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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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04.png 1. 선생은 1496년(연산 2) 병진 2월 16일 태어나시고 1568년(선조 1) 무진 3월 9일 향년 73세로 서거하셨습니다. 자(字)를 대수(大樹) 호를 석천(石川)이라 하며 별호를 하의(荷衣)라 합니다. 「석천(石川)」은 선생이 나고 자란 해남의 구교리 해촌사(海村祠) 앞을 흐르는 개울의 이름입니다. 선생이 자란 곳이기에 호로 택하였고 별호「하의(荷衣)」는“연잎으로 절어 만든 옷”즉“세속을 초월한 훌륭한 은자(隱者)의 옷”을 뜻하는데 선생의 오묘한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p004.png 2. 선생은 7세에 숙부이신 우리(遇利)의 문하에 들어가 가학을 익혔으며 14세 때에는 동생 백령과 같이 광주 외가의 주선으로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 육봉(六峯) 박우(朴祐)(1476~1546) 형제를 찾아가 수학하였습니다. 박동량(朴東亮)(1569~1635)의『기재잡기(寄齋雜記)』가 전하는 일화를 보면“눌재는 석천에게 장자를 읽도록 하면서 말하기를‘너는 반드시 문장이 될것이다’라고 하고, 백령에게는 논어를 읽도록 하면서‘족히 관각지문(館閣之文)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라 하였다”고 합니다.(관각-홍문관과 예문관) 선생은 중종 11년(1516)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0년(1525) 30세에 식년시(式年試) 문과 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홍문관에서 근무하였고 임치(臨淄) 첨사(僉使), 동복현감, 사헌부지평(持平), 장령(掌令), 홍문관 교리(校理), 전한(典翰)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중종 39년(1544) 6월 홍문관 응교(應敎), 8월 승정원 동부승지(이때 퇴계이황이 선생의 후임으로 홍문관 응교가 됨), 9월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정3)이 되었는데 그 해 11월 15일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11.20)하였으나 이듬해 을사년(1545) 7월 1일 인종이 승하하자 명종이 즉위(7.6)하게 되었는데 12세의 어린나이라 그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이해 8월 인종과 명종의 외척간의 다툼 속에 소위「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고 정국은 격동기를 맞이합니다. 「을사사화」는 명종즉위년(1545) 8월 22일부터 8월 30일 사이에 일어난 사건인데 명종2년(1547) 9월에 일어난「양재역벽서사건(정미사화)」과 함께 영의정 유관(柳灌),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기타 많은 사림파(士林派) 인물들이 처형 또는 유배되어 사림들이 일대 수난을 겪은 사건입니다.(자세한 내막은 희재(충헌)공 임백령의 장에서 다룰 것입니다.)

 

p004.png 3.「을사사건」과 관련하여 유명문인이 쓴 문집이나『명종실록』의‘사신(史臣)이 논한다’(이하「사론(史論)」혹은「사왈(史曰)」,「사평(史評)」으로 쓰겠습니다. )를 보면 선생과 충헌공(임백령)을 대립시켜 형제간을 선과 악의 관계로 기술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을사사건」의 피화자(被禍者)인 사림(士林)들이 악의적으로 충헌공을 폄하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필자는 보는 것입니다.(자세한 논구는 충헌공의 장에서 밝히겠습니다.)그 대표적인 예가『명종실록』즉위년 11월 7일의「사론」입니다. 즉, 석천선생이 신병을 핑계로 금산 군수직의 사표를 제출하니 조리하고 올 것을 명하는 기사에서“(전략) 억령은 (백령을) 굳이 말렸지만 듣지 않자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백령이 한강에서 전송하였는데 억령이 이런 시를 지어주었다.

 

好在漢江水(호재한강수) 安流不起波(안류불기파)

임억령은 사람됨이 소탈하여 얽매인데가 없었으며 또 영화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았다.(후략)” 선생이 언제 금산군수직을 제수 받았는지 명확치 않으며 또한“억령이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백령이 한강에서 전송”할 때 즉 위의 전송시를 언제 지었다는 것인지도 불명합니다. 그리고「을사사건」은 8월에 일어났고, 금산군수직은 11월에 사직하는데「사론」중간에 나오는 억령이 백령을‘말렸다’는 기사는 또 언제를 말하는지 앞뒤의 시간관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 김헌태(金憲泰)선생이 편역한「조상의 위업과 유적을 찾아서(7)」의「석천선생」편을 보면‘을사사화가 일어날 줄을 짐작하고 서울을 떠나면서 지은 시’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정확한 것이 아닌듯합니다.

