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와 시조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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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산임씨의 시조는 임양저(林良貯)이십니다. |
그 원전은『선산임씨족보』최초보『병술보(丙戌譜)』(1766 영조42)에 수록되어 있는「희재(임백령)공 행장(希齋 林百齡公 行狀)」이라고 봅니다. 이 행장에 수록된 시조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新羅季有中郞將林良貯 爲 新羅敬順王子貞顯之壻 敬順之歸于麗祖也 良貯諫曰 継累世之緖 而絶之不可謂子也 守萬乘之業 而棄之不可謂君也 言甚切至 敬順不能從焉 後麗祖聞之分其子孫投于諸邑 居善山者 公之先也 |
신라계유중랑장임양저 위 신라경순왕자정현지서 경순지귀우려조야 양저간왈 계누세지서 이절지불가위자야 수만승지업 이기지불가위군야 언심절지 경순불능종언 후려조문지분기자손투우제읍 거선산자 공지선야 |
신라 말 중랑장 임양저가 계셨는데 신라 경순왕자 정현의 사위가 되는 이였다. 경순왕이 고려태조에게 귀부(歸附)하려 할 때 양저가 간하여 말하되, 누세의 계통을 끊으면 가히 자식이라 할 수 없고, 만승의 왕업을 지키다가 버림은 가히 임금이라 할 수 없다. 심히 통절히 말하여도 경순왕은 들으려하지 않았다. 뒤에 고려태조가 이를 듣고 그 자손을 분산하여 여러 고을로 이거케하였다.(그 중) 선산에 살게 된 이가 (백령)공의 선조이다. |
2. 이 행장을「선산임씨 시조와 그 설화」의 원전이라고 보는 이유는 |
① 이 행장이『선산임씨족보』최초보(1766) 보다 180년경이나 앞선 1590 년(선조 23)경에 찬술되었으며,
② 찬자인 윤의중(尹毅中)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조부이며 형조 판서를 역임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희재공 보다 26세 연하로서 희재공 서거시(1546) 23세의 청년(25세에 과거급제)이었던 동향, 동도(同 道-같은 벼슬길)의 지근(至近) 후배이며,
③ 또한 이 행장은 공의 사후 40년,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공의 사후 20년 경(석천공 서거 시 윤의중은 45세) 찬술된 글입니다.
④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기록도 있습니다. 즉『병술보』에 같이 수록되 어 있는「석천선생 묘표(石川先生 墓表)」인데, 이는 1692년(숙종 18) 6월 에 당시 해남현감 유상재(柳尙載)의 부탁으로 박세채(朴世采, 1631 인조 9~1695 숙종 21)가 쓴 글입니다.
박세채는 월당(月堂) 임구령(林九齡)공의 사위인 박응복(朴應福)의 증손자로서 당대 최고의 학자이며 정치가(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 역임)였습니다. 「석천선생 묘표」에 나오는 시조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始祖良貯 事新羅爲中郞將 敬順之歸麗力諫不聽 自後苗裔多散居諸邑 |
시조양저 사신라위중랑장 경순지귀려력간불청 자후묘예다산거제읍 |
시조는 양저이시다. 신라에 중랑장으로 벼슬하셨는데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려함에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로부터 후손들이 여러 고을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
⑤ 이로보아 이 행장의 내용은 사실(史實)에 가장 근접해 있으며 또한 가장 신뢰성이 있다고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3. 행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
① 선산임씨의 시조인 임양저공은 왕의 손녀와 결혼할 정도의 신라 상류층 귀족 계급에 속해 있었으며,
② 당시 신라 왕실 혈통의 폐쇄성으로 보아 중국에서 건너온 도래성(渡來 姓)이 아니라 신라 고유의 본토성(本土姓)인 것으로 믿어지며,
•『삼국사기』및 『고려사』에 나오는 신라 말 강주(현 진주) 태수 임언(林彦)이 경주인입니다. 임언은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에 공헌하였으며 그 딸이 왕건의 비가 된 천안부원부인입니다. 이로보아 신라 말 경주에는 이미 임씨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박경가(朴慶家)저『동성고략(東姓考略)』이라는 책을 보면 林씨는“동국본토출 토성(東國本土出 土姓)”으로 되어있습니다.
