이 다시 수선하였는데 그 후 50여 년 동안 서까래가 내려앉는 등 훼손이 심하여 인근 내·외손들이 협력하여 기둥을 다시 갈고 규모를 줄여 단단히 보수하였다.”(최종보수 1740년대 말 경으로 추정)
이 기사를 보면 구림마을 옛집에는 공의 사후 상당기간 그 후손들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적이 떼어갔다는 편액에 적힌 석천(石川)과 지천(芝川-황정욱의 호)의 시「요월당(邀月堂)」이 족보에 전하는데, 석천의 시 첫 구절은“산봉우리 기묘하니 깎아본들 무엇하리(峰奇何必剗 봉기하필잔) 찾아오는 밝은 달은 마중하기 편하구나(月入不煩邀 월입불번요)”하고 있고, 이에 대해 지천이 차운(次韻)하기를“밝은 달이 서로 약속한 듯(明月如相約 명월여상약) 두리둥실 찾아오네(團團赴我邀 단단부아요)”로 읊고 있습니다.
「요월당(邀月堂)」즉「달을 맞이하는 집」이라는 당호를 붙였는데“달이 찾아옴에 그 맞이가 무엇이 바쁘고 번거로울 것이며(月入不煩邀 월입불번요)”“둥글디 둥근 달이 찾아오는데 내가 어이 맞지 않으리(團團赴我邀 단단부아요)”라고 당대의 풍류객 석천과 지천은 수창(酬唱)하고 있습니다.(임용원 의 역) 공의 호「월당(月堂)」은 아마도 이 풍류적 당호에서 연원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참고로 공의 호「月堂」은 2차『신사보』손록에 처음 나옵니다. 광해6년(1614) 박동열이 쓴「쌍취정기」에‘월당’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이 구림마을은 구림대동계의 유적(회사정·대동계사), 도선국사 전설의 스토리텔링 등을 기반삼아 대형한옥마을을 조성하여 향토문화관광지로 변모되어 있습니다.
◇ 지남뜰의 조성
공은 36세 때(중종31년 1536) 구저 곁에 요월당을 건축한 후 40세 때(중종3년 1540) 그 유명한「진남언(鎭南堰)」을 축조하십니다. 영산강하류 지금의 군서면 동호리와 양장리 사이 약2km를 인력으로 뚝을 쌓아「지남뜰」을 조성한 후 논 천여석 지기를 얻어 지역농민들을 구휼하신 것입니다. 지금으로 부터 470여 년 전 당시 농민들로서는 꿈에도 생각 못할 농경지 개간사업에 착안하여 대역사(大役事)를 이루고 농민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었으니 오직 경탄할 뿐이며 과연 보통과 다른 큰 포부를 가지신 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종필씨께서 들려주신 바에 의하면, 이곳 지방유지 최준기(崔俊基) 씨가 말하길「농경사회의 선구자이며 특기할 사건」이라고 하며 최근까지도 철로 된「송덕비(頌德碑)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주민들을 통솔하여 생목으로 기초작업을 하고 각기 경작규모에 따라 5m를 기준으로 구역을 할당하여 여자는 머리에 자갈을 이고 남자는 지게로 흙을 운반하여 순 인력으로 뚝을 구축하였다고 합니다. 공의 탁월한 지도력과 주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이룩한 결실입니다. 이 뚝의 이름은「진남언(鎭南堰)」 또는「진남제(鎭南堤)」로 칭하고 조성된 뜰을「지남(指南)뜰」이라 부르는데, 공의 행장에는「진남대제(鎭南大堤)」라 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진남포(鎭南浦)라는 지명이 나오기도 합니다만 아마도 뚝의 위치가 나주진의 남쪽에 있다는데 연유하는 듯합니다.한편 나주 목사를 지낸 공의 외손 박동열은「쌍취정기」에「지남뜰」의 조성경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광주목사 등 벼슬도 하셨고, 부귀도 이룰 만큼 이루어 곡식이 수만 석이요 종의 수가 천이었다. 훈천양육(薰天梁肉- 대들보에 매달은 고기 굽는 냄새가 하늘을 진동)은 보신처세에 장애가 됨을 고심하고 있던 차, 꿈에 엄군평(嚴君平)을 만나「분수를알고용퇴할 도리(知足勇退之理지족용퇴지리)」를 서로 나누었다.
* 엄군평-한(漢)나라 때 사람. 이름은 준(遵) 군평은 자. 성도(成都)에서 점(복서卜筮)으로 생계를 이었다함.『노자지귀(老子指歸)』를 저술.
이러함에 공이「범여표범지고종(范蠡漂帆之高蹤)」 즉 춘추시대 월(越)의 임금 구천(句踐)이 오(吳)의 임금 부차(夫差)에게 당한 치욕을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설복케 한 충신 범여가 나중에 용퇴할 때를 판단하여 제(齊)나라로 망명하게 된 고상한 행적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는데 서구림에 들렀더니 이곳이 월출산 바로 밑이고 서호(西湖)의 바로 위였다. 자고로 인간사에 있어 제일 급선무는 몸의 건강을 보전하고 고루 잘사는데 있음이라(衛生普濟之道 위생보제지도)하고 진남포(鎭南浦) 한곳에 물막이 방죽을 쌓기로 하여 곳간에서 쌀을 내고 종들과 장정들을 일으켜 마침내 천여석지기의 땅을 얻었다.”
