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나라 성의 시작과 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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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용원

2. 우리나라 성의 시작과 보급

1) 우리나라에서의 성씨의 호칭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씨의 발원지인 중국에서의“성(姓)”은 혈연조직의 표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최초는 모권사회인 모계중심으로)“씨(氏)”는 부권가장제(父權家長制)가 성립되면서 그 수령의 존호로서 호칭하였는데 선진(先秦)시기 씨는 대개 부족을 나타내거나 종지(宗支)를 나타내는 휘호였다.(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념과는 다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기존의 봉건질서가 무너지면서 그리고 한(漢)대로 이어지면서 성과 씨를 구별하지 않거나 따로 또는 합쳐서 사용하게 됨으로서 오늘날의 성씨제도로 변환되어 온 것이다.

중국의 성씨제도를 도입한 우리나라는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거나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의 칭호로서 성과 씨를 사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동계 혈족집단의 명칭으로“성”을 표지로 삼고, 호칭이나 존칭의 수단으로“씨”를 붙여 부르는 것으로 바뀌어 있다.(「씨」의 원래 기능이 존칭이었다.)

 

성과 씨는 역사상 때로는 함께 붙여서, 때로는 각기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관과 함께 사용하여 혈연관계가 없는 동일한 성과 구분한다. 동일한 혈통을 가진 자가 각지에 분산하게 될 때 각기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나타내기 위한 표지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씨”라 할 수 있다. 『좌전(左傳)』에서“조지토(胙之土), 이명지씨(而命之氏)”즉“공적의 보답으로 땅을 주어 이 땅으로서‘씨’를 명하였다.”(胙-갚을〈報〉조)고 하는 설명으로 보면 씨는 곧 지명에 의하여 명명됨을 알 수가 있는데 씨는 분화된 혈통(성)의 각기 지연을 표시하는 표지인 것이 분명하며 그 본원적 의미는 성의 분파를 뜻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말하는 성은 혈통의 연원을 표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성에 해당되며 씨란 같은 성에서도 소유한 지역으로서 분별한 것이므로 우리의 본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선산임씨, 경주김씨, 밀양박씨 등의“씨”자에는 존칭의 의미도 잠재하지만 본관을 표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이수건 교수의『한국의 성씨와 족보』71쪽~73쪽 참조) 씨는 또한 조선시대 양반의 처에 대한 이름대용의 경칭적 칭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가(哥)”의 호칭 -“김가”, “이가”하는 “가”의 호칭은 그 원래 의미가 손위 사람이나 친한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인데, 간혹 남에게 소개할 때 낮춤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들은 “씨”로 부르고, 상민들은 “가”로 불렀는데 연유하는 것 같다.

 

2) 우리나라 성의 시작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이 성립하기 이전의 고대 씨족사회에서는 아직 성이라는 것이 없었다. 중국과 이웃하여 있던 관계로 그 교류의 영향으로 중국 문화를 수입한 이후 중국식을 모방한 한자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외교사절의 교류 시 성씨의 호칭이 꼭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런데『삼국사기』,『삼국유사』등 옛 사적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국호를「고구려」라 하였으므로「고씨」라 하고「백제」는 시조 온조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하여「부여씨」라 하였다하며,「신라」는「박·석·김」3성의 전설이 있고 3대 유리왕 때 6부(촌)에「이·최·정·손·설·배」등 6성을 주었다고 하며,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알에서 탄생하였다하여 성을「김씨」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때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모두 후대에 와서 소급 추기(追記)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 지어낸 것이다. 왜냐하면 진흥왕순수비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현존 금석문에는 관계 인물의 소속 부명(部名)과 이름만 나오고 한자성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7세기 초부터 김, 박 양성이 중국사서에 나타난다.

 

『구당서』신라열전에“기왕김진평(其王金眞平)…국인다김박양성 이성불위혼(國人多金朴兩姓 異姓不爲婚)”,『신당서』동이 신라전에“왕성김(王姓金), 귀인성박(貴人姓朴), 민무씨유명(民無氏有名)”이라는 기사가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전에는 한자성이 전무하다가 진평왕(579~632)때부터, 왕·왕자 및 당에 파견된 사절 가운데 김씨와 박씨가 나타나며 신라말기에는 신김씨가 금석문에 나오는데 이는 김유신계의 가락 김씨이다. 한편 고구려는 대략 장수왕(413~491)때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346~374)때부터「여(餘)」씨라 하였다가 무왕(600~640)때부터「부여(扶餘)」씨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540~576)때부터「김」성을 사용하였다.

