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와 시조설화 논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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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산임씨의 시조와 최초족보의 기록

 

선산임씨의 시조는「신라말 중랑장(中郞將) 임양저(林良貯)」이시다.

이는 최초족보『병술보』(1766 영조 42)가 명백히 밝히고 있는 바이다. 물론 선림의 시조는 우리의 선조들이 전하여 준 것이겠지만, 더욱 확실한 것은 이를 전하고 있는 엄연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시조」와「시조설화」를 밝히고 있는 기록이 최초족보 속에 있다. 이 기록은『병술보』(1766)가 편찬되기 훨씬 전(1590년경)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시조와 시조의 벼슬·신분·설화·득관 연유 등을 포함하고 있다.

 

「희재공(希齋公)(임백령)행장(行狀)」이 바로 그것이다.

희재공과는 해남 동향인으로 형조판서를 지낸 윤의중(尹毅中)(1524~ ? )이 쓴 것으로서,「시조」와「시조설화」를 밝히고 있는 가장 빠른 시기의 기록이요 출전(出典)의 원전(原典)인 셈이다. 여기서『병술보』의 기록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족보 손록의 서두를 보면“시조 임양저, 관 중랑장(始祖 林良貯, 官 中郞將)”이라고만 하고, 그 아래 여백에“신라조 위 경순왕자 정현지서 관지 중랑장, 세계실전 지 후손 휘 만(新羅朝 爲 敬順王子 貞顯之壻 官至 中郞將, 世系失傳 至 後孫 諱 蔓)…(이하 생략)”이라는 부기문만 나와 있을 뿐(만蔓을 중시조로 하게 된 연유의 설명) 시조에 관한 다른 기록은 없다.

 

『을해보』(1995)등에 나오는「설화」의 방주(傍註) 기록이 없는 것이다. 어찌된 사연일까. 이는 시조와 시조의 벼슬, 신분, 설화 등이「희재공행장」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손록 방주의 설화기사는 생략한 것이다.

 

◇ 시조와 시조설화의 변경 혼란

① 그런데 양저공에 관한 설화기사가 평택임씨족보에도 실려있었는데(변형되어 있음) 선산임씨족보가 2차『신사보』(1821)에서 이를 인용하기 시작하여 최종 『을해보』(1995)까지 이어져 오게 된 것이다.

② 더하여, 5차『병진보』(1916), 6차『병신보』(1956), 7차『정사보』(1977)에서 시조(또는 중시조)를「임팔급(林八及)」(평택임씨 시조)으로 바꾸면서 설화문제와 상계문제가 곱으로 우리를 혼란케 하였다.

 

2. 시조설화의 출전별 비교

 

선산임씨 최초족보

『병술보』※

선산임씨 족보

『을해보』※

평택임씨 족보

신라계 중랑장

新羅季 中郞將

경순왕자정현지서

敬順王子貞顯之壻

 

라조 상장군

羅朝 上將軍

(배위配位에 포함)

신라태사 상장군 중랑장

新羅太師 上將軍 中郞將

경순왕자 정현지서

敬順王子 貞顯之壻

보상군덕 유건악지절

輔相君德 有謇諤之節

경순지귀 려조야

敬順之歸 麗祖也

양저간왈

良貯諫曰

계누세지서 이절지

繼累世之緖 而絶之

불가위자야

不可謂子也

수만승지업 이기지

守萬乘之業 而棄之

불가위군야

不可謂君也

언심절

言甚切

경순불능종언

敬順不能從焉

후려조문지

後麗祖聞之

분기자손투우제읍

分其子孫投于諸邑

거선산자(백령)공지선야

居善山者(百齡)公之先也

 

 

경순지귀 려조야

敬順之歸 麗祖也

공간왈

公諫曰

계누세지서 이절지

繼累世之緖 而絶之

불가위자야

不可謂子也

수천승지업 이기지

守千乘之業 而棄之

불가위군야

不可謂君也

언심절

言甚切

경순노적선산인거언

敬順怒謫善山因居焉

 

사재 일선지

事載 一善誌

시 충무

諡 忠武

시법왈 갈성보국 왈 충

諡法曰 竭誠輔國 曰 忠

모사직간 왈 무

冒死直諫 曰 武

 

배 군주정경부인 경주김씨

配 郡主貞敬夫人 慶州金氏

부 경순왕자 정현

父 敬順王子 貞顯

묘 선산 야성간좌

墓 善山 野城艮坐

 

