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손의 계대와 세거지의 확장
HOME > 자손의 계대와 세거지의 확장
1. 중시조 임만(林蔓)공이 약관 단신으로 |
한반도의 서남 벽지 영암 땅에 남락하여「우거」를 시작한 지 600여년, 그간 선산임씨는 호남 망족(望族)의 일원이 되었습니다.묘소는 전남 영암군 미암면 선황리(옛 율리) 가덕산 고암등에 있으며 오좌쌍조(午坐双兆)로 모셔져 있습니다. 이곳은「선인격고지명국(仙人擊鼓之名局)」이라 하여「영암6명당」의 하나로 회자(膾炙)되는 곳입니다.
밤이면 뒤의 선녀봉에서 선녀의 북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며, 그 북소리가 날 때마다 원지(遠地)에 나가 있는 자손들에게 행운이 내린다고 합니다. 선림 제일의 도선산(都先山)이며 매년 음력 10월 7일에 시제를 모시고 있습니다.(2세 진, 3세 간의 산소도 같은 묘역입니다.)
2. 중시조 이후 |
2세 임진(林珍), 3세 임간(林幹)은 독자(獨子)세계(世系)였습니다.
1) 2세 진은 무과급제 후 제주판관을 지내셨으며(병술보·영암읍지)
2) 3세 간은 문과급제 후 동복현감을 지내셨습니다.(병술보·영암읍지)
3) 4세 임득무(林得茂)에 이르러 종(宗), 수(秀) 두 아들을 두면서 비로소 2파로 갈리게 됩니다. 이르기를 임종(林宗)의 후손을「宗파」, 임수(林秀)의 후손을「秀파」라고 합니다.
임득무(林得茂)는「증자헌대부이조판서」로 증직되어 있는데 이는 증손 임백령(林百齡)의 관직에 따라 추증된 것입니다.(『경국대전』의 증직규정에 의거 ) 묘소는 영암군 삼호읍 용당리 아산에 있습니다. 이곳 역시「선인독서지혈(仙人讀書之穴)」이라 하여「영암6명당」의 하나로 지칭되고 있으며 13정보 약4만평에 이르는 서남향의 완만한 구릉지로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전망 또한 빼어나며, 과연 임억령(林億齡), 임백령(林百齡)의 대문장이 배출된 배토지(培土地)로서 손색이 없다할 것입니다. 위의 중시조 묘소와 더불어「선산임씨 2대 도선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4) 5세 임종(林宗)은 직장(直長)을 지내셨는데 후손은 6세 우련(遇蓮), 7세 기령(期齡), 8세 홍(泓)으로 역시 독자 세계로 이어지다가 9세에 이르러 광안(光顔), 광형(光亨), 광민(光閔)의 3자를 두었습니다.
• 장자(長子) 임광안은 무과 후 권지훈련원봉사(奉事)·수의부위(修義副尉)·만호를 지내시고 임란 때 죽산전투에서 전사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손들은 본거지인 영암(학산면)을 중심으로 널리 세거하고 있고,
• 제2자 임광형은 무과 후 부장(部將)을 지내셨으며 그 후손은 해남(삼산면) 일대에,
• 제3자 임광민은 무과 후 임란에 참전 백형과 함께 죽산전투에서 전사하셨으며 후손은 강진(도암면) 일대에 살고 있으나 이중 10세 복룡(伏龍)의 후손들이 멀리 떨어져 경남 창원등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5) 5세 임수(林秀)는 무과 후 진안현감을 지내셨는데(병술보·영암읍지), 공께서는 처가(초계鄭씨)가 있는 해남으로 이거하여 그 후손은 교동(校洞)을 중심으로 해남이 본거지가 되었으며 묘소가 해남읍 구교리(旧校里)에 있습니다. 아마도 조상 봉사(奉祀)는 종손에게 맡기고 새로운 경지를 찾아 좀더 넓은 해남 땅을 택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증하여졌는데이 역시 손자 백령에 준거하여 추증된 것입니다. 임수는 원·형·리·정(元·亨·利·貞)의 4자 즉 우원(遇元), 우형(遇亨), 우리(遇利), 우정(遇貞)의 4자를 두었습니다. 함자의 원·형·리·정은 주역 건괘(乾卦)문언전(文言傳)에 나오는 상징어입니다.