◇ 향약(鄕約)과 구림대동계(鳩林大同稧)
정조15년(1791) 간행된『영암읍지』(한국인문과학원 영인본 1990)「향약(鄕約)」조항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목사 임구령·생원 박규정(朴奎精)·감사 신희남(慎喜男)·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의 제현(諸賢)이 남전(藍田)「여씨향약(呂氏鄕約)」을 모방하여 예양(禮讓- 예의바르고 겸손한 일)에 힘쓰고(돈敦) 풍속을 바르게 하여(정正) 기강을 세우고(립立) 상벌을 명확히(명明)함을 목적으로 일군(一郡)에서 시행코자 규약을 만들었으나 중년에 폐하여져 행해지지 않자 동쪽 영보(永保)마을과 서쪽 구림마을 양촌(兩村)이 각각 지켜나가기로(수修) 동약(洞約)을 맺으니 풍속이 아름다워지고 문물이 성(盛)하게 된바 경향각지에서 이를 칭찬하더라.”라는 내용입니다.
「여씨향약」은 중국 북송 말엽 산시성(陝西省 섬서성) 남전현의 여대균(呂大鈞) 등 여씨 일문 4형제가 일가친척은 물론 향리전체를 교화하기 위하여 11세기 후반기에 만들어져 뒤에 남송에서 널리 시행된 것입니다. 이 향약이『주자대전(朱子大全)』에「주자 증손(增損) 여씨향약」으로 실리게 되어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내지 조선조 초에 주자학의 전래에 따라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씨향약」의 요체는 덕업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예속상교(禮俗相交)·환난상휼(患難相恤)의 4대강령에 있습니다. 즉, ①덕업을 서로 권하고 ②과실(잘못)을 서로 바로잡고 ③예속으로 서로 사귀고 ④환난 시에는 서로 돌본다는 네 가지입니다.
주자학의 전래에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온 향약은 그 보급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전통풍습과 융합하거나 독자성을 띠어「퇴계향약」·「율곡향약」등 한국형향약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것이 모태인 듯 나중에 월당공의 장자 호(浩)공과 박규정(함양)의 주도하에「구림대동계(鳩林大同稧)」로 새롭게 태어납니다.(호공의 모친과 박규정의 조모가 난포 박씨) 윤용구(해평인-고종 때의 문신)가 지은 구암(龜岩) 임호공의 행장을 보면 구암공께서는 부친 월당공의 3년상을 마친 후 명종20년(1565) 외조부 박감사(세간 世檊) 내외 후손 72인으로 연명(聯名)하여 수계함을 약조함으로서 조직됩니다. 영세불망에 그 본뜻이 있다하였다는데 이는 아마도「두문동(杜門洞) 72현」을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며 계의 이름을「대동(大同)」으로 하였으며 모임을 위하여「회사정(會社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구림대동계(鳩林大同稧)」를 수계(修稧)하게 된 목적과 경위는 구암공이 지은「구림동중수계서(鳩林洞中修稧序)」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를 간략히 소개하면“외가(난포 박씨)의 선조인 박빈(朴彬)공이 처음 이곳에 정착하였고 이후 박성건(成乾-함양. 박빈의 사위. 소격서령), 박지번(地蕃-난포. 박빈의 손자. 진원현감), 박지창(地昌-난포. 청안현감. 손녀사위가 월당공)이 마을의 기초를 이루고 성건의 자 권(權-사간원 정언)」·조(木條-첨지중추부사)와 판서공(월당공-세간의 사위) 때 더욱 확장되어 인구가 늘고 민가가 1~2천 호나 되었다.”고 하면서“근자에 서울부터 향촌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가 있어 기쁠 때는 경축하고 슬플 때는 조문하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 마을같이 오래되고 사람이 많이 살고 있으면서 유독 계가 없고 강(講)도 하지 않음이 무슨 까닭일까. 서로가 애경상문하고 쉽게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계가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이다. 동장 박규정(함양. 성건의 손자. 조의 자)이 인심이 옛날 갖지 않음을 개탄하여 수계를 먼저 건의하니 무궁토록 경조를 같이 하고자함이 그 목적이다.
이광필(관산. 모친이 함양 박씨), 박성정(함양), 유발(柳潑-진주. 부인이 함양 박씨) 박대기(大器-함양)와 동생 완(浣)이 서로 뜻이 맞아,「여씨향약」으로 송나라가 인심을 어질게 한 예도 있고, 우리나라도 임금과 신하들이 민속의 변화로 백성의 교화에 힘쓰고 있으니 실로 박규정공의 말은 수긍할 만하다. 그리하여 계(稧)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기사들을 두루 살펴보건대「구림대동계」는조 중기의 명문인 선산임씨, 난포박씨, 함양박씨를 중심으로 우리사회의 옛 부터 있어왔던 이사지제(里社之制)와 계(契)가「여씨향약」과 접목하여 향촌의 화민성속(化民成俗)을 위하여 조직된 계로서 초기의 향약 내지 향약계라 할 수 있습니다.(최재율 교수논문「한국농촌의 향약연구」-전남대논문집 1973 참조)
※ 稧와 契-「稧」는‘요사(妖邪)를 떨어버리는 제사(춘추로 행함)’라는 뜻임.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전해오는「상부상조의 민간간협동체」의 뜻인「契」와 혼용하여 쓰고 있음. 수계(修稧)는「계 稧 제사를 지냄」이 그 원래 뜻임.