경순지귀 려조야

敬順之歸 麗祖也

공간왈

公諫曰

계누세지서 이절지

繼累世之緖 而絶之

불가위자야

不可謂子也

수천승지업 이기지

守千乘之業 而棄之

불가위군야

不可謂君也

언심절

言甚切

경순노적선산종언

敬順怒謫善山終焉

후려조문지

後麗祖聞之

분기구자투우제읍

分其九子投于諸邑

잉위각파지 성본

仍爲各派之 姓本

묘재선산야성혹운평성

墓在善山野城或云坪城

어재 일선지

語在 一善誌

 

 

※『병술보』-1766년(영조 42)의 최초족보.이족보의「희재공행장」에「시조설화」기사가 있었다.

※ 季(계)-끝 계

※ 종(從)-들을 종, 좇을 종

※『을해보』-1995년 8차보

※ 시호와 증시(贈諡) 기사는 1935년의『임씨세가대동보』

에 나온다.

가공된 기사이다.

※ 임금을 돕는 대신(신하)의 덕을 갖추고 직언을 하는 높은 절개(「건악지절」은『후한서』에 나온다.)

 

p003.png 어느 쪽 기사가 더 진정성이 있을까?

◇ 선산임씨 최초 족보의 기사에 대하여

우선 선산임씨 최초 족보의 기사는 신라 말 정치적 격변기에 있어 그 역사적 사실 관계와 성씨의 보급 발전과정에 합치한다. 그리고 허구의 구절이나 진정성이 의심되는 부분이 발견되지 않는다.(우리말 해설은 이 책 맨 앞「Ⅰ.시조와 시조설화」편 15·18쪽 참조)

 

① 글쓴이가 확실하다.

선산임씨의「시조」를 밝히고 그「설화기사」를 싣고 있는 글은「희재공 임백령의 행장」인데 글쓴이는 희재공과 해남 동향인 윤의중(尹毅中)(1524~?)이다. 고산 윤선도의 조부로서 조선 명종·선조 때의 문신으로 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행장」의 주인공 임백령보다는 26세 연하로 희재공 서거시(1546) 23세의 청년이고 석천 임억령이 서거하신 때(1568)에는 45세의 장년임에 비추어「행장」의 내용에 희재공이나 석천공의 학문적 배경과 생전의 교유관계가 충분히 반영된 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본인 또한 그 학문적 깊이가 심대하였을 고위 문신이다. 따라서 선산임씨의 시조를 밝히면서 그 시조의 설화기사를 싣고 있는「희재공행장」의 기사가, 지어낸 허구의 것이 아닐 것임은 확실하고 그 내용으로 보아도 진정성을 의심할 단서는 없다.

② 시조의 신분과 선산임씨 가문의 위격은 일치한다. 선산임씨는 그 시조가 왕실의 사위이며 고위 무관이었음은 엄격한 신분제사회인 신라에서 상위 신분에 속하였을 것이다. 이를 반증하는 것이 선산임씨가 호장(戶長) 가문이라는 점이다. 호장이란 그 지방의 유력가문으로서 지방의 최고위직 향리(鄕吏)이다. 고위신분이 아니면 될 수 없는 직위이다.

③ 같은 내용의 다른 문건도 있다. 시조와 그 설화기사가 나오는 다른 문건도 있다. 조선 중기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박세채(1631~1695)가 1692년(숙종 18) 6월에 쓴「석천공묘표」에도 시조와 그 설화의 핵심내용이 들어 있는데「희재공행장」의 시조설화기사와 그 내용이 유사하다. 글쓴이 박세채는 특히 역사부문에서『범학전편』을 저술하기도 하는 등 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으며 학문적 소양이 대단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④ 기사의 내용에 허구성이 없다. 벼슬, 신분, 충간의 내용, 선산임씨 득관의 연유 등에 있어 역사적 사실 관계에 비추어 어긋나거나 허구로 의심될 만한 기사가 전혀 없다. 따라서 위와 같은 여러 관점에 비추어 보면「희재공행장」에 나오는 선산임씨 시조의 설화기사는 설화의 원형이고 그 신빙성이 매우 높은 글이라 할 것이다.