 

『삼국사기』와『당서』이전의 중국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그 외의 성은 고구려는 해(解) · 을(乙) · 예(禮) · 송(松) · 목(穆) · 우(于) · 주(周) · 마(馬) · 손(孫) · 창(倉) · 동(董) · 예(芮) · 연(淵) · 명림(明臨) · 을지(乙支) 등 10여종이며, 백제는 사(沙) · 연(燕) · 협(劦) · 해(解) · 진(眞) · 국(國) · 목(木) · 백(苩)의 8대성 ( *백제 8대성 - 백제 상층부를 구성하는대귀족으로서 북에서 내려온 부여, 고구려계통의 귀족과 마한의 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다시 찾는 우리 역사』 106쪽 각주 참조)과 왕(王) · 장(張) · 사마(司馬) · 수미(首彌) · 고이(古爾) · 흑치(黑齒)등 10여종이다. 신라는 왕성 3성 (박 · 석 · 김)과 신 김씨(김유신계 가락 김씨), 옛 신라의 전신 사로국의 6촌 장성 (6성-이 · 최 · 정 · 손 · 배 · 설), 장(張) · 요(姚)등 10여종에 불과하다.

 

3) 신라시대 성의 확대

우리나라에서 중국식 한자성(이하 '한성'이라 함)의 수용과정은 왕실 → 귀족 → 일반 지배층 → 양민·평민 순으로 보급되어 갔다.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서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계의 성씨를 중심으로 한성이 보급되었는데 특히 후삼국시대 호족층을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신라시대 성씨 취득과정을 유형별로 보면

(1) 박·석·김·신 김씨와 같이 왕실지배층의 성의 사용

(2) 통일전후의 6부사성

(3) 나당관계에서 견당(遣唐)사신·견당유학·숙위(宿衛)학생·입당수도승·기타 중국에 내왕한 인사(장보고·정년 등)들로 나눌 수 있다.

 

* 『입당구법순례행기』 (일본승려 엔닌 圓仁(794~864)이 신라선편으로 838년 입당 847년 귀국때까지의 여행기)에 나오는 신라인 一林대사, 장보고, 설전, 장영, 남판관, 역원 김정남 · 박정장 · 유(劉)신언 · 왕청, 선주 김진 · 이인덕 · 왕가창, 여행자 왕종 · 이국우, 신라방 거주자 흠양휘 등 다수

 

『삼국사기』권4「신라본기」에 보면 진흥왕 19년(558) 2월 조에“귀족자제와 6부호민(豪民)을 옮겨 국원경(國原京-원주)을 채웠다.”고 하고 외관지위(外官地位)조(권40 잡지9)에“문무왕 14년(674)에 6도(六徒) 진골로서 5경과 9주에 나가 살게 하고 관명을 별도로 호칭케 하였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신라는 9주 5소경에 정책적으로 중앙의 귀족을 이주시킨 결과 왕경의 신라 귀성이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중앙귀족의 집단이주와 함께 주·군·현에 파견되었던 외관들이 나말에 임지에서 그대로 정착함으로서 이미 한성화한 가문이 사방으로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이렇게 일찍부터 외거하기 시작한 중앙귀족의 후예들과 나대 재래의 토착촌주층이 중심이 되어 후삼국시대의 정치사회적 변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지방군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호족층이었다. (고려개국에 참여한 진천지역 임씨들을 상정해 보자) 이렇게 지방에 확산된 중앙귀족관인 가운데는 한성화 전에 이주한 자와 그 뒤에 이주한 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편 신라 6성의 대두시기는 설씨는 삼국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 정·손·배씨는 통일신라이후, 최씨는 신라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여기서 참고할 것은 한성화의 과정과 그 씨족의 분화, 발전과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3성 또는 6성이 한성화한 시기가 통일신라이후라 할지라도 그 가문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이다.(친족공동체의 거주지 명칭이 성의 기능을 가졌고 ‘그 지방에 살고 있는 친족공동체’가 성의 주체) 참고로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동성불혼의 관념이 점차 수용되어 가고 있었는데 신라 왕실은 철저히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책명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성불혼의 예에 따라 동성의 왕비의 성을 왕의 성과 다른 성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는 왕모 또는 왕비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숙씨(叔氏) · 신씨(申氏) · 정씨(貞氏)와 같은 성자를 사용했던 것이며, 고려시대에도 왕실은 근친혼이었는데 동성의 왕비는 모성 또는 외조모성을 따르게 했으며 이러한 관념이 지배층에 보급되자 성과 본관의 분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이상『한국의 성씨와 족보』96~99쪽,『한국 중세사회사 연구』54~56쪽 참조)