• 선생의 문집인『석천집』의「부록」에도 이 기사가 실려 있는데 그 출전(出典)을 잠곡(潛谷) 김육(金堉)(1580 선조 13~1658 효종 9)의『해동명신록』이라 하고 있습니다.

• 김잠곡의 글에는“임백령이 원종공신녹권을 보내오자 산속계곡으로 들어가서 제문을 지어 불살랐다”고 하는 또 다른 기사와 함께 위「사론」의 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석천선생이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는 근거는 명확하지가 않는 일입니다. 이「사론」과 잠곡의『해동명신록』기사는 그 뒤 계속 임억령과 임백령을 대비하는 일화로 인용되는데 이「사론」은 여느「사론」과 마찬가지로 관료개인을 폄하하는 즉 임백령 개인을 폄하하는 기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기사는 사실관계의 진정성 여부를 떠나 석천선생의 고결한 인품을 나타내는 일화의 예로는 합당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서 우리는 선생의 높은 도덕성과 훌륭한 인품의 면모를 가려 새길만한 일화입니다. 이러한 일화들은 우리 선림의 쇠잔(衰殘)을 막아 준 정신적 버팀목이기도 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제」로 되어있는 송별시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습니다.

 

好在漢江水(호재한강수)

잘있거라 한강수야

安流莫起波(안류막기파)

조용히 흘러 물결 일구지 말라

孤舟宜早泊(고주의조박)

외로운 배 일찍 대어 정박함이 마땅하리

風浪夜應多(풍랑야응다)

밤새 풍랑이 많을 것 같으니

 

p004.png 4. 선생이 실록의「사왈(史曰)」에서 처럼 충헌공과 대립관계가 아님을 나타내는 예가 있습니다. 이 뜻은 선생이 쓰신 동생 임구령공의「행장(行狀)」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월당(月堂) 임구령(林九齡)공은 1561년(명종 16) 4.29 남원도호부사를 배수하여 재직 중 1562년(명종 17) 11.26 병환으로 향년 62세에 서거하셨는데 1563년(명종 18) 3월「행장」을 쓰시었습니다. 이「행장」은 월당공의 인품과 생애, 벼슬, 공훈 등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특히「을사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사건에서 월당공이“사직의 위험을 구하였다”는 사연과 이로 인해 위사2등공신이 되고 국왕(명종)이 예조좌랑 정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행장」을 쓰신 시기가 월당공 사후 이듬해 봄인데 선생이「을사사건」을 보는 시각 즉 동생들이 관여케 된「을사사건」의 원인에 대한 시각의 일단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예입니다.

 

『명종실록』은 1568년(선조 1)~1571년(선조 4) 쓰여 졌는데 이때의 사관(史官)들의 시각과 석천선생의 시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으로 관료개인을 폄하하고 있는 실록의「사론」과는 다른 시각입니다.(임구령공에 대한「사론」도 마찬가지로 폄하기사로 되어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선생은 동생에 대한 정을 시로서 나타낸바 있는,「동생 인순을 북경에 보내면서」(別舍弟仁順赴京 별사제인순부경)라는 시에서 먼길의 여행을 염려하고 있고, 귀국 도중에 불귀의 객이 되매「죽은 동생을 애도』(悼亡弟 도망제) 하면서“꿈속에서도 의지하고 즐겁게 살 것”을 염원하였습니다. 실록의「사론」이나 문인들의 문집에서처럼 두 분을 선악관계의 대립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석천 선생의 인품의 측면에서 이러한 기사들을 새겨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p004.png 5. 선생은 금산군수직에서 물러난 후 창평(담양) 성산(星山)에 별서(別墅)를 짓고 고향 해남을 오가며 시를 지으면서 여러 고명인사들과 교유하며 지내다가 57세 때인 명종 7년(1552) 7월 18일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정3)로 제수되어 관직에 복귀하고(참고로 이때 윤원형은 우의정이었음) 동년 9월 12일 병조 참지(參知)(정3), 이듬해 명종 8년(1553) 10월 21일 강원도 관찰사(종2)를 배수합니다. 그 후 명종 9년(1554) 6월 13일 강원관찰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귀향하였다가 명종12년(1557) 3월 8일 담양부사직을 제수받고 명종14년(1559) 가을까지 재직하였으며, 담양부사직에서 물러난 9년 뒤 선조1년(1568) 3월 9일 향년 73세로 서거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유의할만한 대목이, 선생이 관직에 다시 나아간 때가 윤원형이나 문정왕후가 집권중인 시기였다는 사실입니다. 선생이「을사사건」과 동생 임백령에 대하여 세인(世人)들이 논한 것처럼 크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방증(傍證)일수도 있는 것입니다.(이는 퇴계 이황도 마찬가지입니다.)