* 수(秀)공의 처가- 초계정씨인 공의 처가는 장인이 정문명(鄭文明), 처남이 정 귀영(鄭貴瑛)이다. 집안이 해남갑부였다 한다. 귀영의 사위가 해남윤씨 윤효정 (尹孝貞)인데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았다고 전해진다. 백령공의 행장을 쓴 윤의 중(형조판서)이 효정의 손자이고 고산 윤선도의 조부가 된다.
• 장자 우원(생원)의 세계(世系)는 자 영령(英齡)(직장), 손자 능 (氵能)(무과후 덕원부사)으로 이어지는데, 외손자가 임란 때 이순신의 우부장으로 부산포해전에서 순국한 녹도만호 정운(鄭運)입니다. 후손들은 해남(화산·송지·삼산·황산)·진안·임실 등지로 분산 세거 하였으며, 13세 취재(就宰) 때 일부가 진도로 옮겨가 살고 있습니다.
• 3자 우리(1476~1529)는 일찍이, 나주인으로 성종 때 문명이 높았던 최보(崔溥)에게서 배우고, 1494년(성종25) 19세에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서 과거를 준비 중「무오사화」(1498 연산4)를 보고 영암으로 자취를감춰 초야에 묻혀 자연을 벗 삼고 지냈다 합니다. 이윽고 밝은 세상(중종반정)이 되었는데, 임금이 불러도 사양하니 특별히 「은일처사(隱逸處士)」라는 호와「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렸다고 전합니다. (1855『을묘보』방주 및 묘갈명)
* 최보(1480~1567)-나주인. 1482년(성종9) 급제 후『동국여지승람』편찬에 참 여. 1487년 제주에 추쇄경차관으로 가서 임무수행 중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명나라 태주부에 표착. 당시 중국에서의 견문을 쓴 『금남표해록』이 있다. 승문원 교리를 지내고 1498년 무오사화 때 귀양, 1504년 갑자사화 때 처형당함. 공의 손자인 8세 형(泂)때 무안 몽탄면 당호리에 자리잡아 집성촌을 이루었습니다.(우리공 계보 및 자·손의 휘와 관련하여 152쪽 각주 참조 바랍니다.)
• 4자 우정(1480~1567)은 1501년(연산7)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성균관대사성을 지내시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셨다 합니다.(1891『신묘보』) 공의 자 현령(玄齡)은 해남감영의 충순위(忠順衛)이셨고(명종실록10년 5.21 기사), 강동현령을 지내셨다 하며, 손자 개(漑)가 내금위장을 지내셨다 합니다.(『신묘보』) 공의 후손들은 해남(황산), 강진(도암)등에 살고 있으나, 그중 8세 장(漳)이 진도로 이거 그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13세 승서(昇瑞)가 장흥에 입촌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습니다.
6) 임수(林秀)의 제2자인 6세 우형은 천(千), 만(萬), 억(億), 백(百), 구(九)의 5자(5齡) 즉 천령, 만령, 억령, 백령, 구령을 두었는데 수(秀)파에서는 물론, 선림전체에서 제일 벌족하다고 하겠습니다.(을해보 기준으로 약57%) 그의 제4자인 백령의 권귀(權貴)로「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일선부원군」에 증해졌는데, 묘소는 해남읍 교동의 넓은 뒷산에 간좌쌍폄(艮坐双窆)입니다.
• 제1자인 7세 천령(千齡)(진사공)의 자손들은 대대로 해남(계곡면)에 살고 있으나 8세 준(濬)이 성천(成川)부사로 부임하면서 그 후손이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에 정착하였고 그중 15세 영조(榮祖)가 고종 말 1890년에 남하하여 강원도 평창(진부면)에 우거하였으며, 또 다른 자손들이 황해도를 거처 강화(교동면)로 피난하여 인천, 서울 등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 2자인 만령은 후손이 없습니다.)