 

4) 후삼국시대의 성씨

후삼국시대 지방호족의 성씨 취득은, 지방사회 자체 내에서의 성장과 신라중앙문화의 지방에로의 확산이라는 두 가지 사회적 배경과 신라하대 중앙통제력의 점진적 약화라는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신라가 통일 후 귀족을 9주5소경에 분산시킬 때 신라의 귀족성이 사방으로 확산되었고 신라말기에 촌주(村主), 성주(城主), 진장(鎭長) 등은 스스로 호족이 되어 성을 자칭하였다. 다른 한편 신라의 지배 체제는 골품제하에 편제된 왕경, 6부민들의 후예들이 지배집단을 이루어 지방민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9세기 이후 나라가 쇠퇴해지자 촌주, 성주, 진장 등 지방 세력이 스스로 군사력을 갖추고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호족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신라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면서 재래의 군현조직과 촌주층의 직제를 통하여 지방행정에 참여해온 경험과 발달된 중앙관제의 영향 속에서 중앙관제에 방불한 스스로의 관반(官班)을 형성하고 주민을 통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후삼국시대 중앙권력 약화 속에 지방의 지배계층으로 등장한 호족들은 사성(賜姓), 모성(冒姓), 자칭성(自稱姓)등의 수단을 통하여 성씨를 취득하게 되고, 고려의 재통일후 태조왕건에 의하여 전국 군현별로 각기 토성이 분정(分定)되면서 성씨체계가 비로소 확립되게 된 것이다.

 

5) 고려의 통일과 성씨체계의 확립

이와 같이 신라 말기 재지호족들을 중심으로 한 토성들이 왕건의 토성 분정 정책에 따라 지역별로 성씨를 취득하게 되면서 성씨는 광범위하게 그 보급이 확장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한때 왕건은 호족을 포섭하는 정책에 우선을 두고 이를 실천 하는 방법으로 결혼정책과 사성(賜姓)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유력한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왕후가 6명 부인이 23명에 이르렀다. 이들 29명의 출신지를 보면 옛 신라, 백제, 고구려 지역에 골고루 망라되어 있다. 또 귀순해 오는 호족들에게 왕씨의 성을 주어 왕족으로 포섭하기도 하고 다른 성씨를 주기도 하였다.

 

영조 27년(1751)에 저술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현지답사를 기초로 하여 저술한 우리나라 지리서. 그 내용이 역사 경제 사회 교통 등 다방면을 다루고 있다.) 에 보면 우리의 성씨 보급 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등에서 이러한 주장의 확실한 근거자료는 없지만

① 통일신라의 군현조직체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지배기구를 이어 받은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작업과 함께 940년(태조 23)경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군현토성을 분정 하였다는 사실

② 왕건은 즉위 이래 개국관료, 개국공신 및 귀순 호족들에 대한 사성을 광범위하게 실시

③ 신라의 왕성 3성과 6부성 등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한 기존 한성(漢姓)과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각 성의 시작은 대부분 고려초기로 잡고 있다는 사실

④ 『고려사』태조세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분석해보면 태조 23년경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는 당초의 고유이름으로 칭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다가 그 이후부터는 한식(漢式) 성명으로 일반화되고 있으며, 광종을 거쳐 성종대(982~997)와 현종대(1010~1031)로 내려오게 되면 이름만 지칭하는 인물이 관료계층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성종이후가 되면 관인은 물론 지방군현의 양민층에게 까지 한성이 보급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성씨 체계의 확립은 고려 초로 볼수 있으며,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 분파로 성의 분화와 발전이 있었다. 이후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 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그것이『세종실록지리지』와『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것이다. 참고로 후삼국시대에 활약한 지배세력 가운데 그들 토성의 변천과정을 몇 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보면,

 

① 고려의 개국 및 통일과정에서 지방호족으로 대두하여 왕건의 부하 장상(將相)과 개국 및 삼한공신이 되면서 귀족, 명문으로 발전한 계열이 있다.

