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발전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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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세거지(世居地)의 변천상황」에서

 

본바와 같이, 중시조 만(蔓)공께서 영암(靈岩)에 뿌리를 내리신 후 우리 선산임씨는,

1) 6백여 년의 문중역사(조선조의 역사와 비슷)

2) 24세(世)에 이르는 세계(世系)(『을해보』기준)

3) 총 인원수 10,060명(『을해보』수단인원)(2015년 통계 13,726명)

4) 종(宗), 수(秀)파의 인원비율은 대략 15% 대 85% 그중에서도 구령(九齡)공의 후손이 수(秀)파의 61%로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별첨자료「선산임씨 파별 분포현황」참조)

 

2. 다음으로 가문의 발전상황을

 

살펴보기 위하여 문과급제 상황을 보면 아래와 같이 총 6분이 등과하였습니다.

조선조 과거급제자 명단을 적은『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林氏의 총급제자 수는 124인 인데 그중 나주임씨가 51인, 평택임씨가 18인이고 그 다음이 선산임씨 6인입니다. 씨족 인원수 천 명 당 비율로 보면 선산임씨가 1인인데 제일 높은 비율입니다.

 

<선산임씨 문과급제자>

임백령(百齡) 1519 중종 14년 을묘식년시 갑과(장원)

임억령(億齡) 1525 중종 20년 을유식년시 병과

임 혼(渾) 1553 명종 8년 계축 친경별시 병과

임 색(氵策 ) 1556 명종 11년 병진별시 병과

임 현(晛) 1597 선조 30년 정유알성시 병과

임성익(聖翊) 1633 인조 11년 계유증광시 을과

※ 식년시(式年試)

- 자(子), 묘(卯), 오(午), 유(酉)에 해당하는 년도에 3년 마다 보이는 정시(定試)

※ 친경(親耕) 별시(別試)

- 임금이 친히 논밭갈이 행사를 한 후 보이는 별시

※ 알성시(謁聖試)

- 임금이 문묘(文廟)에 참배한 후 보이는 과시(科試)

※ 증광시(增廣試)

-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보이는 과시

 

1) 백령, 억령 두 분은 정시(定試)인 식년시에 등과하고 다른 분들은 임시시(臨時試)인 별시 또는 증광시에서 등과

2) 백령, 억령(진사), 현(진사)의 세분은 무보직 상태에서 등과하였으나 다른분들은 보직이 있는 상태에서 임시시에 등과

3) 무과(武科) 등과자도 있으나 급제자 수가 많고(임란 때에는 만오천명 이었다함) 확인할 근거자료가 없어 생략

 

3. 다음에『조선왕조실록』에 성명이 나오는

 

선림(善林)선조의 경우를 보면(다음의『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선조들 ”참조)

1) 문과등과자 6인을 비롯해 총 10분이 거명됨

2) 중종~영조 사이 10조(朝) 기간 동안 520건의 거명이 있었는데 그중 백령(百齡)조(祖)가 360건으로 절반을 넘고 있음

3) 중종 때 229건, 명종 때 209건으로 이때가 선림(善林)의 최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구 분

중종

인종

명종

선조

선조(수정)

광해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백 령

160

13

151

13

13

4

 

 

1

4

1

360

억 령

69

4

7

1

1

 

 

 

 

1

 

83

구 령

 

 

39

 

1

 

 

 

 

 

 

40

현 령(우정 자)

 

 

3

 

 

 

 

 

 

 

 

3

(백령 1자)

 

 

3

 

 

 

 

 

 

 

 

3

(백령 2자)

 

 

5

 

 

 

 

 

 

 

 

5

(백령 5자)

 

 

 

3

 

 

 

 

 

 

 

3

(구령 2자)

 

 

1

1

 

 

 

 

 

 

 

2

(구령 증손)

 

 

 

4

 

 

 

 

 

 

 

4

성 익(백령 증손)

 

 

 

 

 

 

8

9

 

 

 

17

229

17

209

22

15

4

8

9

1

5

1

520

 

<주>

 

1) 이 표는 『조선왕조실록』(인명색인)에 기록된 인명의 숫자임 (같은 쪽에 2회 이상 거명 될 수 있으므로 실제 숫자는 이보다 많을 수 있음)

2) 동일사건에 2회 이상 거명될 수 있으므로 사건수와 인명건수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

3) 현령, 필의 경우는 약간 불분명할 수 있음

 

4. 통혼(通婚)의 상대를 보고

 

가문의 성가(聲價)를 판정한다고 하였으니, 이번에는 당시의 외척과 외손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명문(名門) 반족(班族)

▷ 행주(幸州)기(奇)씨

기응세(奇應世) - 백령의 사위. 기묘명현(己卯名賢) 기준(奇遵)의 손자이고 성리학의 대가 기대승(奇大升)의 조카입니다. 그의 아들 기자헌(奇自獻)(백령외손)은 영의정까지 지냈습니다.