• 제3자인 억령(億齡)의 자손은 해남, 담양, 순창, 보성 등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 제 4자인 백령(百齡)의 자손은 그의 손자 9세 극성(克誠)의 자손이 충북 괴산(문광면) 일대에, 8세 필(泌)의 자손이 임실, 진안, 금산 일대에, 9세 극충(克忠)의 자손이 공주, 연기, 대덕, 대전 일대에 널리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 제 5자인 구령(九齡)은 처가(난포박씨)가 있는 영암으로 다시 이거하여 서호면 청룡리, 군서면 구림리가 본거지가 되었으며 묘소는 청룡리에 있습니다. 9자를 두어 그 자손이 선산임씨 중에서도 제일 벌족하여(전수의 약 34%) 본거지인 영암을 중심으로 나주, 해남 등지에 널리 살고 있으나, 9세 능복(能福)이 임진왜란 참전을 계기로 경남 고성(固城)에, 12세 우백(友栢)이 경남 거제에 정착하여 그 후손이 널리 살고 있습니다.
3. 그리하여 1400년경 중시조 임만(林蔓)공이 |
전남 영암에 입향하여 우거를 시작한지 600년이 경과한 2014년 현재, 본거지인 영암을 중심으로 해남(海南), 강진(康津), 무안(務安), 나주(羅州), 진도(珍島)등 전남 서남부 지방에 약 80%가 살고 있으나, 일부는 괴산(槐山), 대덕(大德), 금산(錦山), 임실(任實), 장수(長水) 등의 충청남북도·전북지방에, 일부는 경남 고성, 거제, 통영, 창원 등지에, 함경남도 단천(端川)을 거쳐 강원 평창(平昌), 강화(江華), 인천(仁川) 등지에 살고 있어 가히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확산되어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집안이나 마찬가지로 현재에는 서울과 수도권을 비롯하여 인근 중소도시로 다수가 이전하여 이제는 옛「세거지(世居地)」란 말뿐이고 겨우 뿌리만 남아 있는 실정입니다.(이해를 돕기 위해「선산임씨세계 및 세거지 분포도」와「선산임씨 세거 변천도」를 첨부하였습니다.)
우원공 자(子)·손(孫)의 휘– 최초 족보 병술보(1766)~4차 신묘보(1891)까지 자의 휘는‘영(英)’, 손은‘웅(熊)’이었는데 5차 병진보(1916)에 와서‘영령(英齡)’·‘능(氵能’ )으로 바뀌었음. 이는 령 자 항렬과 삼수 변 항렬로의 통일이 그 이유인 듯한데, 진짜 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그에 따라 진짜로의 복원에 대한 고민 또한 필요하지 않을지 자문해 봅니다.
1. 중시조 임만(林蔓)공이 약관 단신으로 |
한반도의 서남 벽지 영암 땅에 남락하여「우거」를 시작한 지 600여년, 그간 선산임씨는 호남 망족(望族)의 일원이 되었습니다.묘소는 전남 영암군 미암면 선황리(옛 율리) 가덕산 고암등에 있으며 오좌쌍조(午坐双兆)로 모셔져 있습니다. 이곳은「선인격고지명국(仙人擊鼓之名局)」이라 하여「영암6명당」의 하나로 회자(膾炙)되는 곳입니다.
밤이면 뒤의 선녀봉에서 선녀의 북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며, 그 북소리가 날 때마다 원지(遠地)에 나가 있는 자손들에게 행운이 내린다고 합니다. 선림 제일의 도선산(都先山)이며 매년 음력 10월 7일에 시제를 모시고 있습니다.(2세 진, 3세 간의 산소도 같은 묘역입니다.)
2. 중시조 이후 |
2세 임진(林珍), 3세 임간(林幹)은 독자(獨子)세계(世系)였습니다.
1) 2세 진은 무과급제 후 제주판관을 지내셨으며(병술보·영암읍지)
2) 3세 간은 문과급제 후 동복현감을 지내셨습니다.(병술보·영암읍지)
3) 4세 임득무(林得茂)에 이르러 종(宗), 수(秀) 두 아들을 두면서 비로소 2파로 갈리게 됩니다. 이르기를 임종(林宗)의 후손을「宗파」, 임수(林秀)의 후손을「秀파」라고 합니다.