② 후삼국시대 유력한 호족 가운데 고유이름만 가진 인물이 후대에 그 출신지의 토성과 연결되지 아니한 자도 많았다.(반역, 모역 등으로 토성을 갖기 전에 족세가 몰락한 경우 등)

③ 고려 초기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후손이 현달(顯達)함에 따라 초기의 공신이 노출되는 가문도 있었다.(파평윤씨, 철원최씨, 청주이씨, 나주나씨, 남양홍씨, 죽산박씨, 청주한씨, 경주이씨, 안동권·김씨 등) 이들은 강력한 토착적 배경으로 고려에 귀순하여 왕건으로 부터 공신 호를 받았지만 그대로 재지에서 토착하다가 그 후손들이 현달함으로서 묻혀있던 선조의 공신 호가 노출된 것이다.

④ 현종 조부터 대두하는 귀족, 관인 가운데는 지방군현의 호장층 자손이 많았다.(해주최씨, 수원최씨, 장단한씨, 동래정씨, 전주이씨, 전주최씨, 충주양씨 등)

⑤ 각 읍의 토성이 형성되어 감과 동시에 종전의 토성이 소멸되어 망성(亡姓)이 늘어나고 토착 성씨의 이동이 빈번해짐에 따라 래성, 입진성 등이 증가해 갔다.

 

6) 성자(姓字)의 유래와 성씨의 보급과정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태조 23년(940) 3월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하면서 경주를 대도독부로 승격하고 6성(六姓)의 출자처인 6부의 명칭을 개정하는 한편 후일의 호장(戶長)인 당제(堂祭:堂大等) 10명을 크게 개차(改差)하였다. 이때 명칭이 개정된 읍수는 218군현으로서 종전의 9주5소경을 비롯한 전국의 대읍은 물론 일부의 소현까지 미치고 있다.

 

◇ 토성의 분정(分定)

고려왕조를 창건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적극 참여했던 전국의 크고 작은 호족에 대하여 제각기 출신지 군현의 토성으로 지정하면서 이른바 군현토성의 분정이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본관을 국가가 지정해주는 결과가 된것이며 『세종실록지리지』소재 성씨들은 이때를 기하여 시작된 것이다. 통일당시의 지방사회는 호족층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국가권력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이들의 기득권을 약화시켜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이 군현토성 분정배경은 좁고 폐쇄적인 신라의 골품제도를 청산하고 새 왕조를 담당할 새로운 지배신분을 편성하는데 있었다.

 

◇ 성자(姓字)는 어디서 왔을까?

역사적으로 보아 나당간의 활발한 문물교류와 신라의 한화(漢化) 정책에 의하여 한식(漢式) 지명의 개정과 함께 중국의 유명성씨를 수입 모방한 것이다. 이는『세종실록지리지』성씨조의 대부분 성자(姓字)가 당대(唐代)의『씨족지』나『천하군망표(天下郡望表)』에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성씨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태조 왕건의 군현토성분정책은 북위 효문제의‘성족분정(姓族分定)’작업이나 당태종의『정관(貞觀) 씨족지』편찬사업과 비교될 만하다. 『세종실록지리지』성씨조의 성이 250여개 인데, 이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보면 대부분 이의 것을 모방하였다. ‘군망표’에 없는 성자는 박(朴), 심(沈), 하(河), 옥(玉), 명(明), 준(俊), 석(昔), 제(諸), 익(益), 삼(森), 방(邦), 방(芳), 가(價), 승(勝), 탁(濯), 승(承) 등 16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도 박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초(鄭樵)의 『통지략(通志略)』「씨족지」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 성씨의 보급과정

성씨의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보면,

① 신라말기 부터 통일신라하대 까지는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로 볼 수 있으며

② 지배층에게 보급되어 성과 본관 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초기이며

③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체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無姓層)으로 남아있던 공사노비, 화척(禾尺-백정 같은 천민), 향·소·부곡민, 역·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부분적으로 성씨를 취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후기였다.

 

조선전기(1500년대) 까지만 하여도 성이 없는 천민층이 절반 가까이 되었다하는데 조선후기 300년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신분해방과 함께 성을 새로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성의 대중화를 촉진시켰으며 1909년 새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된다.

 

 

* 백제 8대성 - 백제 상층부를 구성하는 대귀족으로서 북에서 내려온 부여, 고구려계통의 귀족과 마한의 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다시 찾는 우리 역사』106쪽 각주 참조).