※ 향약계-향약과 우리나라 전래의 계회(契會)조직이 결합된 계(契)를 말함.(향약과 계는 서로 유사한 면이 많음)
이「구림대동계」는 성종6년(1475) 정극인에 의하여 본격 실시된 전북 태인 지방의「고현동(古縣洞)향약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향약계입니다. 현재 계원이 80여 명으로 지금까지도 왕성히 유지되고 있으며, 동헌(洞憲) 등 대동계 문서들은「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현재 계원의 씨족구성은 선산임씨, 낭주최씨, 해주최씨, 창령조씨, 성산현씨, 전주이씨, 전주최씨, 경주이씨, 함풍이씨 등)
임구령(林九齡)영당 : 영암군 서호면 청룡리 소재
임구령(林九齡)영정 영암군 서호면 청룡리 영당 봉안 본 영정은 세번째로 그려진 것이며 최초의 원본(후손 태열 소장)은 약 450년 전의 것으로 전남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유품임. |
1. 공은 1501년(연산 7) 신유 5월 25일생으로 석천공보다는 5세, 희재공보다는 3세 연하이며 호를 월당(月堂)이라 하였습니다. 남원 부사로 재임 중 병환으로 1562년(명종 17) 11월 26일 타계하시었습니다.공의 인품을 살펴보면, 형인 석천공이 직접 찬(撰)한「목사공행장」에서
“공의 인품이 활달하고 매사에 강경 단호하며 수염이 아름답고 길어서 허리까지 드리우고…”하였으니 그 성격이 강직 단호하고 그 용모가 수려고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최초 족보에서는「목사공」으로 칭하였습니다.) 공이 관직 재임 중 초상화를 그렸는데 권철(權轍)(공과 같은 형조정랑을 지낸바 있고, 후에 3정승까지 지냄. 권율 장군의 부)이 남긴 상찬(賞讚)의 글을 보면“천성이 곧고 인품이 호걸이라 영매(英邁)한 기상이 세상을 덮는듯하구나. 효와 덕을 갖추고 충으로 공을 세웠으니 그 초상도 위풍 있고 굳센 모습이라 나같이 미천한 사람을 숙연케 하네”라고 읊고 있습니다.
2. 형제간의 정리(情理)가 두터웠고 치산(治産)경영에 밝으셨습니다.
석천공이 그의 행장에서“큰형수(천령공의 부인)와 계매(季妹)(朴伯凝박백응의 모친)가 홀로되어 빈궁하므로 공이 부모로부터 받은 자기 전답과 노비를 나누어주고……”라고 하고 있고,“나(석천공)에게 치산이 서툴다하여 그 농지를 할애하여 10여 섬지기를 나에게 주니, 사람이 하기는 어려운 일을 이렇게 하였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중형(仲兄) 백령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길에 중국 땅 영평(永平)에서 돌연 서거하니 호상을 명령받아(1546 명종 1년 7월 20일) 수천리길을 운구 호송하였습니다. 또한 말년(58세)에는 진남대제(鎭南大堤) 잠두(蠶頭)위에 쌍취정(雙醉亭)을 짓고 석천공과 함께 고기 잡고 거문고 타고 술에 흥취하여 세사를 잊고 형제의 우의를 다졌다고 합니다.
◇ 쌍취정(雙醉亭)
옛「쌍취정」이 있었던 곳은「모정마을」이라 불리는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입니다. 공이 조성한「지남뜰」의 저수지 위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뜰이 내려다보이면서 멀리 우뚝한 월출산의 웅자를 바라볼 수 있는 명지입니다. 정자 바로 아래가 뜰을 위해 조성된 저수지로 지금은 한쪽에 연꽃이 무성하여 연못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월출산 봉우리사이로 해와 달이 떠오를 때 연못의 잔잔한 물결과 어우러지면서 그 광경이 온유하고 그윽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영암최고의 해맞이/달맞이 명소로 알려진 곳입니다.
「요월당」을 중수한 바 있는 공의 외손 박동열(朴東說) (1564~1622) 이 광해6년(1614) 7월에 쓴「쌍취정기」가 족보에 전하는데 그 내용 중「쌍취정」을 짓게 된 경위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박동열은 월당공의 사위 박응복의 둘째 아들)
월당공이 지남뜰을 조성하고 나서“한쪽에는 못을 파고 한쪽에는 정자를 지어 못에는 연꽃을 심고 고기를 키워서 운치를 더하였는데 정자는 처음에 요(堯)임금의「모자불치(茅茨不侈)」(지붕을 띠로 이어 사치스럽지 않게 함 ) 고사의 뜻에 따라「모정(茅亭)」이라 하였다가 다시「쌍취정(雙醉亭)」이라 고쳐 불렀다. 이는 형제지간에「훈지공락(塤篪共樂)」의 이치를 따르고자 함이어라. 즉 형은 훈(塤) 나팔을 불고 아우는 지(篪) 피리를 불며 형제가 서로 화목동락한다는 『시경(詩經)』의 교훈을 따르고자 함이라.