③ 신라조의 중견 무관직(중랑장)에 있었으면서 왕에게“언심절지(言甚切至)”하게 간언한 충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4. 그러므로「양저 설화의 원전」으로 보이는 |
「희재공행장」의「(良貯諫)言甚切至 敬順不能從焉 後麗祖聞之 分其子孫 投于諸邑 居善山者 公之先也」「(양저간)언심절지 경순불능종언 후려조문지 분기자손 투우제읍 거선산자 공지선야」를 선산임씨의「득관설(得貫說)」로 인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양저공께서 경순왕에 의하여 선산으로 직접 유배되었기 때문에 득관한 것이 아니라, 고려 건국 후 왕건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양저공의 아들들을 여러 고을로 투출(投出)하였는데 그 중 선산에 정착한 후손들이 선산임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산임씨는 이와같은「양저공 설화」를 마치 단군의 건국신화처럼 조상전래의「씨족설화」로 믿어왔으며 그「천사충절(千祀忠節)」의 정신을「겨레의 철학」으로 간직하여 내려온 것입니다.
다만, 애석하게도 경순왕자 정현과 그 사위 임양저가 나오는 역사기록은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음이 한스럽긴 하나, 희재공행장이 전하는 이 설화는 여러 역사적 사실관계에 부합하고 있는 점에서 소중한 기록이며 우리 선림(善林)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귀중한 증빙인 것입니다.
5. 그런데 선산임씨 족보 제2차보인 |
『신사보(辛巳譜)』(1821 순조 21년)이래로 그 내용 일부가 변질 되었습니다. 즉, 희재공행장의「言甚切至 敬順不能從焉(언심절지 경순불능종언)」이 善林2차보 이후「言甚切至 敬順怒 謫善山 終焉(언심절지 경순노 적선산 종언)」, 「以直諫 謫善山 因居焉(이직간 적선산 인거언)」등으로 변작되어 있습니다. 敬順의「不能」이「怒謫善山」으로,「從」이「終」으로 변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양저공의「忠諫(충간)」을 한층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이와 같이 변경하여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언심절지 - 심히 통절하게 간언하였으되,
*경순불능종언(從焉) - 경순은 들으려하지 않았다.
*경순노(怒) 적(謫)선산종언(終焉) - 경순이 노하여 선산으로 귀양 보내매 거기서 생 을 마쳤다.
*이직간 적선산 인거언 - 직간을 하였더니 선산으로 귀양 보내매 그래서 선산에 살 게 되었다.
*만승 - 만대의 병거를 거느린 사람 곧 임금(천자)을 뜻함.(15쪽 기사 ‘만승지업’의 이해)
*천승 - 전시에 임금이 제후에게 천대의 병거를 내준다는 뜻에서 제후를 말함.
6. 이렇게 변작된 설화는 |
평택임씨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것을 역수입한 것인데,
① 당시 선산지역은 효공왕 10년(907) 후백제의 견훤이 탈취한 이후 신라가 망하고(935) 나서까지 후백제의 수중에 있었던 후삼국통일전쟁 최후의 격전지(936년 왕건이 승리하여 통일)였습니다. 즉 후백제 치하에 있었던 지역이므로 신라가 유배를 보내거나 살게 할 수 있는 안이한 지역이 아니었으며,
② 아무리 경순왕의 심기를 거슬렀다하더라도「나라의 충신」을 결코 귀양 보낼 수는 없는 일이며,
③ 국가 존망의 위급한 시점에서「유배」와 같은 한가한 조치가 이루어질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④ 또한「양저공의 묘가 선산 야성(野城)·평성(坪城)에 있다」하였는데 선산 귀양이야기가 허설인 이상 묘가 선산에 있을리 없으며,
⑤「이 이야기가 일선지(一善誌)에 있다」라고도 하는데『일선지』어디에도 임양저공 또는 공의 묘소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⑥「중랑장」이라는 벼슬은 원래 중국의 군직으로서 고려시대 도입된 것이며 신라에서는 공식직함으로 되어 있지 않았으나, 삼국통일 전쟁시기 신라군 장수중에 호칭한 예가 있습니다.