* 신라 3성 - 혁거세거서간(박), 탈해니사금(석), 김알지의 후손(13대 미추니사금, 17대 내물마립간 등)인 왕족의 성(왕의 호칭은 22대 지증왕 때부터임)신 김씨-가야에서 온 김유신계 가락김씨

* 신라 6성 - 옛 신라의 전신 사로국의 6촌장 성

 

- 임용원

2. 우리나라 성의 시작과 보급

1) 우리나라에서의 성씨의 호칭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씨의 발원지인 중국에서의“성(姓)”은 혈연조직의 표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최초는 모권사회인 모계중심으로)“씨(氏)”는 부권가장제(父權家長制)가 성립되면서 그 수령의 존호로서 호칭하였는데 선진(先秦)시기 씨는 대개 부족을 나타내거나 종지(宗支)를 나타내는 휘호였다.(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념과는 다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기존의 봉건질서가 무너지면서 그리고 한(漢)대로 이어지면서 성과 씨를 구별하지 않거나 따로 또는 합쳐서 사용하게 됨으로서 오늘날의 성씨제도로 변환되어 온 것이다.

중국의 성씨제도를 도입한 우리나라는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거나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의 칭호로서 성과 씨를 사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동계 혈족집단의 명칭으로“성”을 표지로 삼고, 호칭이나 존칭의 수단으로“씨”를 붙여 부르는 것으로 바뀌어 있다.(「씨」의 원래 기능이 존칭이었다.)

 

성과 씨는 역사상 때로는 함께 붙여서, 때로는 각기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관과 함께 사용하여 혈연관계가 없는 동일한 성과 구분한다. 동일한 혈통을 가진 자가 각지에 분산하게 될 때 각기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나타내기 위한 표지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씨”라 할 수 있다. 『좌전(左傳)』에서“조지토(胙之土), 이명지씨(而命之氏)”즉“공적의 보답으로 땅을 주어 이 땅으로서‘씨’를 명하였다.”(胙-갚을〈報〉조)고 하는 설명으로 보면 씨는 곧 지명에 의하여 명명됨을 알 수가 있는데 씨는 분화된 혈통(성)의 각기 지연을 표시하는 표지인 것이 분명하며 그 본원적 의미는 성의 분파를 뜻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말하는 성은 혈통의 연원을 표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성에 해당되며 씨란 같은 성에서도 소유한 지역으로서 분별한 것이므로 우리의 본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선산임씨, 경주김씨, 밀양박씨 등의“씨”자에는 존칭의 의미도 잠재하지만 본관을 표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이수건 교수의『한국의 성씨와 족보』71쪽~73쪽 참조) 씨는 또한 조선시대 양반의 처에 대한 이름대용의 경칭적 칭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가(哥)”의 호칭 -“김가”, “이가”하는 “가”의 호칭은 그 원래 의미가 손위 사람이나 친한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인데, 간혹 남에게 소개할 때 낮춤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들은 “씨”로 부르고, 상민들은 “가”로 불렀는데 연유하는 것 같다.

 

2) 우리나라 성의 시작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이 성립하기 이전의 고대 씨족사회에서는 아직 성이라는 것이 없었다. 중국과 이웃하여 있던 관계로 그 교류의 영향으로 중국 문화를 수입한 이후 중국식을 모방한 한자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외교사절의 교류 시 성씨의 호칭이 꼭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런데『삼국사기』,『삼국유사』등 옛 사적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국호를「고구려」라 하였으므로「고씨」라 하고「백제」는 시조 온조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하여「부여씨」라 하였다하며,「신라」는「박·석·김」3성의 전설이 있고 3대 유리왕 때 6부(촌)에「이·최·정·손·설·배」등 6성을 주었다고 하며,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알에서 탄생하였다하여 성을「김씨」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때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모두 후대에 와서 소급 추기(追記)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 지어낸 것이다. 왜냐하면 진흥왕순수비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현존 금석문에는 관계 인물의 소속 부명(部名)과 이름만 나오고 한자성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7세기 초부터 김, 박 양성이 중국사서에 나타난다.

 

『구당서』신라열전에“기왕김진평(其王金眞平)…국인다김박양성 이성불위혼(國人多金朴兩姓 異姓不爲婚)”,『신당서』동이 신라전에“왕성김(王姓金), 귀인성박(貴人姓朴), 민무씨유명(民無氏有名)”이라는 기사가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전에는 한자성이 전무하다가 진평왕(579~632)때부터, 왕·왕자 및 당에 파견된 사절 가운데 김씨와 박씨가 나타나며 신라말기에는 신김씨가 금석문에 나오는데 이는 김유신계의 가락 김씨이다. 한편 고구려는 대략 장수왕(413~491)때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346~374)때부터「여(餘)」씨라 하였다가 무왕(600~640)때부터「부여(扶餘)」씨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540~576)때부터「김」성을 사용하였다.