못이 정자를 얻고(池得亭지득정) 정자가 연못을 얻은 듯(亭得地정득지) 두가지의 아름다움이 서로를 드러내어(二美相稱이미상칭) 볼수록 아름답다(看看益佳간간익가). 들에서는 농부들이 격양송(擊壤頌-농부가 태평한 세월과 고마움을 읊는 소리)을 부르며 공을 칭송하고 정자에서는 멀리서 임금을 사모하여 우러르면서 거문고로 스스로를 즐기며 노년을 마치고자함에 화려한 세월과 태평한 세상을 이 정자에서 가히 얻었다 할 것이다.” 이「쌍취정」은 세월이 흘러 관리가 어려웠던지 그 이유를 상고할 수는 없으나 천안 전(全)씨 문중이 인수하여 인근 엄길마을(서호면 엄길리)로 옮겨짓고 이름도「수래정(修來亭)」으로 바꾸었습니다. 지금보아도 옛정취가 물씬한 품격 있는 정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모정마을에서는 옛 쌍취정의 재건을 추진 중이라고 함)
※ 박동열(1564~1622)-광해3년(1611) 7월 30일 나주목사에 피임. 광해5년 6월 실록기사에도 나주목사로 나옴. 광해6년에「쌍취정기」를 쓴 것으로보아 몇년간 나주목사로 재임한 듯함. |
3. 환로(宦路-벼슬길)와 행적을 살펴보면,
1) 공의 행장에 밝혔듯이「어렸을 때 학업이 여의치 못하고 무예도 이루지 못하여」항상 남에게 말하기를“대장부가 하필 과거를 거쳐야 출신(出身)할 수 있단 말이냐”하고 사랑채를 크게 지어 4마리 말로 끄는 높은 수레가 출입할 수 있게 하여“후일에 반드시 내방자가 있을 것이다.”하여 자부심이 대단하셨으니 일찍이 문과를 버리고 다른 길을 모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25세 때 문음(門蔭)으로 사산감역(四山監役)이 되고 다음해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별제(別提)가 되었으며
※ 문음-부(父)·형(兄)등 가문의 관덕(官德)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을 말함. 이 해(1525 중종 20)에는 형 억령공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백령공은 내청요직 을 거쳐 남평현감 이었음.
※ 사산감역-조선시대 군직(軍職)으로 감역관(監役官)(6품) 4명을 두어 동서남 북의 4山을 맡아 감독케 하였음
※ 수성금화사-궁성·도성·도로·교량의 수축과 소화(消火)를 관장하는 관청. 별제는 종5품의 벼슬
3) 36세 때 고향인 영암 구림(鳩林)마을 구저(旧邸)곁에 요월당(邀月堂)을 건축하여 여러 시인 명현들이 출입 시를 수창(酬唱)하였고 40세에 그 유명한 진남언(鎭南堰)을 축조하게 됩니다. 요월당과 진남언 등에 관하여는 뒤에서 상술하겠습니다.
4) 「구령(九齡)」의 이름이 처음『왕조실록』에 나타난 것은 공이 45세 때인 1545년 명종즉위년 9월 1일이었으니 즉, 형 백령이“4등 공신으로 되어있는 구령 등을 3등으로 승훈하여 달라”고 왕에게 주청하는 기록입니다. 그 후 9월 15일 다시 백령의 주청으로「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 2등(二等)」으로 녹훈되었으며, 곧
• 공신도감낭청(功臣都監郎廳)
•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
• 장흥고령(長興庫令)(종5)
• 형조정랑(刑曹正郞)(정5)
•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종5)
• 제용감 첨정(濟用監 僉正)(종4)등으로 1년 미만에 승차를 거듭하였습니다.
공이 형조정랑(刑曹正郞)임을 입증하는「추관계회도축(秋官契會圖軸)」이 발견되었으니, 이것은 당시 추관(秋官)(형조刑曹출신)들의 계모임을 그려서 각자 나누어 소장한 희귀자료로서 지금으로 말하면「합동기념사진」쯤 되는 것으로『을해보』(1995)편찬 당시 고 임완회(林完會)씨가 구하여 제공한 것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보면 이와 똑같은 형식으로 된「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가나오는데, 1531년(중종 26) 경 그려진 이 계회도를 보면 백령공이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의 그림입니다. 즉「희재(希齋) 임백령(林百齡) 인순(仁順) 숭선인(嵩善人) 생우홍치무오(生于弘治戊午) 경진하(庚辰夏) 사가(賜暇)……부(父) 충순 휘 우형(忠順 諱 遇亨)」으로 나와 있으며, 계원으로서는 장옥(張玉), 허자(許磁), 송인수(宋麟壽), 송순(宋純), 주세붕(周世鵬), 임백령 등 12명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임백령공편에서 상술)
5) 형 백령공이 중국사신의 귀국길에 중국 땅 영평부(永平府)에서 급서(急逝)(명종1년 6.29)함에 절충장군(折衝將軍)(정3 당상관) 행(行) 부호군(副護軍)의 직함을 제수 받고 호상(護喪)의 임무를 맡아 이를 마친 후, 그 해에
• 남양도후부사(南陽都護府使)(종3)
• 광주목사(光州牧使)(정3)
• 홍주목사(洪州牧使)(정3)를 지내고
• 공신중삭연(功臣仲朔宴)(1560 명종 15)에 초대된 뒤 마지막으로
• 남원도후부사(南原都護府使)(종3)에 제수되었으며 재임 중 병환으로 졸(卒)하였습니다.