반남(潘南)박(朴)씨

박응복(朴應福) - 구령의 첫째사위. 선조 때 병조공조참판, 대사헌, 대사간을 지냈습니다. 그의 아들들(구령의 외손)중 박동열(朴東說)은 황해감사·대사성, 박동망(朴東望)은 길주 목사, 박동량(朴東亮)은 도승지·경기관찰사 등을 지내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호조판서였습니다. 박동열의 아들 박황(朴潢)은 대사헌·병조판서, 박동량의 아들 박미(朴彌)는 선조의 부마로서 금양군(錦陽君), 박의(朴漪)는 홍문관교리·장령이고 박의의 아들이 박세채(朴世采)입니다. 박세채는 어머니가 신흠의 딸이고, 송시열의 손자 순석(淳錫)이 그의 사위로서 인조·숙종 때 최고의 학자이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친 소론의 영도자로서 당대 명망의 정치가였습니다.

2) 문장가

최경창(崔慶昌)(구령의 둘째사위)

- 고려의 대학자 최충(崔沖)의 18대손으로 종성부사(鐘城府使)를 지냈 으며 삼당시인(三唐詩人), 8대 문장가(文章家)로 칭송받음

백광훈(白光勳)(우원의 사위인 정경문의 외손녀사위)

- 역시 삼당시인, 8대 문장가로 불렸으며 석천(石川)선생의 절친한 문하 생임. 그 아들 백진남(白振南) 또한 시부(詩賦)에 뛰어났음

임순(林恂)(색氵策 의 사위)·임환(林懽)(호浩의 사위)

- 나주 임씨로, 유명한 문인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아우들인데 그 형 제가 함께 임문(林門)으로 장가온 것은 기연이라 할 것입니다.

 

3) 왕가 후손

이 우춘(李遇春)(진溍의 둘째사위)

- 세종의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

이상형(李尙馨)(필泌의 손녀사위)

- 태종의 2남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

이정현(李廷賢)(호浩의 둘째사위)

-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현손

이규빈(혼渾의 사위)

- 효령대군의 6대손

4) 장군·의병

정운(鄭運)(우원의 외손)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결사적 출전을 주장. 옥포, 당포, 한산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부산포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 다대포 몰운대 앞 해전에서 순국

임발영(任發英)(천령의 외손)

- 임진왜란 때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서 종묘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왕을 따라 의주까지 따라감. 왕이 무과시험을 보게 하여 안주목사가 됨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 예양군(汭陽君)에 책봉

임충간(任忠幹)(천령의 외증손)

-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사수한 장군. 도총부 부총관을 지냄

이위(李渭)(찬澯의 사위)

- 최금남(崔錦南)의 외손으로서 남병사(南兵使)

유형(柳珩)(구령의 외손)

-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막료가 된 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부상을 입고도 전투를 지휘. 부산진첨절제사, 경상수군 절도사를 거쳐 1602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됨

- 그의 아들 유충걸(柳忠傑), 유효걸(柳孝傑)도 유명한 무장

임환(林懽)(호浩의 사위)

-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 이순신의『난중일기』를 보면 정유년 11월 15일 이순신과 만나는 기록이 나옴

- 그의 아들 임기(林垍)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킴

 

이와 같이 나열하고 보니 선림의 외척과 외손이 참으로 당당하고 화려하다 아니할 수 없으며,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당시 선림의 가세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할 것입니다.(별첨자료「선림 외손관계표」참조)

 

5. 이상과 같이 살펴본 우리 선림 가문의

 

발전과 통혼의 상황들을 보면 여기에는 몇 가지 주목할 특징이 있습니다.