 

『삼국사기』와『당서』이전의 중국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그 외의 성은 고구려는 해(解) · 을(乙) · 예(禮) · 송(松) · 목(穆) · 우(于) · 주(周) · 마(馬) · 손(孫) · 창(倉) · 동(董) · 예(芮) · 연(淵) · 명림(明臨) · 을지(乙支) 등 10여종이며, 백제는 사(沙) · 연(燕) · 협(劦) · 해(解) · 진(眞) · 국(國) · 목(木) · 백(苩)의 8대성 ( *백제 8대성 - 백제 상층부를 구성하는대귀족으로서 북에서 내려온 부여, 고구려계통의 귀족과 마한의 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다시 찾는 우리 역사』 106쪽 각주 참조)과 왕(王) · 장(張) · 사마(司馬) · 수미(首彌) · 고이(古爾) · 흑치(黑齒)등 10여종이다. 신라는 왕성 3성 (박 · 석 · 김)과 신 김씨(김유신계 가락 김씨), 옛 신라의 전신 사로국의 6촌 장성 (6성-이 · 최 · 정 · 손 · 배 · 설), 장(張) · 요(姚)등 10여종에 불과하다.

 

3) 신라시대 성의 확대

우리나라에서 중국식 한자성(이하 '한성'이라 함)의 수용과정은 왕실 → 귀족 → 일반 지배층 → 양민·평민 순으로 보급되어 갔다.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서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계의 성씨를 중심으로 한성이 보급되었는데 특히 후삼국시대 호족층을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신라시대 성씨 취득과정을 유형별로 보면

(1) 박·석·김·신 김씨와 같이 왕실지배층의 성의 사용

(2) 통일전후의 6부사성

(3) 나당관계에서 견당(遣唐)사신·견당유학·숙위(宿衛)학생·입당수도승·기타 중국에 내왕한 인사(장보고·정년 등)들로 나눌 수 있다.

 

* 『입당구법순례행기』 (일본승려 엔닌 圓仁(794~864)이 신라선편으로 838년 입당 847년 귀국때까지의 여행기)에 나오는 신라인 一林대사, 장보고, 설전, 장영, 남판관, 역원 김정남 · 박정장 · 유(劉)신언 · 왕청, 선주 김진 · 이인덕 · 왕가창, 여행자 왕종 · 이국우, 신라방 거주자 흠양휘 등 다수

 

『삼국사기』권4「신라본기」에 보면 진흥왕 19년(558) 2월 조에“귀족자제와 6부호민(豪民)을 옮겨 국원경(國原京-원주)을 채웠다.”고 하고 외관지위(外官地位)조(권40 잡지9)에“문무왕 14년(674)에 6도(六徒) 진골로서 5경과 9주에 나가 살게 하고 관명을 별도로 호칭케 하였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신라는 9주 5소경에 정책적으로 중앙의 귀족을 이주시킨 결과 왕경의 신라 귀성이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중앙귀족의 집단이주와 함께 주·군·현에 파견되었던 외관들이 나말에 임지에서 그대로 정착함으로서 이미 한성화한 가문이 사방으로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이렇게 일찍부터 외거하기 시작한 중앙귀족의 후예들과 나대 재래의 토착촌주층이 중심이 되어 후삼국시대의 정치사회적 변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지방군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호족층이었다. (고려개국에 참여한 진천지역 임씨들을 상정해 보자) 이렇게 지방에 확산된 중앙귀족관인 가운데는 한성화 전에 이주한 자와 그 뒤에 이주한 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편 신라 6성의 대두시기는 설씨는 삼국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 정·손·배씨는 통일신라이후, 최씨는 신라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여기서 참고할 것은 한성화의 과정과 그 씨족의 분화, 발전과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3성 또는 6성이 한성화한 시기가 통일신라이후라 할지라도 그 가문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이다.(친족공동체의 거주지 명칭이 성의 기능을 가졌고 ‘그 지방에 살고 있는 친족공동체’가 성의 주체) 참고로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동성불혼의 관념이 점차 수용되어 가고 있었는데 신라 왕실은 철저히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책명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성불혼의 예에 따라 동성의 왕비의 성을 왕의 성과 다른 성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는 왕모 또는 왕비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숙씨(叔氏) · 신씨(申氏) · 정씨(貞氏)와 같은 성자를 사용했던 것이며, 고려시대에도 왕실은 근친혼이었는데 동성의 왕비는 모성 또는 외조모성을 따르게 했으며 이러한 관념이 지배층에 보급되자 성과 본관의 분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이상『한국의 성씨와 족보』96~99쪽,『한국 중세사회사 연구』54~56쪽 참조)