⑦「선산귀양」·「묘소」·「일선지」등 이야기는 결국 선산에 관련된 이야기 인데, 이는 곧 양저공과 그 설화의 원천이 선산임씨에 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⑧ 양저공설화가 나오는「회재공행장」은 선조 23년경 쓰인 글이고,『일선지』는 인조 때 또는 그 이후 편찬된 책이므로 글이 쓰여 진 연대를 보더라도 임양저공과 그 설화는「회재공행장」의 글이 원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7. 선산임씨는 호장(戶長) 종문(宗門)입니다. |
영남사림의 영수로 추앙받는 김종직(1413 세종13 ~ 1492 성종23)은 선산인으로 일찍이 선산부사를 지내면서 부친에 관한 에피소드를 담은『이존록(彛尊錄)』을 저술하였는데, 그 제1편이 시조 김선궁으로 부터 부친 김숙자까지의 족계(族系)를 쓴「선공보도(先公譜圖)」입니다. 이「선공보도」에 김종직의 직계 선조인 김선궁의 8세손 김지영의 처 외조부가 선산 호장 임은영(林銀永)입니다.
이로보아 선산임씨는 선산 지방 최고가문 선산김씨와 혼맥으로 이어진 사이이고 고려전기부터 선산김씨와 더불어 호장종문으로서 선산 지역 유력가문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호장은 향리의 수반으로서 유력가문이 맡았으며 대개 4인 이상의 복수로 구성되었습니다.
- 자세한 내용을 <별첨논고>편 참조)
1. 선산임씨의 시조는 임양저(林良貯)이십니다. |
그 원전은『선산임씨족보』최초보『병술보(丙戌譜)』(1766 영조42)에 수록되어 있는「희재(임백령)공 행장(希齋 林百齡公 行狀)」이라고 봅니다. 이 행장에 수록된 시조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新羅季有中郞將林良貯 爲 新羅敬順王子貞顯之壻 敬順之歸于麗祖也 良貯諫曰 継累世之緖 而絶之不可謂子也 守萬乘之業 而棄之不可謂君也 言甚切至 敬順不能從焉 後麗祖聞之分其子孫投于諸邑 居善山者 公之先也 |
신라계유중랑장임양저 위 신라경순왕자정현지서 경순지귀우려조야 양저간왈 계누세지서 이절지불가위자야 수만승지업 이기지불가위군야 언심절지 경순불능종언 후려조문지분기자손투우제읍 거선산자 공지선야 |
신라 말 중랑장 임양저가 계셨는데 신라 경순왕자 정현의 사위가 되는 이였다. 경순왕이 고려태조에게 귀부(歸附)하려 할 때 양저가 간하여 말하되, 누세의 계통을 끊으면 가히 자식이라 할 수 없고, 만승의 왕업을 지키다가 버림은 가히 임금이라 할 수 없다. 심히 통절히 말하여도 경순왕은 들으려하지 않았다. 뒤에 고려태조가 이를 듣고 그 자손을 분산하여 여러 고을로 이거케하였다.(그 중) 선산에 살게 된 이가 (백령)공의 선조이다. |
2. 이 행장을「선산임씨 시조와 그 설화」의 원전이라고 보는 이유는 |
① 이 행장이『선산임씨족보』최초보(1766) 보다 180년경이나 앞선 1590 년(선조 23)경에 찬술되었으며,
② 찬자인 윤의중(尹毅中)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조부이며 형조 판서를 역임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희재공 보다 26세 연하로서 희재공 서거시(1546) 23세의 청년(25세에 과거급제)이었던 동향, 동도(同 道-같은 벼슬길)의 지근(至近) 후배이며,
③ 또한 이 행장은 공의 사후 40년,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공의 사후 20년 경(석천공 서거 시 윤의중은 45세) 찬술된 글입니다.