임득무(林得茂)는「증자헌대부이조판서」로 증직되어 있는데 이는 증손 임백령(林百齡)의 관직에 따라 추증된 것입니다.(『경국대전』의 증직규정에 의거 ) 묘소는 영암군 삼호읍 용당리 아산에 있습니다. 이곳 역시「선인독서지혈(仙人讀書之穴)」이라 하여「영암6명당」의 하나로 지칭되고 있으며 13정보 약4만평에 이르는 서남향의 완만한 구릉지로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전망 또한 빼어나며, 과연 임억령(林億齡), 임백령(林百齡)의 대문장이 배출된 배토지(培土地)로서 손색이 없다할 것입니다. 위의 중시조 묘소와 더불어「선산임씨 2대 도선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4) 5세 임종(林宗)은 직장(直長)을 지내셨는데 후손은 6세 우련(遇蓮), 7세 기령(期齡), 8세 홍(泓)으로 역시 독자 세계로 이어지다가 9세에 이르러 광안(光顔), 광형(光亨), 광민(光閔)의 3자를 두었습니다.
• 장자(長子) 임광안은 무과 후 권지훈련원봉사(奉事)·수의부위(修義副尉)·만호를 지내시고 임란 때 죽산전투에서 전사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손들은 본거지인 영암(학산면)을 중심으로 널리 세거하고 있고,
• 제2자 임광형은 무과 후 부장(部將)을 지내셨으며 그 후손은 해남(삼산면) 일대에,
• 제3자 임광민은 무과 후 임란에 참전 백형과 함께 죽산전투에서 전사하셨으며 후손은 강진(도암면) 일대에 살고 있으나 이중 10세 복룡(伏龍)의 후손들이 멀리 떨어져 경남 창원등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5) 5세 임수(林秀)는 무과 후 진안현감을 지내셨는데(병술보·영암읍지), 공께서는 처가(초계鄭씨)가 있는 해남으로 이거하여 그 후손은 교동(校洞)을 중심으로 해남이 본거지가 되었으며 묘소가 해남읍 구교리(旧校里)에 있습니다. 아마도 조상 봉사(奉祀)는 종손에게 맡기고 새로운 경지를 찾아 좀더 넓은 해남 땅을 택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증하여졌는데이 역시 손자 백령에 준거하여 추증된 것입니다. 임수는 원·형·리·정(元·亨·利·貞)의 4자 즉 우원(遇元), 우형(遇亨), 우리(遇利), 우정(遇貞)의 4자를 두었습니다. 함자의 원·형·리·정은 주역 건괘(乾卦)문언전(文言傳)에 나오는 상징어입니다.
* 수(秀)공의 처가- 초계정씨인 공의 처가는 장인이 정문명(鄭文明), 처남이 정 귀영(鄭貴瑛)이다. 집안이 해남갑부였다 한다. 귀영의 사위가 해남윤씨 윤효정 (尹孝貞)인데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았다고 전해진다. 백령공의 행장을 쓴 윤의 중(형조판서)이 효정의 손자이고 고산 윤선도의 조부가 된다.
• 장자 우원(생원)의 세계(世系)는 자 영령(英齡)(직장), 손자 능 (氵能)(무과후 덕원부사)으로 이어지는데, 외손자가 임란 때 이순신의 우부장으로 부산포해전에서 순국한 녹도만호 정운(鄭運)입니다. 후손들은 해남(화산·송지·삼산·황산)·진안·임실 등지로 분산 세거 하였으며, 13세 취재(就宰) 때 일부가 진도로 옮겨가 살고 있습니다.
• 3자 우리(1476~1529)는 일찍이, 나주인으로 성종 때 문명이 높았던 최보(崔溥)에게서 배우고, 1494년(성종25) 19세에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서 과거를 준비 중「무오사화」(1498 연산4)를 보고 영암으로 자취를감춰 초야에 묻혀 자연을 벗 삼고 지냈다 합니다. 이윽고 밝은 세상(중종반정)이 되었는데, 임금이 불러도 사양하니 특별히 「은일처사(隱逸處士)」라는 호와「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렸다고 전합니다. (1855『을묘보』방주 및 묘갈명)
* 최보(1480~1567)-나주인. 1482년(성종9) 급제 후『동국여지승람』편찬에 참 여. 1487년 제주에 추쇄경차관으로 가서 임무수행 중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명나라 태주부에 표착. 당시 중국에서의 견문을 쓴 『금남표해록』이 있다. 승문원 교리를 지내고 1498년 무오사화 때 귀양, 1504년 갑자사화 때 처형당함. 공의 손자인 8세 형(泂)때 무안 몽탄면 당호리에 자리잡아 집성촌을 이루었습니다.(우리공 계보 및 자·손의 휘와 관련하여 152쪽 각주 참조 바랍니다.)