 

4) 후삼국시대의 성씨

후삼국시대 지방호족의 성씨 취득은, 지방사회 자체 내에서의 성장과 신라중앙문화의 지방에로의 확산이라는 두 가지 사회적 배경과 신라하대 중앙통제력의 점진적 약화라는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신라가 통일 후 귀족을 9주5소경에 분산시킬 때 신라의 귀족성이 사방으로 확산되었고 신라말기에 촌주(村主), 성주(城主), 진장(鎭長) 등은 스스로 호족이 되어 성을 자칭하였다. 다른 한편 신라의 지배 체제는 골품제하에 편제된 왕경, 6부민들의 후예들이 지배집단을 이루어 지방민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9세기 이후 나라가 쇠퇴해지자 촌주, 성주, 진장 등 지방 세력이 스스로 군사력을 갖추고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호족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신라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면서 재래의 군현조직과 촌주층의 직제를 통하여 지방행정에 참여해온 경험과 발달된 중앙관제의 영향 속에서 중앙관제에 방불한 스스로의 관반(官班)을 형성하고 주민을 통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후삼국시대 중앙권력 약화 속에 지방의 지배계층으로 등장한 호족들은 사성(賜姓), 모성(冒姓), 자칭성(自稱姓)등의 수단을 통하여 성씨를 취득하게 되고, 고려의 재통일후 태조왕건에 의하여 전국 군현별로 각기 토성이 분정(分定)되면서 성씨체계가 비로소 확립되게 된 것이다.

 

5) 고려의 통일과 성씨체계의 확립

이와 같이 신라 말기 재지호족들을 중심으로 한 토성들이 왕건의 토성 분정 정책에 따라 지역별로 성씨를 취득하게 되면서 성씨는 광범위하게 그 보급이 확장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한때 왕건은 호족을 포섭하는 정책에 우선을 두고 이를 실천 하는 방법으로 결혼정책과 사성(賜姓)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유력한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왕후가 6명 부인이 23명에 이르렀다. 이들 29명의 출신지를 보면 옛 신라, 백제, 고구려 지역에 골고루 망라되어 있다. 또 귀순해 오는 호족들에게 왕씨의 성을 주어 왕족으로 포섭하기도 하고 다른 성씨를 주기도 하였다.

 

영조 27년(1751)에 저술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현지답사를 기초로 하여 저술한 우리나라 지리서. 그 내용이 역사 경제 사회 교통 등 다방면을 다루고 있다.) 에 보면 우리의 성씨 보급 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등에서 이러한 주장의 확실한 근거자료는 없지만

① 통일신라의 군현조직체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지배기구를 이어 받은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작업과 함께 940년(태조 23)경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군현토성을 분정 하였다는 사실

② 왕건은 즉위 이래 개국관료, 개국공신 및 귀순 호족들에 대한 사성을 광범위하게 실시

③ 신라의 왕성 3성과 6부성 등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한 기존 한성(漢姓)과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각 성의 시작은 대부분 고려초기로 잡고 있다는 사실

④ 『고려사』태조세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분석해보면 태조 23년경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는 당초의 고유이름으로 칭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다가 그 이후부터는 한식(漢式) 성명으로 일반화되고 있으며, 광종을 거쳐 성종대(982~997)와 현종대(1010~1031)로 내려오게 되면 이름만 지칭하는 인물이 관료계층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성종이후가 되면 관인은 물론 지방군현의 양민층에게 까지 한성이 보급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성씨 체계의 확립은 고려 초로 볼수 있으며,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 분파로 성의 분화와 발전이 있었다. 이후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 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그것이『세종실록지리지』와『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것이다. 참고로 후삼국시대에 활약한 지배세력 가운데 그들 토성의 변천과정을 몇 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보면,

 

① 고려의 개국 및 통일과정에서 지방호족으로 대두하여 왕건의 부하 장상(將相)과 개국 및 삼한공신이 되면서 귀족, 명문으로 발전한 계열이 있다.