1) 백령, 억령께서 비로소 등과(登科)하여 처음으로 환로(宦路-벼슬길)를 열었다는 점

2) 3령조(三齡祖)께서 역사상(왕조실록)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

3) 이리하여 선림이 비로소 세간에 알려지게 되고, 또한 3령조의 자녀부터 비로소 명문과의 통혼이 시작되었다는 점 등 입니다.

 

다시 말하면, 3령조께서 그 조상의 아무런 음보(蔭補)없이 요새말로 아무런 배경 없이 자수성가하여 오늘날의 선림의 토대를 구축하였다고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렵부터「선산임씨(善山林氏)」의 칭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그 이름도 알려져 소위 행세(行世)하기 시작하였지 않았나하고 생각되는 것이며 위의 여러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6. 그래서 우리「선산임씨」의 토대를 굳히신 분들이

 

바로 3령조(億·百·九의 齡자 祖)라 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 삼령조(억 · 백 · 구령)에 대하여

이와 같이 우리 선산임씨 종문(宗門)을 망족(望族)의 반열에 올려주신 세분 현조(顯祖)를 요약하자면,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조

- 3천여 수의 시(詩)를 창작하신「호남의 사종(詞宗)」으로서 선림의 학문, 도덕, 정신문화를 정립

충헌 임백령(忠憲 林百齡) 조

- 장원으로 급제한 당대 최고의 문신, 정 치가로서 선림의 환로(宦路) 및 가문의 기초를 구축

월당 임구령(月堂 林九齡) 조

- 종문의 가세(家勢)를 크게 확장한 활달 하고 호걸풍의 인물로서 선림의 개척정신과 농경문화를 창업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기 가문의 틀을 잡아주심으로서, 삼위일체가 되어 삼남(三南)의 망족(望族)으로 가성(家聲)을 한층 높여 주신 선조라 하겠습니다.

 

◇ 삼령조의 시대적 배경과 연보(年譜)의 이해

세 분에 관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연보의 요체를 미리 알고 계심이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되어 다음 사항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을사사화」의 성격 - 다른 사화와 달리「외척간의 권력투쟁」과「사림간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사건입니다.

2) 선조(宣祖)의 시대 -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士林)이 정치를 주도하는 시대가 전개되며 정치적으로는 붕당이 발생하는 시기입니다.

3) 『명종실록』- 이 글의 주된 전거(典據)가『명종실록』인데 이 실록은 사림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는 선조 초에 쓰여진 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즉, 선조1년(1568) 8월 영의정 이준경, 우의정 홍섬의 주재 하에 편찬회의가 개최되고 3년뒤 선조4년(1571) 4월에 완성되어 34권 34책으로 편찬되었습니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는 홍섬, 지춘추관사는 오겸, 이황 등 9인, 동지춘추관사는 박순, 김귀영 등 10인, 기타 편수관 20인, 기주관 17인, 기사관 20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각권마다 50~60개의「사론(史論)」(“史臣은 論한다” )이 수록되어 있는데 관료 개인에 대한 포폄(褒貶)이 절대다수를 차지합니다. 따라서「을사사건」당시 4인의 일등공신 중 한분인 임백령공에 대한「사론(史論)」의 폄하가 극심하고 상대적으로 임억령공에 대해서는 치하의 글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논지는 일부 개인 문집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편파적으로 기술되어 전하고 있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임백령」조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4) 연보(年譜)의 이해

인종의 승하와 명종의 즉위,「을사사건」의 시작과 결말, 문정왕후의 섭정종료와 사망, 윤원형의 몰락시기 등과 임억령, 임백령 공의 연대기 등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임백령공과 관련하여 기술하는 이 글의 깊은 의도는 공에 대한 사림들의「사론」의 폄하기사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천착에 있으며 공에 대한 진실을 캐어 종친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함이 그 목적입니다.

아울러 그간 임백령공과 임억령공을 대립의 관계에서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이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바램을 반영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두 분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 선림의 양대 기둥이 되시는 분들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합니다. 임구령공을 포함한 세분이 선림의 틀을 짜고 가성(家聲)을 드높이신 분들임에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입니다.

 

◇ 주요 연보

1516(중종 11)

 

임억령(21세), 임백령(19세) 진사시 합격

1519(중종 14)

 

임백령(22세) 문과 갑과(장원) 급제

1519(중종 14)

11.    