 

◇ 평택임씨 족보의 기사에 대하여

임양저공의 설화기사는 평택임씨 족보 최초보(1764 갑신보)에 실려 있는데 그 출전이 불명한 글이다. 선산임씨 족보에 실려 있는 기사가 쓰여 진 시기(1590년경)보다 훨씬 뒤의 글임에 틀림없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역사적 사실관계와 어긋나고 가공된 요소도 있어 그 진정성이 의심될 수밖에 없는 내용의 글이다.

① 우선, 그 출전이 불명하다.

② 벼슬이 가공되어 있다.

임양저공의 벼슬이 태사·상장군·중랑장이라 하는데 중랑장을 거쳐 상장군이 되고 태사가 되었단 말일까. 태사는 고려시대 삼사(三司)로 불렸던 정1품의 문신계 최고위직인데 직무가 없는 허직이었다. 상장군은 고려시대 최고위 무관직으로서 정3품이었다. 문신계와 무신계의 최고위직을 두루 겸하였다는 것이 의심스러우며(만약 그러하다면 역사서에 나올 것이다) 벼슬 또한 고려시대의 것이다. 그러나 중랑장은 신라시대 무관의 직함으로 사용된 예가 있다.(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의 비문)

③ 귀양기사는 역사적 진정성이 결여 되어 있다. 평택보의 충간기사를 보면“양저공의 심한 충간으로 경순왕이 노하여 선산으로 귀양 보내고 거기서 생을 마쳤다. 또한 고려태조가 그 아홉 아들을 각처로 보냈다. 묘가 선산에 있고 (양저공)이야기가 일선지에 나온다.”고 되어있다.

 

• 우선 경순왕이 양저공을 선산으로 귀양 보냈다는데 이것이 맞는 이야기일까? 선산은 효공왕 10년(907) 이후 후백제의 영역이 되었으며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935년 11월) 이후에도 여전히 평정되지 못하고 있다가 936년 9월 왕건과 신검이 최후의 결전을 벌여 왕건이 승리함으로서 통일대업을 이룬 역사적 지역이다. 그런데, 경순왕은 935년 10월 왕건에게 항서를 보내는 한편 왕도를 포기하고 다른 귀족들과 더불어 바로 개경으로 가게 되는데 이러한 급박한 사태 하에서 적의 수중에 있는 지역으로 귀양을 보낸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없다할 것이다.

또한, 그 뒤 고려태조가 공의 아홉 아들을 각처로 쫓아 보냈다고 하였는데, 아홉 아들은 무슨 근거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이중적 징벌이야기가 가당하다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기사가『일선지』에 있다고 하는데『일선지』또는 동종의 읍지 어느 곳에도 양저공의 귀양기사 또는 묘소기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사정이 이러하다면 평택보의 양저공 선산귀양 이야기는 충간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가공 윤색한 기사로 밖에 볼수 없으며, 그 진정성이 결여된 기사이다.

충간과 관련하여 선산보의 표현으로는“언심절지 경순 불능 종언(言甚切至 敬順 不能 從焉)”으로 되어 있는데, 평택보의 이 구절은“언심절지 경순노 적선산 종언(言甚切至 敬順怒 謫善山 終焉)”으로 교묘히 바뀌어져 있다.

언심절지 - 심히 통절하게 간언하였으되,

경순불능종언(從焉) - 경순은 들으려하지 않았다.

경순노(怒) 적(謫)선산종언(終焉) - 경순이 노하여 선산으로 귀양 보내매 거기서 생을 마쳤다.

또한, 신라 왕조를 나타내는 말로서 선산보는「만승지업(萬乘之業)」이라 하였는데, 평택보는「천승지업(千乘之業)」이라 하고 있다.「천승(千乘)」은 제후를 가리키는 말인데 당당한 왕조인 신라를 제후국으로 격하시킴은 우리의 자존심을 잃게 하는 비굴한 표현이다.(「만승(萬乘)」은 중국에서 천자를 의미함으로 이를 씀은 불경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천승 - 전시에 임금이 제후에게 천대의 병거를 내준다는 뜻에서 제후를 뜻함.

*만승 - 만대의 병거를 거느린 사람 곧 임금(천자)을 뜻함.