 

p004.png 6. 이제 선생의 인품에 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후학들이 펴낸『석천집(石川集)』의 부록에 안동인 김수항(金壽恒)(영의정까지 역임한 숙종때 최고의 문신)이 1678년(숙종4) 영암정배시에 쓴 석천선생의「행적기략(行蹟紀略)」이 들어있는데 (『선산임씨족보』에「석천선생행장」으로 실려 있음) 여기에서 선생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선생은 기위고결(奇偉高潔)한 천품을 타고나시어 세속에 따라 영합하기를 싫어하니 자주 간인(奸人)들의 미움을 샀고 관직에 있었으나 항상 누락되어 불우하게 지내다가...(중략)...산속에 은거하여 경전을 탐구하다가 돌아가셨다. 문장은 광대하고 준일하며 더욱이 시에 뛰어나 붓을 잡으면 일필휘지로 써내니 당시의 사람들이 다투어 음송하였다. 일찍이 창평(昌平)(담양) 성산동(星山洞)의 수석(水石)이 좋음을 사랑하여 집을 짓고 살았는데 집은「서하당(棲霞堂)」이라 이름하고 정자는「식영정(息影亭)」이라 하여 기문(記文)과 여러 시가 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성산별곡」을 지어서 선생을 찬미한 것이 지금까지 불리어 오고 있다.”

 

※ 김수항의 정배지 - 문곡(文谷) 김수항(1629-1689)은 숙종 때 종실의 추문을 들어 그 처벌을 주장하다가 집권 남인파의 미움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었는데 그 적거지(謫居地)가 구림마을(지금의 군서면 서구림리)로「회사정」앞 뜰에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p004.png 7. 석천(石川) 선생의 인품에 대하여 정익섭(丁益燮)(전남대 교수)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석천집을 읽고」- 1989. 6『금호문화(錦湖文化)』

1) 시재(詩才)의 인물

조선 최다작(총3,100여수)의 시백(詩伯)이며, 호남의 사종(詞宗)이었고, 시의 내용 또한 호탕장쾌(豪宕壯快)하였으므로 1560년(명종15) 중국사신이 래조(來朝)하였을 때 이에 겨룰만한 시재(詩才)는 송순(宋純), 이황(李滉)과 함께 석천(石川)밖에 없었다고 하였고(명종실록),

2) 청정고고(淸淨孤高)한 인물

세상 명리와 부귀재화에 초연하여 일생을 청빈하고 고고하게 살았으며 퇴계(退溪-이황)가 석천에게 준 차운시(次韻詩)에“마음은 선(善)을 좋아하니 난초같이 향기롭고 기개는 간흉을 미워하니 태산같이 높다.”고 그의 고매한 인품을 찬양하였으며,

3) 지기(志氣)의 인물

초지일관 의지와 기개가 있고 세상 영달이나 명리에 영합하지 않고 불의와 부정에 감연히 맞섰으니, 대사간(大司諫)때에는 왕에게 상소하여 언관(言官)의 역할을 당당히 주장하였고 1545년 을사(乙巳)사건 때에는 이에 편들지 않고 홀연히 하향하였고,

4) 풍류(風流)의 인물

일생을 시(詩)와 더불어 자연을 사랑하였고 쇄락고아(灑落高雅)한 품성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으니, 백옥봉(白玉峯)은“이 시대의 적선(謫仙)”이라 칭송하였고, 만년에는 식영정(息影亭)에서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를 벗하면서 탈속 고매한 신선생활을 만끽하셨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p004.png 8. 석천(石川)선생은 우리나라 역사, 문화의 결정판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다음과 같이 8개소에 그 이름이 기술되고 있습니다.

• 임억령(林億齡) - 인물소개 (18권 752쪽)

• 석천집(石川集) - 문집의 소개 (12권 152쪽)

• 해촌사(海村祠) -「해남군 편」에 나오는 사우(祠宇)의 배향인물로 소개 (24권 480쪽)

• 식영정(息影亭) - 관련인물로 소개 (13권 633쪽)

• 도원서원(道源書院) -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에 있는 서원인데 배향인물로 소개 (6권 899쪽)

• 한시(漢詩) - 조선 한시사에서의 임억령의 위상 소개(24권 251쪽)

• 근체시(近体詩) - 조선 근체시사에서의 임억령의 위상 소개(4권 128쪽)

• 시우인(示友人) - 석천시(石川詩)의 백미(白眉)임을 소개(13권 535쪽)

 

p004.png 9. 석천(石川)선생은 「호남의 사종(詞宗)」이라고 일컬어지며 우리나라 한시, 근체시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즉,

1) 석천이 일생 73년 동안 읊은 시는 총 2,700여수에 이른다고 하니 우선 시의 양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습니다.