기묘사화

1525(중종 20)

 

임억령(30세) 문과 병과 급제

1544(중종 39)

8.  3

임백령 호조판서(정2)

 

9. 21

임억령 대사간(정3)

 

11. 15

중종 승하

 (인종즉위)

11. 20

인종 즉위

1545(인종 1)

7.  1

인종 승하

 (명종즉위)

7.  6

명종 즉위. 문정왕후 수렴청정

 

7.    

기묘사화 관련자의 죄명을 씻어줌

 

8. 22

을사사건의 시작(8.22-8.30)

 

8. 23

임백령 이조판서

 

8. 29

임백령 등 4인 일등공신하교

 

11.  7

임억령 금산군수 사직서제출

 

11. 18

임백령 의정부 우찬성(종1)

 

11. 26

임백령 정1품 보국숭록대부 숭선부원군에 가자

 

12. 20

임구령 형조정랑(정5)

1546(명종 1)

 2.  6

임구령 중직대부(종3) 제용감첨정(종4)

 

6. 29

임백령 서거(향년 49세)

1550(명종 5)

2. 11

임구령 광주목사(정3)

1551(명종 6)

 

윤원형 우의정

1552(명종 7)

7. 18

임억령 승정원 동부승지로 관직복귀

 

9. 12

임억령 병조참지(정3)

1553(명종 8)

7. 12

문정왕후 수렴청정 거두고 왕에게 귀정(歸政)

 

10. 21

임억령 강원관찰사(종2)

1557(명종 12)

3.  8

임억령 담양부사(1559 가을 사직)

1561(명종 16 )

4. 29

임구령 남원도호부사(종3)

1562(명종 17)

11. 26

임구령 서거(향년 62세)

1563(명종 18)

 

윤원형 영의정

1565(명종 20)

4.  6

문정왕후 서거

 

8. 21

윤원형 파직(11.18 죽음)

1567(명종 22)

2.    

조광조에 영의정 추증

 

6. 28

명종 승하

(선조즉위)

7.  3

선조즉위

1568(선조 1)

3.  9

임억령 서거(향년 73세)

1570(선조 3)

4.  1

위훈개삭 청계(請啓) 시작(이후 41회의 끈질긴 청계)

1577(선조 10)

11. 28

을사훈작 삭탈

 

12.  8

위훈 삭제 교서

 

 

 

1. 앞「세거지(世居地)의 변천상황」에서

 

본바와 같이, 중시조 만(蔓)공께서 영암(靈岩)에 뿌리를 내리신 후 우리 선산임씨는,

1) 6백여 년의 문중역사(조선조의 역사와 비슷)

2) 24세(世)에 이르는 세계(世系)(『을해보』기준)

3) 총 인원수 10,060명(『을해보』수단인원)(2015년 통계 13,726명)

4) 종(宗), 수(秀)파의 인원비율은 대략 15% 대 85% 그중에서도 구령(九齡)공의 후손이 수(秀)파의 61%로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별첨자료「선산임씨 파별 분포현황」참조)

 

2. 다음으로 가문의 발전상황을

 

살펴보기 위하여 문과급제 상황을 보면 아래와 같이 총 6분이 등과하였습니다.

조선조 과거급제자 명단을 적은『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林氏의 총급제자 수는 124인 인데 그중 나주임씨가 51인, 평택임씨가 18인이고 그 다음이 선산임씨 6인입니다. 씨족 인원수 천 명 당 비율로 보면 선산임씨가 1인인데 제일 높은 비율입니다.

 

<선산임씨 문과급제자>

임백령(百齡) 1519 중종 14년 을묘식년시 갑과(장원)

임억령(億齡) 1525 중종 20년 을유식년시 병과

임 혼(渾) 1553 명종 8년 계축 친경별시 병과

임 색(氵策 ) 1556 명종 11년 병진별시 병과

임 현(晛) 1597 선조 30년 정유알성시 병과

임성익(聖翊) 1633 인조 11년 계유증광시 을과

※ 식년시(式年試)

- 자(子), 묘(卯), 오(午), 유(酉)에 해당하는 년도에 3년 마다 보이는 정시(定試)

※ 친경(親耕) 별시(別試)

- 임금이 친히 논밭갈이 행사를 한 후 보이는 별시

※ 알성시(謁聖試)

- 임금이 문묘(文廟)에 참배한 후 보이는 과시(科試)

※ 증광시(增廣試)

-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보이는 과시

 