• 4자 우정(1480~1567)은 1501년(연산7)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성균관대사성을 지내시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셨다 합니다.(1891『신묘보』) 공의 자 현령(玄齡)은 해남감영의 충순위(忠順衛)이셨고(명종실록10년 5.21 기사), 강동현령을 지내셨다 하며, 손자 개(漑)가 내금위장을 지내셨다 합니다.(『신묘보』) 공의 후손들은 해남(황산), 강진(도암)등에 살고 있으나, 그중 8세 장(漳)이 진도로 이거 그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13세 승서(昇瑞)가 장흥에 입촌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습니다.
6) 임수(林秀)의 제2자인 6세 우형은 천(千), 만(萬), 억(億), 백(百), 구(九)의 5자(5齡) 즉 천령, 만령, 억령, 백령, 구령을 두었는데 수(秀)파에서는 물론, 선림전체에서 제일 벌족하다고 하겠습니다.(을해보 기준으로 약57%) 그의 제4자인 백령의 권귀(權貴)로「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일선부원군」에 증해졌는데, 묘소는 해남읍 교동의 넓은 뒷산에 간좌쌍폄(艮坐双窆)입니다.
• 제1자인 7세 천령(千齡)(진사공)의 자손들은 대대로 해남(계곡면)에 살고 있으나 8세 준(濬)이 성천(成川)부사로 부임하면서 그 후손이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에 정착하였고 그중 15세 영조(榮祖)가 고종 말 1890년에 남하하여 강원도 평창(진부면)에 우거하였으며, 또 다른 자손들이 황해도를 거처 강화(교동면)로 피난하여 인천, 서울 등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 2자인 만령은 후손이 없습니다.)
• 제3자인 억령(億齡)의 자손은 해남, 담양, 순창, 보성 등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 제 4자인 백령(百齡)의 자손은 그의 손자 9세 극성(克誠)의 자손이 충북 괴산(문광면) 일대에, 8세 필(泌)의 자손이 임실, 진안, 금산 일대에, 9세 극충(克忠)의 자손이 공주, 연기, 대덕, 대전 일대에 널리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 제 5자인 구령(九齡)은 처가(난포박씨)가 있는 영암으로 다시 이거하여 서호면 청룡리, 군서면 구림리가 본거지가 되었으며 묘소는 청룡리에 있습니다. 9자를 두어 그 자손이 선산임씨 중에서도 제일 벌족하여(전수의 약 34%) 본거지인 영암을 중심으로 나주, 해남 등지에 널리 살고 있으나, 9세 능복(能福)이 임진왜란 참전을 계기로 경남 고성(固城)에, 12세 우백(友栢)이 경남 거제에 정착하여 그 후손이 널리 살고 있습니다.
3. 그리하여 1400년경 중시조 임만(林蔓)공이 |
전남 영암에 입향하여 우거를 시작한지 600년이 경과한 2014년 현재, 본거지인 영암을 중심으로 해남(海南), 강진(康津), 무안(務安), 나주(羅州), 진도(珍島)등 전남 서남부 지방에 약 80%가 살고 있으나, 일부는 괴산(槐山), 대덕(大德), 금산(錦山), 임실(任實), 장수(長水) 등의 충청남북도·전북지방에, 일부는 경남 고성, 거제, 통영, 창원 등지에, 함경남도 단천(端川)을 거쳐 강원 평창(平昌), 강화(江華), 인천(仁川) 등지에 살고 있어 가히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확산되어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집안이나 마찬가지로 현재에는 서울과 수도권을 비롯하여 인근 중소도시로 다수가 이전하여 이제는 옛「세거지(世居地)」란 말뿐이고 겨우 뿌리만 남아 있는 실정입니다.(이해를 돕기 위해「선산임씨세계 및 세거지 분포도」와「선산임씨 세거 변천도」를 첨부하였습니다.)
우원공 자(子)·손(孫)의 휘– 최초 족보 병술보(1766)~4차 신묘보(1891)까지 자의 휘는‘영(英)’, 손은‘웅(熊)’이었는데 5차 병진보(1916)에 와서‘영령(英齡)’·‘능(氵能’ )으로 바뀌었음. 이는 령 자 항렬과 삼수 변 항렬로의 통일이 그 이유인 듯한데, 진짜 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그에 따라 진짜로의 복원에 대한 고민 또한 필요하지 않을지 자문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