참고로 옛 족보에 공의 직함을 보면「광·나주 목사 겸 나주진관첨절제사(光·羅州牧使 兼 羅州鎭管僉節制使)」로 되어 있는데, 왕조실록에 나주목사 제수사실은 없으며,「나주진관병마첨절제사」는 광주목사가 반드시 겸하게 되어 있는 직책이며, 뒤에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역임하였으므로「광·홍주 목사(光·洪州牧使)」의 호칭이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 관직명은 왕조실록, 경국대전의 규정 등을 참고하면「증(贈)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선산군(資憲大夫 戶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善山君)」이 옳은 관직명입니다.
『경국대전』(호조편)에“친공신은 사후(死後) 비록 낮은 직에 있던 자라도 정2품을 추증”하며“모두 군을 봉한다.”라는 규정에 의하여 공이 생존 시 「통정대부 광주목사」(정3품)에서「자헌대부 호조판서」(정2품)직으로 추증되고「선산군」으로 봉해진 것입니다. 또 생존 시에 현직에「행(行)」자가 붙은 것은 공이「2등공신」(정2품 직급)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직책은「광주목사」(정3품)직에재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직급보다 낮은 관직에는「행(行)」높은 관직에는「수(守)」를 붙임)
과거 거제출신 종친께서“어렸을 때 우리는「공신파」의 손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는데 무슨 뜻이냐?”하기에 구령공이 2등공신임을 설명하였더니 비로소 납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려서 조상의 뿌리에 대하여 입으로 전해들은 교육은 마치 종교와 같은 것이어서 언제나 마음의 밑바닥에 깊이 잠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우리의 시조는 임양저공”이라고 굳게 믿어 내려온 윗대의 사실을 되새기게 합니다.
4. 공이 남원부사 재임 중 병환으로 서거(1562. 11. 26)하자 왕(명종)이 왕 18년(1563) 정월 30일에 예조좌랑 정철(鄭澈)을 파견하여 그 영위(靈位)에 치제문(致祭文)을 올려 제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이는 국왕이 국상(國喪)으로 상사를 다스리게 하는 것으로, 고관대작이나 대학자 또는 나라에 공이 큰 사람에 한하는 것으로서 매우 드문 일입니다. 공이 공훈을 받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중종 39년(1544) 11월 15일 중종이 승하하고 11월 20일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8개월만인 1545년(을사) 7월 1일 승하하게 되는데(당시 30세), 이어서 7월 6일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그 모친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됩니다. 이즈음 인종의 외척인 소위 대윤파와 명종의 외척 소윤파간에 권력다툼이 심하였는데 이러한 어수선한 정국 하에서 어린 임금의 집권초기에 불안정한 왕권의 기반을 다지고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는데 공을 세운 것입니다. (석천공이 쓰신 공의「행장」에 관련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의 인품과 공적을 추모하면서 왕이 직접 제문을 내려 보내 치제케 함은, 국왕으로 부터의 은전이자 가문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번역문은 다음과 같으며 명종의「어제치제문(御製致祭文)」원문과 그 주석은 따로 첨부하였습니다.(210~213쪽 참조)
왕이 지어 내리신 치제문(致祭文)
아아, 헤아리건대 세(歲)가 이어 내려와 가정(嘉靖)
42년(1563 명종 18) 계해년이 되어 정월 30일에,
국왕은 신하인 예조좌랑 정철(鄭澈)을 보내어
증 추성협익 정난위사공신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선산군이며, 그 직이 추성협익 정난위사공신 통정대부
광주목사 나주진관병마첨절제사 홍주목사 남원도호부사인
임구령의 영위(靈位)에 오로지 이 분을 생각하면서
그 죽음을 애도하는 제사를 올리며 이르노니,
그 기품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고, 그 정령(精靈)이
온 산악에 종(鐘)을 울리는 도다.
남녘 땅 끝에서 재질을 쌓고 서울에서 때를 기다렸네.
몸은 비록 하급직에 있었으나 마음은 오직 왕실의 안위에 있었네.
지난 갑진·을사년에 이성(二聖 - 인종·명종)이 계속 옥좌에
올랐으나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고 나라는 위태롭고
적신(賊臣)들은 역모를 꾀하며 변고가 조석으로 일어나서
종묘사직이 위기일발에 이르도다.
자성(慈聖)(대비-문정왕후)이 울부짖고
어린 임금(명종)이 고립되었을 때
경은 때맞추어 충군분발하여 재앙을 쓸어낼 것을 맹세하였네.
원신(元臣) 몇몇과 함께 마음과 힘을 합쳐서
만 번 죽을지라도 성(誠)을 다하여
효경(梟獍)(어미아비를 잡아먹는 짐승)같은 무리들을 처벌케 하였네.
넘어질 뻔한 나라를 부축하고 하마터면 쓰러졌을 사직을 지켰음에,
그 공은 으뜸이요 그 예(禮)는 엄하며 질서를 존숭하고 의리를 돈독케 한 것이라.
「대려(帶礪)의 맹세」(공신의 집안은 영구히 단절시키지 않는다는 맹세)는 깊고
이름은 인각(麟閣)(공신을 기리는 누각)에 올랐으되,
약소하나마 과인이 하사한 것이 그 공적을 기렸다고 말하기 어려워서
웅주(雄州)(남원을 뜻함)를 제수하여 향촌 거소를 바꾸어 보아
나라와 더불어 같이 편안하고 오래도록 복록을 누리게 하려 하였더니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졸거할 줄 어찌 알았으리.