② 후삼국시대 유력한 호족 가운데 고유이름만 가진 인물이 후대에 그 출신지의 토성과 연결되지 아니한 자도 많았다.(반역, 모역 등으로 토성을 갖기 전에 족세가 몰락한 경우 등)

③ 고려 초기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후손이 현달(顯達)함에 따라 초기의 공신이 노출되는 가문도 있었다.(파평윤씨, 철원최씨, 청주이씨, 나주나씨, 남양홍씨, 죽산박씨, 청주한씨, 경주이씨, 안동권·김씨 등) 이들은 강력한 토착적 배경으로 고려에 귀순하여 왕건으로 부터 공신 호를 받았지만 그대로 재지에서 토착하다가 그 후손들이 현달함으로서 묻혀있던 선조의 공신 호가 노출된 것이다.

④ 현종 조부터 대두하는 귀족, 관인 가운데는 지방군현의 호장층 자손이 많았다.(해주최씨, 수원최씨, 장단한씨, 동래정씨, 전주이씨, 전주최씨, 충주양씨 등)

⑤ 각 읍의 토성이 형성되어 감과 동시에 종전의 토성이 소멸되어 망성(亡姓)이 늘어나고 토착 성씨의 이동이 빈번해짐에 따라 래성, 입진성 등이 증가해 갔다.

 

6) 성자(姓字)의 유래와 성씨의 보급과정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태조 23년(940) 3월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하면서 경주를 대도독부로 승격하고 6성(六姓)의 출자처인 6부의 명칭을 개정하는 한편 후일의 호장(戶長)인 당제(堂祭:堂大等) 10명을 크게 개차(改差)하였다. 이때 명칭이 개정된 읍수는 218군현으로서 종전의 9주5소경을 비롯한 전국의 대읍은 물론 일부의 소현까지 미치고 있다.

 

◇ 토성의 분정(分定)

고려왕조를 창건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적극 참여했던 전국의 크고 작은 호족에 대하여 제각기 출신지 군현의 토성으로 지정하면서 이른바 군현토성의 분정이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본관을 국가가 지정해주는 결과가 된것이며 『세종실록지리지』소재 성씨들은 이때를 기하여 시작된 것이다. 통일당시의 지방사회는 호족층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국가권력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이들의 기득권을 약화시켜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이 군현토성 분정배경은 좁고 폐쇄적인 신라의 골품제도를 청산하고 새 왕조를 담당할 새로운 지배신분을 편성하는데 있었다.

 

◇ 성자(姓字)는 어디서 왔을까?

역사적으로 보아 나당간의 활발한 문물교류와 신라의 한화(漢化) 정책에 의하여 한식(漢式) 지명의 개정과 함께 중국의 유명성씨를 수입 모방한 것이다. 이는『세종실록지리지』성씨조의 대부분 성자(姓字)가 당대(唐代)의『씨족지』나『천하군망표(天下郡望表)』에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성씨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태조 왕건의 군현토성분정책은 북위 효문제의‘성족분정(姓族分定)’작업이나 당태종의『정관(貞觀) 씨족지』편찬사업과 비교될 만하다. 『세종실록지리지』성씨조의 성이 250여개 인데, 이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보면 대부분 이의 것을 모방하였다. ‘군망표’에 없는 성자는 박(朴), 심(沈), 하(河), 옥(玉), 명(明), 준(俊), 석(昔), 제(諸), 익(益), 삼(森), 방(邦), 방(芳), 가(價), 승(勝), 탁(濯), 승(承) 등 16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도 박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초(鄭樵)의 『통지략(通志略)』「씨족지」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 성씨의 보급과정

성씨의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보면,

① 신라말기 부터 통일신라하대 까지는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로 볼 수 있으며

② 지배층에게 보급되어 성과 본관 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초기이며

③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체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無姓層)으로 남아있던 공사노비, 화척(禾尺-백정 같은 천민), 향·소·부곡민, 역·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부분적으로 성씨를 취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후기였다.

 

조선전기(1500년대) 까지만 하여도 성이 없는 천민층이 절반 가까이 되었다하는데 조선후기 300년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신분해방과 함께 성을 새로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성의 대중화를 촉진시켰으며 1909년 새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된다.

 

 

* 백제 8대성 - 백제 상층부를 구성하는 대귀족으로서 북에서 내려온 부여, 고구려계통의 귀족과 마한의 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다시 찾는 우리 역사』106쪽 각주 참조).

* 신라 3성 - 혁거세거서간(박), 탈해니사금(석), 김알지의 후손(13대 미추니사금, 17대 내물마립간 등)인 왕족의 성(왕의 호칭은 22대 지증왕 때부터임)신 김씨-가야에서 온 김유신계 가락김씨

* 신라 6성 - 옛 신라의 전신 사로국의 6촌장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