보상군덕유건악지절(輔相君德有謇諤之節)은“임금을 돕는 대신(신하)의 덕을 갖추고, 직언을 하는 높은 절개”를 뜻한다. 높은 도덕심과 절의를 나타내고자 다른데서 인용한 구절이다.(「건악지절」은『후한서』에 나온다. 곧을 건, 곧은 말할 악)

• 이러한 표현으로 대비하여 보더라도 임양저공의 설화는 최초 선산보(『병술보』)의 기사가 그 원형이고 평택보의 기사(이를 따른 2차 이후의 선산보 기사 포함)는 최초 선산보의 기사(그 원전의 기사)를 변형시켜 인용한 것으로도 추리된다.

p003.png 다수관의 시조가 임양저공이 아닐까?

원형의 설화로 보이는 선산보의 기사에 임씨의 파계(派系)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나온다. 즉“고려태조가 양저공의 충간 사실을 나중에 듣고 그 자손을 여러 고을로 보냈는데 선산에 살게 된 이가 선산임씨의 선조(관조)이다.”라는 구절이다. 이 기사는 고려태조가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936)후 태조 23년(940) 경주에 대도독부를 설치하고 전국에 9주를 두면서 지방의 주부군현에 대하여 대대적인 개편작업과 함께 토성(土姓)을 분정 하였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 관계와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구절 또한 역사적 사실 관계에 부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선산관을 비롯한 일부관은 임양저공이 그 시조가 됨을 나타내는 기사이다. 즉, 원형의 이 설화기사는 임씨가 임팔급 단일시조가 아니라는 반증인 동시에 임양저공이 임팔급공의 후계가 아님을 나타내는 반증이면서 일부관의 시조가 임양저공일수도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p003.png 평택보 상계의 모순

임양저공이 평택임씨의 상계가 맞을까? 평택임씨 족보는 상계의 인물 일곱분(팔급 ↔ 몽주)을 개별 인물별로 나열하여 소개하는 편제인데 예외적으로 양저공만 그 자를 무(碔)공으로 하고 있다. 이 계대내용은 평택보에 나오는 양저공의 설화기사중“양저공의 9자를 여러 고을로 보냈다.”라는 구절과 상치(相馳)된다.

즉, 평택보 기사대로라면,

① 선산관은 양저공이 저절로 시조(관조)가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양저공이 선산으로 귀양 와서 선산에서 살다가 돌아가셨으므로.

② 그런데 무(碔)공을 그 자로 하고 있으므로 이분 또한 선산관의 선조가 되는 셈이다.

③ 그렇다면 碔공을 제외한 기타 8자가 평택관 등의 파조(선조)가 되는 셈인데, 이렇게 되면 팔급공이 평택관의 시조 내지 관조라 함과 모순될 것이고, 양저공의 9자가 각 파의 관조가 된다는 내용은 각관 족보 어디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오직 팔급에서 몽주까지의 상계만 강조하면서 이 상계가 평택관을 비롯한 모든 임씨의 상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평택보의 상계가 이렇게 모순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그 상계가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고, 팔급공과 양저공 또한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나타내는 반증이다. 더 나아가 양저공 설화대로라면 평택관도 시조가 임양저공이고 그 관조가 임양저공의 자손이 되는 셈이다.(실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게 된 원인 즉 양저공의 설화기사가 어떻게 평택보에 올려져 있을까 하는 점을 추리해 보자 .당초 선산임씨의 문중이 간직하고 있던 원형의 임양저공 설화가 임씨들 관조의 설화로도 그럴듯하므로 임양저공을 상계로 삼으면서 설화도 같이 옮겼다는 가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서「임양저」의 충간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선산 귀양 이야기”로 변형시키고 묘소가 선산야성에 있다고 덧붙이면서 이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일선지』에 그 내용이 있다고 설화를 바꾼 것으로 가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임양저를 상계로 삼고 설화를 변경시켜 놓고 보니 더욱 그 모순점이 내재하게 된 것이다. 즉, 선산귀양·선산야성(평성)묘소· 『일선지』등의 이야기는 모두 선산임씨에 특화된 이야기로서 평택임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가 되고만 것이다.(참고로 1916년 진주에서 발간된『동국속수잠헌보감(東國續修簪獻寶鑑)』이라는 책자「절의(節義)」편에 경순왕자와 임양저공을 충간의 예로서 소개하고 있다.) 덧붙여,『한국의 성씨와 족보』(이수건 교수-영남대, 서울대출판부 2006)에 의하면『세종실록지리지』의 토성은 그 시조가 결코 중국도래인이 될 수 없다고 설파하고 있다.