과인이 그냥 슬퍼만 하고 온 나라를 아픔으로
얽어매어 두어야만 하겠는가.
이에 약소한 제물을 보내어
그 진실한 충성에 보답하고자 하노라
5. 끝으로 공의 구저(旧邸)와「진남제(鎭南堤)」등 사적에 관하여 알아보겠 습니다.
◇ 구림마을과 도선국사(道詵國師) 설화
월당공의 옛집이 있었던 구림마을(현 군서면 서구림리)은 동쪽으로 영암의 얼굴 월출산의 웅자속에 월당공이 이룩하신「지남뜰」을 지척에 두고 있는 곳으로 왕인 박사와 도선 국사의 탄생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도선국사의 설화는 탄생에서 부터 행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중 주요한 것을 소개하면, 그의 어머니는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맑은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꾼 후 도선을 얻었다하고 열다섯 살 때 월유산 화엄사에서 머리를 깎고 여러 절과 산을 다니며 수행하였으며 효공왕이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는 설화가 있고, 또 다른 설화로는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처녀적에 연못 속에 있는 오이를 먹고 아이를 가져 도선을 낳았다는 설화도 있고, 다른 하나로 월출산 아래 성기동 골짜기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 오던 참외를 먹고 잉태하여 도선을 낳았다는 설화도 있습니다.(성기동은 왕인 박사의 탄생지로 여기는 곳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고 보니 남의 이목이 두려워 아이를 숲에다 버렸는데 며칠 후에 가보았더니 비둘기 떼가 아이를 보살피고 있었다합니다. 이에 신기하게 여겨 도로 데려다 길렀다 하며‘구림(鳩林)’이라는 마을 이름은‘비둘기 숲’이라는 뜻으로 바로 이 설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후 도선은 열세 살 때 당나라로 가서 풍수비보설을 배우고 헌강왕 1년(875) 49세의 나이로 신라에 돌아온 후 송악(개성) 왕륭의 집에서 훌륭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왕건의 출생을 예언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전국의 지기(地氣)를 비보(裨補)하는 사찰 500여 곳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도선은 태조 왕건의 출생을 예언한 덕에 고려 역대 왕들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으며 태조 왕건은 그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아, 자손들에게 남긴「훈요십조」2조에서‘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하면서 함부로 절을 세우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였습니다.
◇ 국사암(國師岩)과 요월당(邀月堂)
월당공의 옛집은 구림마을 안쪽인데 그곳에는 특이하게도 거북이 형상의 커다란 바위가 마치 언덕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도선국사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이 바위를「국사암」으로 불러 표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월당공의 옛집은 바로 도선국사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입니다. 대를 이어 이 집에 살게 된 공의 장자 임호(林浩)공은 국사암 측면에「龜岩居士林浩之閭隆慶 五年(구암거사임호지려융경5년)」라는 글자를 새겨 옛집의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바위 앞은 널찍한 마당으로 되어있는데 안쪽으로 사랑채「요월당」이 있었다합니다. (閭 : 시골,마을,신선이 사는곳 등의 뜻, 융경 5년 : 1571년 선조 4년)
옛집 일대의 현재 모습은 낭주(郎州) 최(崔)씨의 문중제각「덕성당」을 비롯 기념비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낭주 - 신라 경덕왕때 영암군으로 칭하였다가 고려성종때 낭주로 승격, 고려현종때 다시 영암군으로 복칭) 아마도 월당공의 후예가 떠난 뒤 낭주 최씨가 일대를 인수한 듯합니다. 선림의 두번째 족보『신사보』(1821 순조21)를 보니「요월당」을 중수한 기사가 월당공 행장에 첨가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종31년(1536년) 공의 36세 때 지었다. 양응정·고경명·황정욱·백광훈·윤두수·윤근수·임제 등 여러 명사들이 출입하며 시를 수창하였다. 임란 때 왜적이 정자의 동남쪽에 불을 지르다가 그 크고 아름다움에 놀라 곧 끄고 임억령·황정욱 두분 시의 편액을 보고는 시에 매료되어 그 편액을 가져갔다 한다. 그 20년 후 외손 박동열(朴東說)이 나주목사 때 중수하고 다시 그 57년 후 5대손 익서(益瑞) (인조3년(1625)생~숙종5년(1679)졸) 가 보수하고, 또 21년 후 6대손 석형(碩衡) (효종10년(1659)생~영조1년(1725)졸) 이 다시 수선하였는데 그 후 50여 년 동안 서까래가 내려앉는 등 훼손이 심하여 인근 내·외손들이 협력하여 기둥을 다시 갈고 규모를 줄여 단단히 보수하였다.”(최종보수 1740년대 말 경으로 추정)
이 기사를 보면 구림마을 옛집에는 공의 사후 상당기간 그 후손들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적이 떼어갔다는 편액에 적힌 석천(石川)과 지천(芝川-황정욱의 호)의 시「요월당(邀月堂)」이 족보에 전하는데, 석천의 시 첫 구절은“산봉우리 기묘하니 깎아본들 무엇하리(峰奇何必剗 봉기하필잔) 찾아오는 밝은 달은 마중하기 편하구나(月入不煩邀 월입불번요)”하고 있고, 이에 대해 지천이 차운(次韻)하기를“밝은 달이 서로 약속한 듯(明月如相約 명월여상약) 두리둥실 찾아오네(團團赴我邀 단단부아요)”로 읊고 있습니다.