1) 백령, 억령 두 분은 정시(定試)인 식년시에 등과하고 다른 분들은 임시시(臨時試)인 별시 또는 증광시에서 등과

2) 백령, 억령(진사), 현(진사)의 세분은 무보직 상태에서 등과하였으나 다른분들은 보직이 있는 상태에서 임시시에 등과

3) 무과(武科) 등과자도 있으나 급제자 수가 많고(임란 때에는 만오천명 이었다함) 확인할 근거자료가 없어 생략

 

3. 다음에『조선왕조실록』에 성명이 나오는

 

선림(善林)선조의 경우를 보면(다음의『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선조들 ”참조)

1) 문과등과자 6인을 비롯해 총 10분이 거명됨

2) 중종~영조 사이 10조(朝) 기간 동안 520건의 거명이 있었는데 그중 백령(百齡)조(祖)가 360건으로 절반을 넘고 있음

3) 중종 때 229건, 명종 때 209건으로 이때가 선림(善林)의 최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구 분

중종

인종

명종

선조

선조(수정)

광해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백 령

160

13

151

13

13

4

 

 

1

4

1

360

억 령

69

4

7

1

1

 

 

 

 

1

 

83

구 령

 

 

39

 

1

 

 

 

 

 

 

40

현 령(우정 자)

 

 

3

 

 

 

 

 

 

 

 

3

(백령 1자)

 

 

3

 

 

 

 

 

 

 

 

3

(백령 2자)

 

 

5

 

 

 

 

 

 

 

 

5

(백령 5자)

 

 

 

3

 

 

 

 

 

 

 

3

(구령 2자)

 

 

1

1

 

 

 

 

 

 

 

2

(구령 증손)

 

 

 

4

 

 

 

 

 

 

 

4

성 익(백령 증손)

 

 

 

 

 

 

8

9

 

 

 

17

229

17

209

22

15

4

8

9

1

5

1

520

 

<주>

 

1) 이 표는 『조선왕조실록』(인명색인)에 기록된 인명의 숫자임 (같은 쪽에 2회 이상 거명 될 수 있으므로 실제 숫자는 이보다 많을 수 있음)

2) 동일사건에 2회 이상 거명될 수 있으므로 사건수와 인명건수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

3) 현령, 필의 경우는 약간 불분명할 수 있음

 

4. 통혼(通婚)의 상대를 보고

 

가문의 성가(聲價)를 판정한다고 하였으니, 이번에는 당시의 외척과 외손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명문(名門) 반족(班族)

▷ 행주(幸州)기(奇)씨

기응세(奇應世) - 백령의 사위. 기묘명현(己卯名賢) 기준(奇遵)의 손자이고 성리학의 대가 기대승(奇大升)의 조카입니다. 그의 아들 기자헌(奇自獻)(백령외손)은 영의정까지 지냈습니다.

반남(潘南)박(朴)씨

박응복(朴應福) - 구령의 첫째사위. 선조 때 병조공조참판, 대사헌, 대사간을 지냈습니다. 그의 아들들(구령의 외손)중 박동열(朴東說)은 황해감사·대사성, 박동망(朴東望)은 길주 목사, 박동량(朴東亮)은 도승지·경기관찰사 등을 지내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호조판서였습니다. 박동열의 아들 박황(朴潢)은 대사헌·병조판서, 박동량의 아들 박미(朴彌)는 선조의 부마로서 금양군(錦陽君), 박의(朴漪)는 홍문관교리·장령이고 박의의 아들이 박세채(朴世采)입니다. 박세채는 어머니가 신흠의 딸이고, 송시열의 손자 순석(淳錫)이 그의 사위로서 인조·숙종 때 최고의 학자이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친 소론의 영도자로서 당대 명망의 정치가였습니다.

2) 문장가

최경창(崔慶昌)(구령의 둘째사위)

- 고려의 대학자 최충(崔沖)의 18대손으로 종성부사(鐘城府使)를 지냈 으며 삼당시인(三唐詩人), 8대 문장가(文章家)로 칭송받음

백광훈(白光勳)(우원의 사위인 정경문의 외손녀사위)

- 역시 삼당시인, 8대 문장가로 불렸으며 석천(石川)선생의 절친한 문하 생임. 그 아들 백진남(白振南) 또한 시부(詩賦)에 뛰어났음

임순(林恂)(색氵策 의 사위)·임환(林懽)(호浩의 사위)

- 나주 임씨로, 유명한 문인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아우들인데 그 형 제가 함께 임문(林門)으로 장가온 것은 기연이라 할 것입니다.