 

 

1. 선산임씨의 시조와 최초족보의 기록

 

선산임씨의 시조는「신라말 중랑장(中郞將) 임양저(林良貯)」이시다.

이는 최초족보『병술보』(1766 영조 42)가 명백히 밝히고 있는 바이다. 물론 선림의 시조는 우리의 선조들이 전하여 준 것이겠지만, 더욱 확실한 것은 이를 전하고 있는 엄연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시조」와「시조설화」를 밝히고 있는 기록이 최초족보 속에 있다. 이 기록은『병술보』(1766)가 편찬되기 훨씬 전(1590년경)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시조와 시조의 벼슬·신분·설화·득관 연유 등을 포함하고 있다.

 

「희재공(希齋公)(임백령)행장(行狀)」이 바로 그것이다.

희재공과는 해남 동향인으로 형조판서를 지낸 윤의중(尹毅中)(1524~ ? )이 쓴 것으로서,「시조」와「시조설화」를 밝히고 있는 가장 빠른 시기의 기록이요 출전(出典)의 원전(原典)인 셈이다. 여기서『병술보』의 기록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족보 손록의 서두를 보면“시조 임양저, 관 중랑장(始祖 林良貯, 官 中郞將)”이라고만 하고, 그 아래 여백에“신라조 위 경순왕자 정현지서 관지 중랑장, 세계실전 지 후손 휘 만(新羅朝 爲 敬順王子 貞顯之壻 官至 中郞將, 世系失傳 至 後孫 諱 蔓)…(이하 생략)”이라는 부기문만 나와 있을 뿐(만蔓을 중시조로 하게 된 연유의 설명) 시조에 관한 다른 기록은 없다.

 

『을해보』(1995)등에 나오는「설화」의 방주(傍註) 기록이 없는 것이다. 어찌된 사연일까. 이는 시조와 시조의 벼슬, 신분, 설화 등이「희재공행장」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손록 방주의 설화기사는 생략한 것이다.

 

◇ 시조와 시조설화의 변경 혼란

① 그런데 양저공에 관한 설화기사가 평택임씨족보에도 실려있었는데(변형되어 있음) 선산임씨족보가 2차『신사보』(1821)에서 이를 인용하기 시작하여 최종 『을해보』(1995)까지 이어져 오게 된 것이다.

② 더하여, 5차『병진보』(1916), 6차『병신보』(1956), 7차『정사보』(1977)에서 시조(또는 중시조)를「임팔급(林八及)」(평택임씨 시조)으로 바꾸면서 설화문제와 상계문제가 곱으로 우리를 혼란케 하였다.

 

2. 시조설화의 출전별 비교

 

선산임씨 최초족보

『병술보』※

선산임씨 족보

『을해보』※

평택임씨 족보

신라계 중랑장

新羅季 中郞將

경순왕자정현지서

敬順王子貞顯之壻

 

라조 상장군

羅朝 上將軍

(배위配位에 포함)

신라태사 상장군 중랑장

新羅太師 上將軍 中郞將

경순왕자 정현지서

敬順王子 貞顯之壻

보상군덕 유건악지절

輔相君德 有謇諤之節

경순지귀 려조야

敬順之歸 麗祖也

양저간왈

良貯諫曰

계누세지서 이절지

繼累世之緖 而絶之

불가위자야

不可謂子也

수만승지업 이기지

守萬乘之業 而棄之

불가위군야

不可謂君也

언심절

言甚切

경순불능종언

敬順不能從焉

후려조문지

後麗祖聞之

분기자손투우제읍

分其子孫投于諸邑

거선산자(백령)공지선야

居善山者(百齡)公之先也

 

 

경순지귀 려조야

敬順之歸 麗祖也

공간왈

公諫曰

계누세지서 이절지

繼累世之緖 而絶之

불가위자야

不可謂子也

수천승지업 이기지

守千乘之業 而棄之

불가위군야

不可謂君也

언심절

言甚切

경순노적선산인거언

敬順怒謫善山因居焉

 

사재 일선지

事載 一善誌

시 충무

諡 忠武

시법왈 갈성보국 왈 충

諡法曰 竭誠輔國 曰 忠

모사직간 왈 무

冒死直諫 曰 武

 

배 군주정경부인 경주김씨

配 郡主貞敬夫人 慶州金氏

부 경순왕자 정현

父 敬順王子 貞顯

묘 선산 야성간좌

墓 善山 野城艮坐

 