「요월당(邀月堂)」즉「달을 맞이하는 집」이라는 당호를 붙였는데“달이 찾아옴에 그 맞이가 무엇이 바쁘고 번거로울 것이며(月入不煩邀 월입불번요)”“둥글디 둥근 달이 찾아오는데 내가 어이 맞지 않으리(團團赴我邀 단단부아요)”라고 당대의 풍류객 석천과 지천은 수창(酬唱)하고 있습니다.(임용원 의 역) 공의 호「월당(月堂)」은 아마도 이 풍류적 당호에서 연원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참고로 공의 호「月堂」은 2차『신사보』손록에 처음 나옵니다. 광해6년(1614) 박동열이 쓴「쌍취정기」에‘월당’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이 구림마을은 구림대동계의 유적(회사정·대동계사), 도선국사 전설의 스토리텔링 등을 기반삼아 대형한옥마을을 조성하여 향토문화관광지로 변모되어 있습니다.
◇ 지남뜰의 조성
공은 36세 때(중종31년 1536) 구저 곁에 요월당을 건축한 후 40세 때(중종3년 1540) 그 유명한「진남언(鎭南堰)」을 축조하십니다. 영산강하류 지금의 군서면 동호리와 양장리 사이 약2km를 인력으로 뚝을 쌓아「지남뜰」을 조성한 후 논 천여석 지기를 얻어 지역농민들을 구휼하신 것입니다. 지금으로 부터 470여 년 전 당시 농민들로서는 꿈에도 생각 못할 농경지 개간사업에 착안하여 대역사(大役事)를 이루고 농민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었으니 오직 경탄할 뿐이며 과연 보통과 다른 큰 포부를 가지신 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종필씨께서 들려주신 바에 의하면, 이곳 지방유지 최준기(崔俊基) 씨가 말하길「농경사회의 선구자이며 특기할 사건」이라고 하며 최근까지도 철로 된「송덕비(頌德碑)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주민들을 통솔하여 생목으로 기초작업을 하고 각기 경작규모에 따라 5m를 기준으로 구역을 할당하여 여자는 머리에 자갈을 이고 남자는 지게로 흙을 운반하여 순 인력으로 뚝을 구축하였다고 합니다. 공의 탁월한 지도력과 주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이룩한 결실입니다. 이 뚝의 이름은「진남언(鎭南堰)」 또는「진남제(鎭南堤)」로 칭하고 조성된 뜰을「지남(指南)뜰」이라 부르는데, 공의 행장에는「진남대제(鎭南大堤)」라 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진남포(鎭南浦)라는 지명이 나오기도 합니다만 아마도 뚝의 위치가 나주진의 남쪽에 있다는데 연유하는 듯합니다.한편 나주 목사를 지낸 공의 외손 박동열은「쌍취정기」에「지남뜰」의 조성경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광주목사 등 벼슬도 하셨고, 부귀도 이룰 만큼 이루어 곡식이 수만 석이요 종의 수가 천이었다. 훈천양육(薰天梁肉- 대들보에 매달은 고기 굽는 냄새가 하늘을 진동)은 보신처세에 장애가 됨을 고심하고 있던 차, 꿈에 엄군평(嚴君平)을 만나「분수를알고용퇴할 도리(知足勇退之理지족용퇴지리)」를 서로 나누었다.
* 엄군평-한(漢)나라 때 사람. 이름은 준(遵) 군평은 자. 성도(成都)에서 점(복서卜筮)으로 생계를 이었다함.『노자지귀(老子指歸)』를 저술.
이러함에 공이「범여표범지고종(范蠡漂帆之高蹤)」 즉 춘추시대 월(越)의 임금 구천(句踐)이 오(吳)의 임금 부차(夫差)에게 당한 치욕을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설복케 한 충신 범여가 나중에 용퇴할 때를 판단하여 제(齊)나라로 망명하게 된 고상한 행적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는데 서구림에 들렀더니 이곳이 월출산 바로 밑이고 서호(西湖)의 바로 위였다. 자고로 인간사에 있어 제일 급선무는 몸의 건강을 보전하고 고루 잘사는데 있음이라(衛生普濟之道 위생보제지도)하고 진남포(鎭南浦) 한곳에 물막이 방죽을 쌓기로 하여 곳간에서 쌀을 내고 종들과 장정들을 일으켜 마침내 천여석지기의 땅을 얻었다.”
◇ 향약(鄕約)과 구림대동계(鳩林大同稧)
정조15년(1791) 간행된『영암읍지』(한국인문과학원 영인본 1990)「향약(鄕約)」조항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목사 임구령·생원 박규정(朴奎精)·감사 신희남(慎喜男)·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의 제현(諸賢)이 남전(藍田)「여씨향약(呂氏鄕約)」을 모방하여 예양(禮讓- 예의바르고 겸손한 일)에 힘쓰고(돈敦) 풍속을 바르게 하여(정正) 기강을 세우고(립立) 상벌을 명확히(명明)함을 목적으로 일군(一郡)에서 시행코자 규약을 만들었으나 중년에 폐하여져 행해지지 않자 동쪽 영보(永保)마을과 서쪽 구림마을 양촌(兩村)이 각각 지켜나가기로(수修) 동약(洞約)을 맺으니 풍속이 아름다워지고 문물이 성(盛)하게 된바 경향각지에서 이를 칭찬하더라.”라는 내용입니다.