④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기록도 있습니다. 즉『병술보』에 같이 수록되 어 있는「석천선생 묘표(石川先生 墓表)」인데, 이는 1692년(숙종 18) 6월 에 당시 해남현감 유상재(柳尙載)의 부탁으로 박세채(朴世采, 1631 인조 9~1695 숙종 21)가 쓴 글입니다.
박세채는 월당(月堂) 임구령(林九齡)공의 사위인 박응복(朴應福)의 증손자로서 당대 최고의 학자이며 정치가(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 역임)였습니다. 「석천선생 묘표」에 나오는 시조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始祖良貯 事新羅爲中郞將 敬順之歸麗力諫不聽 自後苗裔多散居諸邑 |
시조양저 사신라위중랑장 경순지귀려력간불청 자후묘예다산거제읍 |
시조는 양저이시다. 신라에 중랑장으로 벼슬하셨는데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려함에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로부터 후손들이 여러 고을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
⑤ 이로보아 이 행장의 내용은 사실(史實)에 가장 근접해 있으며 또한 가장 신뢰성이 있다고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3. 행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
① 선산임씨의 시조인 임양저공은 왕의 손녀와 결혼할 정도의 신라 상류층 귀족 계급에 속해 있었으며,
② 당시 신라 왕실 혈통의 폐쇄성으로 보아 중국에서 건너온 도래성(渡來 姓)이 아니라 신라 고유의 본토성(本土姓)인 것으로 믿어지며,
•『삼국사기』및 『고려사』에 나오는 신라 말 강주(현 진주) 태수 임언(林彦)이 경주인입니다. 임언은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에 공헌하였으며 그 딸이 왕건의 비가 된 천안부원부인입니다. 이로보아 신라 말 경주에는 이미 임씨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박경가(朴慶家)저『동성고략(東姓考略)』이라는 책을 보면 林씨는“동국본토출 토성(東國本土出 土姓)”으로 되어있습니다.
③ 신라조의 중견 무관직(중랑장)에 있었으면서 왕에게“언심절지(言甚切至)”하게 간언한 충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4. 그러므로「양저 설화의 원전」으로 보이는 |
「희재공행장」의「(良貯諫)言甚切至 敬順不能從焉 後麗祖聞之 分其子孫 投于諸邑 居善山者 公之先也」「(양저간)언심절지 경순불능종언 후려조문지 분기자손 투우제읍 거선산자 공지선야」를 선산임씨의「득관설(得貫說)」로 인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양저공께서 경순왕에 의하여 선산으로 직접 유배되었기 때문에 득관한 것이 아니라, 고려 건국 후 왕건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양저공의 아들들을 여러 고을로 투출(投出)하였는데 그 중 선산에 정착한 후손들이 선산임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산임씨는 이와같은「양저공 설화」를 마치 단군의 건국신화처럼 조상전래의「씨족설화」로 믿어왔으며 그「천사충절(千祀忠節)」의 정신을「겨레의 철학」으로 간직하여 내려온 것입니다.
다만, 애석하게도 경순왕자 정현과 그 사위 임양저가 나오는 역사기록은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음이 한스럽긴 하나, 희재공행장이 전하는 이 설화는 여러 역사적 사실관계에 부합하고 있는 점에서 소중한 기록이며 우리 선림(善林)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귀중한 증빙인 것입니다.