경순지귀 려조야

敬順之歸 麗祖也

공간왈

公諫曰

계누세지서 이절지

繼累世之緖 而絶之

불가위자야

不可謂子也

수천승지업 이기지

守千乘之業 而棄之

불가위군야

不可謂君也

언심절

言甚切

경순노적선산종언

敬順怒謫善山終焉

후려조문지

後麗祖聞之

분기구자투우제읍

分其九子投于諸邑

잉위각파지 성본

仍爲各派之 姓本

묘재선산야성혹운평성

墓在善山野城或云坪城

어재 일선지

語在 一善誌

 

 

※『병술보』-1766년(영조 42)의 최초족보.이족보의「희재공행장」에「시조설화」기사가 있었다.

※ 季(계)-끝 계

※ 종(從)-들을 종, 좇을 종

※『을해보』-1995년 8차보

※ 시호와 증시(贈諡) 기사는 1935년의『임씨세가대동보』

에 나온다.

가공된 기사이다.

※ 임금을 돕는 대신(신하)의 덕을 갖추고 직언을 하는 높은 절개(「건악지절」은『후한서』에 나온다.)

 

p003.png 어느 쪽 기사가 더 진정성이 있을까?

◇ 선산임씨 최초 족보의 기사에 대하여

우선 선산임씨 최초 족보의 기사는 신라 말 정치적 격변기에 있어 그 역사적 사실 관계와 성씨의 보급 발전과정에 합치한다. 그리고 허구의 구절이나 진정성이 의심되는 부분이 발견되지 않는다.(우리말 해설은 이 책 맨 앞「Ⅰ.시조와 시조설화」편 15·18쪽 참조)

 

① 글쓴이가 확실하다.

선산임씨의「시조」를 밝히고 그「설화기사」를 싣고 있는 글은「희재공 임백령의 행장」인데 글쓴이는 희재공과 해남 동향인 윤의중(尹毅中)(1524~?)이다. 고산 윤선도의 조부로서 조선 명종·선조 때의 문신으로 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행장」의 주인공 임백령보다는 26세 연하로 희재공 서거시(1546) 23세의 청년이고 석천 임억령이 서거하신 때(1568)에는 45세의 장년임에 비추어「행장」의 내용에 희재공이나 석천공의 학문적 배경과 생전의 교유관계가 충분히 반영된 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본인 또한 그 학문적 깊이가 심대하였을 고위 문신이다. 따라서 선산임씨의 시조를 밝히면서 그 시조의 설화기사를 싣고 있는「희재공행장」의 기사가, 지어낸 허구의 것이 아닐 것임은 확실하고 그 내용으로 보아도 진정성을 의심할 단서는 없다.

② 시조의 신분과 선산임씨 가문의 위격은 일치한다.

선산임씨는 그 시조가 왕실의 사위이며 고위 무관이었음은 엄격한 신분제사회인 신라에서 상위 신분에 속하였을 것이다. 이를 반증하는 것이 선산임씨가 호장(戶長) 가문이라는 점이다. 호장이란 그 지방의 유력가문으로서 지방의 최고위직 향리(鄕吏)이다. 고위신분이 아니면 될 수 없는 직위이다.

③ 같은 내용의 다른 문건도 있다.

시조와 그 설화기사가 나오는 다른 문건도 있다. 조선 중기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박세채(1631~1695)가 1692년(숙종 18) 6월에 쓴「석천공묘표」에도 시조와 그 설화의 핵심내용이 들어 있는데「희재공행장」의 시조설화기사와 그 내용이 유사하다. 글쓴이 박세채는 특히 역사부문에서『범학전편』을 저술하기도 하는 등 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으며 학문적 소양이 대단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④ 기사의 내용에 허구성이 없다.

벼슬, 신분, 충간의 내용, 선산임씨 득관의 연유 등에 있어 역사적 사실 관계에 비추어 어긋나거나 허구로 의심될 만한 기사가 전혀 없다. 따라서 위와 같은 여러 관점에 비추어 보면「희재공행장」에 나오는 선산임씨 시조의 설화기사는 설화의 원형이고 그 신빙성이 매우 높은 글이라 할 것이다.