 

3) 왕가 후손

이 우춘(李遇春)(진溍의 둘째사위)

- 세종의 5남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

이상형(李尙馨)(필泌의 손녀사위)

- 태종의 2남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

이정현(李廷賢)(호浩의 둘째사위)

-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현손

이규빈(혼渾의 사위)

- 효령대군의 6대손

4) 장군·의병

정운(鄭運)(우원의 외손)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결사적 출전을 주장. 옥포, 당포, 한산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부산포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 다대포 몰운대 앞 해전에서 순국

임발영(任發英)(천령의 외손)

- 임진왜란 때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서 종묘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왕을 따라 의주까지 따라감. 왕이 무과시험을 보게 하여 안주목사가 됨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 예양군(汭陽君)에 책봉

임충간(任忠幹)(천령의 외증손)

-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사수한 장군. 도총부 부총관을 지냄

이위(李渭)(찬澯의 사위)

- 최금남(崔錦南)의 외손으로서 남병사(南兵使)

유형(柳珩)(구령의 외손)

-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막료가 된 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부상을 입고도 전투를 지휘. 부산진첨절제사, 경상수군 절도사를 거쳐 1602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됨

- 그의 아들 유충걸(柳忠傑), 유효걸(柳孝傑)도 유명한 무장

임환(林懽)(호浩의 사위)

-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 이순신의『난중일기』를 보면 정유년 11월 15일 이순신과 만나는 기록이 나옴

- 그의 아들 임기(林垍)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킴

 

이와 같이 나열하고 보니 선림의 외척과 외손이 참으로 당당하고 화려하다 아니할 수 없으며,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당시 선림의 가세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할 것입니다.(별첨자료「선림 외손관계표」참조)

 

5. 이상과 같이 살펴본 우리 선림 가문의

 

발전과 통혼의 상황들을 보면 여기에는 몇 가지 주목할 특징이 있습니다.

1) 백령, 억령께서 비로소 등과(登科)하여 처음으로 환로(宦路-벼슬길)를 열었다는 점

2) 3령조(三齡祖)께서 역사상(왕조실록)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

3) 이리하여 선림이 비로소 세간에 알려지게 되고, 또한 3령조의 자녀부터 비로소 명문과의 통혼이 시작되었다는 점 등 입니다.

 

다시 말하면, 3령조께서 그 조상의 아무런 음보(蔭補)없이 요새말로 아무런 배경 없이 자수성가하여 오늘날의 선림의 토대를 구축하였다고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렵부터「선산임씨(善山林氏)」의 칭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그 이름도 알려져 소위 행세(行世)하기 시작하였지 않았나하고 생각되는 것이며 위의 여러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6. 그래서 우리「선산임씨」의 토대를 굳히신 분들이

 

바로 3령조(億·百·九의 齡자 祖)라 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 삼령조(억 · 백 · 구령)에 대하여

이와 같이 우리 선산임씨 종문(宗門)을 망족(望族)의 반열에 올려주신 세분 현조(顯祖)를 요약하자면,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조

- 3천여 수의 시(詩)를 창작하신「호남의 사종(詞宗)」으로서 선림의 학문, 도덕, 정신문화를 정립

충헌 임백령(忠憲 林百齡) 조

- 장원으로 급제한 당대 최고의 문신, 정 치가로서 선림의 환로(宦路) 및 가문의 기초를 구축

월당 임구령(月堂 林九齡) 조

- 종문의 가세(家勢)를 크게 확장한 활달 하고 호걸풍의 인물로서 선림의 개척정신과 농경문화를 창업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기 가문의 틀을 잡아주심으로서, 삼위일체가 되어 삼남(三南)의 망족(望族)으로 가성(家聲)을 한층 높여 주신 선조라 하겠습니다.

 

◇ 삼령조의 시대적 배경과 연보(年譜)의 이해

세 분에 관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연보의 요체를 미리 알고 계심이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되어 다음 사항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을사사화」의 성격 - 다른 사화와 달리「외척간의 권력투쟁」과「사림간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사건입니다.

2) 선조(宣祖)의 시대 -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士林)이 정치를 주도하는 시대가 전개되며 정치적으로는 붕당이 발생하는 시기입니다.