5. 그런데 선산임씨 족보 제2차보인 |
『신사보(辛巳譜)』(1821 순조 21년)이래로 그 내용 일부가 변질 되었습니다. 즉, 희재공행장의「言甚切至 敬順不能從焉(언심절지 경순불능종언)」이 善林2차보 이후「言甚切至 敬順怒 謫善山 終焉(언심절지 경순노 적선산 종언)」, 「以直諫 謫善山 因居焉(이직간 적선산 인거언)」등으로 변작되어 있습니다. 敬順의「不能」이「怒謫善山」으로,「從」이「終」으로 변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양저공의「忠諫(충간)」을 한층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이와 같이 변경하여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언심절지 - 심히 통절하게 간언하였으되,
*경순불능종언(從焉) - 경순은 들으려하지 않았다.
*경순노(怒) 적(謫)선산종언(終焉) - 경순이 노하여 선산으로 귀양 보내매 거기서 생 을 마쳤다.
*이직간 적선산 인거언 - 직간을 하였더니 선산으로 귀양 보내매 그래서 선산에 살 게 되었다.
*만승 - 만대의 병거를 거느린 사람 곧 임금(천자)을 뜻함.(15쪽 기사 ‘만승지업’의 이해)
*천승 - 전시에 임금이 제후에게 천대의 병거를 내준다는 뜻에서 제후를 말함.
6. 이렇게 변작된 설화는 |
평택임씨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것을 역수입한 것인데,
① 당시 선산지역은 효공왕 10년(907) 후백제의 견훤이 탈취한 이후 신라가 망하고(935) 나서까지 후백제의 수중에 있었던 후삼국통일전쟁 최후의 격전지(936년 왕건이 승리하여 통일)였습니다. 즉 후백제 치하에 있었던 지역이므로 신라가 유배를 보내거나 살게 할 수 있는 안이한 지역이 아니었으며,
② 아무리 경순왕의 심기를 거슬렀다하더라도「나라의 충신」을 결코 귀양 보낼 수는 없는 일이며,
③ 국가 존망의 위급한 시점에서「유배」와 같은 한가한 조치가 이루어질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④ 또한「양저공의 묘가 선산 야성(野城)·평성(坪城)에 있다」하였는데 선산 귀양이야기가 허설인 이상 묘가 선산에 있을리 없으며,
⑤「이 이야기가 일선지(一善誌)에 있다」라고도 하는데『일선지』어디에도 임양저공 또는 공의 묘소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⑥「중랑장」이라는 벼슬은 원래 중국의 군직으로서 고려시대 도입된 것이며 신라에서는 공식직함으로 되어 있지 않았으나, 삼국통일 전쟁시기 신라군 장수중에 호칭한 예가 있습니다.
⑦「선산귀양」·「묘소」·「일선지」등 이야기는 결국 선산에 관련된 이야기 인데, 이는 곧 양저공과 그 설화의 원천이 선산임씨에 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⑧ 양저공설화가 나오는「회재공행장」은 선조 23년경 쓰인 글이고,『일선지』는 인조 때 또는 그 이후 편찬된 책이므로 글이 쓰여 진 연대를 보더라도 임양저공과 그 설화는「회재공행장」의 글이 원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7. 선산임씨는 호장(戶長) 종문(宗門)입니다. |
영남사림의 영수로 추앙받는 김종직(1413 세종13 ~ 1492 성종23)은 선산인으로 일찍이 선산부사를 지내면서 부친에 관한 에피소드를 담은『이존록(彛尊錄)』을 저술하였는데, 그 제1편이 시조 김선궁으로 부터 부친 김숙자까지의 족계(族系)를 쓴「선공보도(先公譜圖)」입니다. 이「선공보도」에 김종직의 직계 선조인 김선궁의 8세손 김지영의 처 외조부가 선산 호장 임은영(林銀永)입니다.
이로보아 선산임씨는 선산 지방 최고가문 선산김씨와 혼맥으로 이어진 사이이고 고려전기부터 선산김씨와 더불어 호장종문으로서 선산 지역 유력가문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호장은 향리의 수반으로서 유력가문이 맡았으며 대개 4인 이상의 복수로 구성되었습니다. - 자세한 내용을 <별첨논고>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