 

◇ 평택임씨 족보의 기사에 대하여

임양저공의 설화기사는 평택임씨 족보 최초보(1764 갑신보)에 실려 있는데 그 출전이 불명한 글이다. 선산임씨 족보에 실려 있는 기사가 쓰여 진 시기(1590년경)보다 훨씬 뒤의 글임에 틀림없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역사적 사실관계와 어긋나고 가공된 요소도 있어 그 진정성이 의심될 수밖에 없는 내용의 글이다.

① 우선, 그 출전이 불명하다.

② 벼슬이 가공되어 있다.

임양저공의 벼슬이 태사·상장군·중랑장이라 하는데 중랑장을 거쳐 상장군이 되고 태사가 되었단 말일까. 태사는 고려시대 삼사(三司)로 불렸던 정1품의 문신계 최고위직인데 직무가 없는 허직이었다. 상장군은 고려시대 최고위 무관직으로서 정3품이었다. 문신계와 무신계의 최고위직을 두루 겸하였다는 것이 의심스러우며(만약 그러하다면 역사서에 나올 것이다) 벼슬 또한 고려시대의 것이다. 그러나 중랑장은 신라시대 무관의 직함으로 사용된 예가 있다.(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의 비문)

③ 귀양기사는 역사적 진정성이 결여 되어 있다.

평택보의 충간기사를 보면“양저공의 심한 충간으로 경순왕이 노하여 선산으로 귀양 보내고 거기서 생을 마쳤다. 또한 고려태조가 그 아홉 아들을 각처로 보냈다. 묘가 선산에 있고 (양저공)이야기가 일선지에 나온다.”고 되어있다.

 

• 우선 경순왕이 양저공을 선산으로 귀양 보냈다는데 이것이 맞는 이야기일까? 선산은 효공왕 10년(907) 이후 후백제의 영역이 되었으며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935년 11월) 이후에도 여전히 평정되지 못하고 있다가 936년 9월 왕건과 신검이 최후의 결전을 벌여 왕건이 승리함으로서 통일대업을 이룬 역사적 지역이다. 그런데, 경순왕은 935년 10월 왕건에게 항서를 보내는 한편 왕도를 포기하고 다른 귀족들과 더불어 바로 개경으로 가게 되는데 이러한 급박한 사태 하에서 적의 수중에 있는 지역으로 귀양을 보낸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없다할 것이다.

또한, 그 뒤 고려태조가 공의 아홉 아들을 각처로 쫓아 보냈다고 하였는데, 아홉 아들은 무슨 근거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이중적 징벌이야기가 가당하다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기사가『일선지』에 있다고 하는데『일선지』또는 동종의 읍지 어느 곳에도 양저공의 귀양기사 또는 묘소기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사정이 이러하다면 평택보의 양저공 선산귀양 이야기는 충간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가공 윤색한 기사로 밖에 볼수 없으며, 그 진정성이 결여된 기사이다.

충간과 관련하여 선산보의 표현으로는“언심절지 경순 불능 종언(言甚切至 敬順 不能 從焉)”으로 되어 있는데, 평택보의 이 구절은“언심절지 경순노 적선산 종언(言甚切至 敬順怒 謫善山 終焉)”으로 교묘히 바뀌어져 있다.

언심절지 - 심히 통절하게 간언하였으되,

경순불능종언(從焉) - 경순은 들으려하지 않았다.

경순노(怒) 적(謫)선산종언(終焉) - 경순이 노하여 선산으로 귀양 보내매 거기서 생을 마쳤다.

또한, 신라 왕조를 나타내는 말로서 선산보는「만승지업(萬乘之業)」이라 하였는데, 평택보는「천승지업(千乘之業)」이라 하고 있다.「천승(千乘)」은 제후를 가리키는 말인데 당당한 왕조인 신라를 제후국으로 격하시킴은 우리의 자존심을 잃게 하는 비굴한 표현이다.(「만승(萬乘)」은 중국에서 천자를 의미함으로 이를 씀은 불경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천승 - 전시에 임금이 제후에게 천대의 병거를 내준다는 뜻에서 제후를 뜻함.

*만승 - 만대의 병거를 거느린 사람 곧 임금(천자)을 뜻함.