「여씨향약」은 중국 북송 말엽 산시성(陝西省 섬서성) 남전현의 여대균(呂大鈞) 등 여씨 일문 4형제가 일가친척은 물론 향리전체를 교화하기 위하여 11세기 후반기에 만들어져 뒤에 남송에서 널리 시행된 것입니다. 이 향약이『주자대전(朱子大全)』에「주자 증손(增損) 여씨향약」으로 실리게 되어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내지 조선조 초에 주자학의 전래에 따라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씨향약」의 요체는 덕업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예속상교(禮俗相交)·환난상휼(患難相恤)의 4대강령에 있습니다. 즉, ①덕업을 서로 권하고 ②과실(잘못)을 서로 바로잡고 ③예속으로 서로 사귀고 ④환난 시에는 서로 돌본다는 네 가지입니다.
주자학의 전래에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온 향약은 그 보급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전통풍습과 융합하거나 독자성을 띠어「퇴계향약」·「율곡향약」등 한국형향약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것이 모태인 듯 나중에 월당공의 장자 호(浩)공과 박규정(함양)의 주도하에「구림대동계(鳩林大同稧)」로 새롭게 태어납니다.(호공의 모친과 박규정의 조모가 난포 박씨) 윤용구(해평인-고종 때의 문신)가 지은 구암(龜岩) 임호공의 행장을 보면 구암공께서는 부친 월당공의 3년상을 마친 후 명종20년(1565) 외조부 박감사(세간 世檊) 내외 후손 72인으로 연명(聯名)하여 수계함을 약조함으로서 조직됩니다. 영세불망에 그 본뜻이 있다하였다는데 이는 아마도「두문동(杜門洞) 72현」을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며 계의 이름을「대동(大同)」으로 하였으며 모임을 위하여「회사정(會社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구림대동계(鳩林大同稧)」를 수계(修稧)하게 된 목적과 경위는 구암공이 지은「구림동중수계서(鳩林洞中修稧序)」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를 간략히 소개하면“외가(난포 박씨)의 선조인 박빈(朴彬)공이 처음 이곳에 정착하였고 이후 박성건(成乾-함양. 박빈의 사위. 소격서령), 박지번(地蕃-난포. 박빈의 손자. 진원현감), 박지창(地昌-난포. 청안현감. 손녀사위가 월당공)이 마을의 기초를 이루고 성건의 자 권(權-사간원 정언)」·조(木條-첨지중추부사)와 판서공(월당공-세간의 사위) 때 더욱 확장되어 인구가 늘고 민가가 1~2천 호나 되었다.”고 하면서“근자에 서울부터 향촌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가 있어 기쁠 때는 경축하고 슬플 때는 조문하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 마을같이 오래되고 사람이 많이 살고 있으면서 유독 계가 없고 강(講)도 하지 않음이 무슨 까닭일까. 서로가 애경상문하고 쉽게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계가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이다. 동장 박규정(함양. 성건의 손자. 조의 자)이 인심이 옛날 갖지 않음을 개탄하여 수계를 먼저 건의하니 무궁토록 경조를 같이 하고자함이 그 목적이다.
이광필(관산. 모친이 함양 박씨), 박성정(함양), 유발(柳潑-진주. 부인이 함양 박씨) 박대기(大器-함양)와 동생 완(浣)이 서로 뜻이 맞아,「여씨향약」으로 송나라가 인심을 어질게 한 예도 있고, 우리나라도 임금과 신하들이 민속의 변화로 백성의 교화에 힘쓰고 있으니 실로 박규정공의 말은 수긍할 만하다. 그리하여 계(稧)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기사들을 두루 살펴보건대「구림대동계」는조 중기의 명문인 선산임씨, 난포박씨, 함양박씨를 중심으로 우리사회의 옛 부터 있어왔던 이사지제(里社之制)와 계(契)가「여씨향약」과 접목하여 향촌의 화민성속(化民成俗)을 위하여 조직된 계로서 초기의 향약 내지 향약계라 할 수 있습니다.(최재율 교수논문「한국농촌의 향약연구」-전남대논문집 1973 참조)
※ 稧와 契-「稧」는‘요사(妖邪)를 떨어버리는 제사(춘추로 행함)’라는 뜻임.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전해오는「상부상조의 민간간협동체」의 뜻인「契」와 혼용하여 쓰고 있음. 수계(修稧)는「계 稧 제사를 지냄」이 그 원래 뜻임.
※ 향약계-향약과 우리나라 전래의 계회(契會)조직이 결합된 계(契)를 말함.(향약과 계는 서로 유사한 면이 많음)
이「구림대동계」는 성종6년(1475) 정극인에 의하여 본격 실시된 전북 태인 지방의「고현동(古縣洞)향약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향약계입니다. 현재 계원이 80여 명으로 지금까지도 왕성히 유지되고 있으며, 동헌(洞憲) 등 대동계 문서들은「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현재 계원의 씨족구성은 선산임씨, 낭주최씨, 해주최씨, 창령조씨, 성산현씨, 전주이씨, 전주최씨, 경주이씨, 함풍이씨 등)
임구령(林九齡)영당 : 영암군 서호면 청룡리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