3) 『명종실록』- 이 글의 주된 전거(典據)가『명종실록』인데 이 실록은 사림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는 선조 초에 쓰여진 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즉, 선조1년(1568) 8월 영의정 이준경, 우의정 홍섬의 주재 하에 편찬회의가 개최되고 3년뒤 선조4년(1571) 4월에 완성되어 34권 34책으로 편찬되었습니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는 홍섬, 지춘추관사는 오겸, 이황 등 9인, 동지춘추관사는 박순, 김귀영 등 10인, 기타 편수관 20인, 기주관 17인, 기사관 20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각권마다 50~60개의「사론(史論)」(“史臣은 論한다” )이 수록되어 있는데 관료 개인에 대한 포폄(褒貶)이 절대다수를 차지합니다. 따라서「을사사건」당시 4인의 일등공신 중 한분인 임백령공에 대한「사론(史論)」의 폄하가 극심하고 상대적으로 임억령공에 대해서는 치하의 글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논지는 일부 개인 문집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편파적으로 기술되어 전하고 있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임백령」조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4) 연보(年譜)의 이해

인종의 승하와 명종의 즉위,「을사사건」의 시작과 결말, 문정왕후의 섭정종료와 사망, 윤원형의 몰락시기 등과 임억령, 임백령 공의 연대기 등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임백령공과 관련하여 기술하는 이 글의 깊은 의도는 공에 대한 사림들의「사론」의 폄하기사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천착에 있으며 공에 대한 진실을 캐어 종친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함이 그 목적입니다.

아울러 그간 임백령공과 임억령공을 대립의 관계에서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이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바램을 반영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두 분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 선림의 양대 기둥이 되시는 분들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합니다. 임구령공을 포함한 세분이 선림의 틀을 짜고 가성(家聲)을 드높이신 분들임에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입니다.

 

◇ 주요 연보

1516(중종 11)

 

임억령(21세), 임백령(19세) 진사시 합격

1519(중종 14)

 

임백령(22세) 문과 갑과(장원) 급제

1519(중종 14)

11. 

기묘사화

1525(중종 20)

 

임억령(30세) 문과 병과 급제

1544(중종 39)

8.  3

임백령 호조판서(정2)

 

9. 21

임억령 대사간(정3)

 

11. 15

중종 승하

 (인종즉위)

11. 20

인종 즉위

1545(인종 1)

7.  1

인종 승하

 (명종즉위)

7.  6

명종 즉위. 문정왕후 수렴청정

 

7.    

기묘사화 관련자의 죄명을 씻어줌

 

8. 22

을사사건의 시작(8.22-8.30)

 

8. 23

임백령 이조판서

 

8. 29

임백령 등 4인 일등공신하교

 

11.  7

임억령 금산군수 사직서제출

 

11. 18

임백령 의정부 우찬성(종1)

 

11. 26

임백령 정1품 보국숭록대부 숭선부원군에 가자

 

12. 20

임구령 형조정랑(정5)

1546(명종 1)

 2.  6

임구령 중직대부(종3) 제용감첨정(종4)

 

6. 29

임백령 서거(향년 49세)

1550(명종 5)

2. 11

임구령 광주목사(정3)

1551(명종 6)

 

윤원형 우의정

1552(명종 7)

7. 18

임억령 승정원 동부승지로 관직복귀

 

9. 12

임억령 병조참지(정3)

1553(명종 8)

7. 12

문정왕후 수렴청정 거두고 왕에게 귀정(歸政)

 

10. 21

임억령 강원관찰사(종2)

1557(명종 12)

3.  8

임억령 담양부사(1559 가을 사직)

1561(명종 16 )

4. 29

임구령 남원도호부사(종3)

1562(명종 17)

11. 26

임구령 서거(향년 62세)

1563(명종 18)

 

윤원형 영의정

1565(명종 20)

4.  6

문정왕후 서거

 

8. 21

윤원형 파직(11.18 죽음)

1567(명종 22)

2.    

조광조에 영의정 추증

 

6. 28

명종 승하

(선조즉위)

7.  3

선조즉위

1568(선조 1)

3.  9

임억령 서거(향년 73세)

1570(선조 3)

4.  1

위훈개삭 청계(請啓) 시작(이후 41회의 끈질긴 청계)

1577(선조 10)

11. 28

을사훈작 삭탈

 

12.  8

위훈 삭제 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