보상군덕유건악지절(輔相君德有謇諤之節)은“임금을 돕는 대신(신하)의 덕을 갖추고, 직언을 하는 높은 절개”를 뜻한다. 높은 도덕심과 절의를 나타내고자 다른데서 인용한 구절이다.(「건악지절」은『후한서』에 나온다. 곧을 건, 곧은 말할 악)

• 이러한 표현으로 대비하여 보더라도 임양저공의 설화는 최초 선산보(『병술보』)의 기사가 그 원형이고 평택보의 기사(이를 따른 2차 이후의 선산보 기사 포함)는 최초 선산보의 기사(그 원전의 기사)를 변형시켜 인용한 것으로도 추리된다.

p003.png 다수관의 시조가 임양저공이 아닐까?

원형의 설화로 보이는 선산보의 기사에 임씨의 파계(派系)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나온다. 즉“고려태조가 양저공의 충간 사실을 나중에 듣고 그 자손을 여러 고을로 보냈는데 선산에 살게 된 이가 선산임씨의 선조(관조)이다.”라는 구절이다. 이 기사는 고려태조가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936)후 태조 23년(940) 경주에 대도독부를 설치하고 전국에 9주를 두면서 지방의 주부군현에 대하여 대대적인 개편작업과 함께 토성(土姓)을 분정 하였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 관계와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구절 또한 역사적 사실 관계에 부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선산관을 비롯한 일부관은 임양저공이 그 시조가 됨을 나타내는 기사이다. 즉, 원형의 이 설화기사는 임씨가 임팔급 단일시조가 아니라는 반증인 동시에 임양저공이 임팔급공의 후계가 아님을 나타내는 반증이면서 일부관의 시조가 임양저공일수도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p003.png 평택보 상계의 모순

임양저공이 평택임씨의 상계가 맞을까? 평택임씨 족보는 상계의 인물 일곱분(팔급 ↔ 몽주)을 개별 인물별로 나열하여 소개하는 편제인데 예외적으로 양저공만 그 자를 무(碔)공으로 하고 있다. 이 계대내용은 평택보에 나오는 양저공의 설화기사중“양저공의 9자를 여러 고을로 보냈다.”라는 구절과 상치(相馳)된다.

즉, 평택보 기사대로라면,

① 선산관은 양저공이 저절로 시조(관조)가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양저공이 선산으로 귀양 와서 선산에서 살다가 돌아가셨으므로.

② 그런데 무(碔)공을 그 자로 하고 있으므로 이분 또한 선산관의 선조가 되는 셈이다.

③ 그렇다면 碔공을 제외한 기타 8자가 평택관 등의 파조(선조)가 되는 셈인데, 이렇게 되면 팔급공이 평택관의 시조 내지 관조라 함과 모순될 것이고, 양저공의 9자가 각 파의 관조가 된다는 내용은 각관 족보 어디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오직 팔급에서 몽주까지의 상계만 강조하면서 이 상계가 평택관을 비롯한 모든 임씨의 상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평택보의 상계가 이렇게 모순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그 상계가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고, 팔급공과 양저공 또한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나타내는 반증이다. 더 나아가 양저공 설화대로라면 평택관도 시조가 임양저공이고 그 관조가 임양저공의 자손이 되는 셈이다.(실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게 된 원인 즉 양저공의 설화기사가 어떻게 평택보에 올려져 있을까 하는 점을 추리해 보자 .당초 선산임씨의 문중이 간직하고 있던 원형의 임양저공 설화가 임씨들 관조의 설화로도 그럴듯하므로 임양저공을 상계로 삼으면서 설화도 같이 옮겼다는 가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서「임양저」의 충간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선산 귀양 이야기”로 변형시키고 묘소가 선산야성에 있다고 덧붙이면서 이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일선지』에 그 내용이 있다고 설화를 바꾼 것으로 가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임양저를 상계로 삼고 설화를 변경시켜 놓고 보니 더욱 그 모순점이 내재하게 된 것이다. 즉, 선산귀양·선산야성(평성)묘소· 『일선지』등의 이야기는 모두 선산임씨에 특화된 이야기로서 평택임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가 되고만 것이다.(참고로 1916년 진주에서 발간된『동국속수잠헌보감(東國續修簪獻寶鑑)』이라는 책자「절의(節義)」편에 경순왕자와 임양저공을 충간의 예로서 소개하고 있다.) 덧붙여,『한국의 성씨와 족보』(이수건 교수-영남대, 서울대출판부 2006)에 의하면『세종실록지리지』의 토성은 그 시조가 결코 중국도래인이 될 수 없다고 설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