• 『석천집(石川集)』(규장각본-영인본)에 수록된 것이 2,300여수이며(후술자료“『석천집』에 수록된 석천시 편, 수”참조), 석천 사후 제주목(濟州牧)에서 간행한 또 다른『석천집』(고려대 만송문고소장인)에도 1,200수가 있어서 이중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도합 2,700여수가 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조선시대 문인 가운데 가장 많은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임남형저『석천임억령의 생애와 시문학』-월인출판사 간 참조)

2) 석천시(石川詩)의 시격(詩格)을 보면,

▷ 칠언시(七言詩)보다 오언시(五言詩)가 압도적으로 많고 율시(律詩)보다 절구(絶句)가 훨씬 많으며, 기법은 사실적(寫實的)인 것보다 낭만적인 것이 더 많다고 합니다. (정익섭 전남대교수-1989. 6월『금호문화』참조)

▷ 그래서 윤광계(尹光啓)는『석천집』서문에 그 시격이“분방하고 웅장하여 장강대하처럼 주야로 도도히 흘러도 다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 율곡 이이(李珥)는 석천시를 읽고 감격하여 보낸 차운(次韻)시에서“평생 무릎을 꿇지 않았는데 오늘에야 공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生平不屈膝 今日爲公屈생평불굴슬 금일위공굴)”(『율곡전서』권1 )고 하였습니다.

▷ 고경명(高敬命)은“석천선생의 시는 곤륜산의 옥보다 더 아름답고, 뛰어난 재주는 이태백과 다름없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 스승인 눌재(訥齋)(박상-朴祥)가 석천에게 화답하는 차운시에서“혹 시가 제대로 되지 않은 데가 있으면 서슴치 말고 고치시오”라고 제자의 시재(詩才)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 권철(權轍)(3정승 지냄)은 석천의「권철상국과만귀경(權轍相國瓜滿歸京)…」으로 시작되는 (『석천집』4책 217쪽) 17운의 시 1편을 받고 감격하여 시지(詩紙)에 기름을 먹여 소중히 간직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한시”및“근체시”조에서는“호남시단의 선구자이며 수준높은 당법(唐法)으로서 당시의 시단(詩壇)을 다채롭게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석천시에 대하여 퇴계 이황(李滉)은 규구(規矩) 법도(法度)를 강구하고 음률을 맞추어야 할 것이라고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후술 참조) 선생이 말년에 담양 식영정(息影亭)에 은거하면서 식영정 4선(四仙) 즉, 석천, 김성원(金成遠), 고경명(高敬命), 정철(鄭澈)을 비롯한 제자들, 수많은 시인 묵객들과 교유하면서 성산(星山-담양식영정이 있는 곳) 가단(歌壇)을 주도, 계산풍류(溪山風流)를 이루는 과정에 대하여는『석천집』(1989. 2. 27 여강출판사 간) 권두의「석천집해제」(임형택 교수),「석천선생의 생애와 사상」(임용주 교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3) 한편 3천수가 된다는 석천시의 주제별 분류 연구는 아직 이루어져 있지 않으나, 대략

-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시(抒情詩)

- 전설 따위를 서사적으로 읊은 서사시(敍事詩)

- 무위(無爲), 무심(無心), 무아(無我)의 자연회귀에 몰입하는 사상시(思想詩)

- 제현들과의 수창시(酬唱詩)등이 있으며, 또한 여유시(旅遊詩), 누정시(樓 亭詩)도 많습니다. 즉,『석천집』을 보면

〈제1책〉승부록(乘桴錄) - 임치(臨淄) 첨사(僉使)때 서남 여러 섬의 말(馬)을 점검하면서 쓴 기행시

〈제2책〉강진 우거(寓居)시 남방 여러 곳을 순회했을 때의 시

〈제3책〉강원도 관찰사 때 관동지방의 아름다운 자연을 순력하며 지은 시

〈제4책〉행록(行錄) - 담양에서 고향(해남)을 오가며 지은 시

 

그 외 선위사(宣慰使)로 영남을 순방하였을 때의 시, 지리산, 해인사 탐방시 등이 있습니다. 유명한 누정(樓亭)을 들러 머물면서 감회를 읊은 시는 식영정 20영(詠), 서하당(棲霞堂) 8영, 요월당(邀月堂), 쌍취정(雙醉亭)의 제영(題詠)이외에도 전국 각처의 누정시가 수많이 있습니다.(『을해보』1권 276~278쪽에 몇 편 소개) 이와 같이 시의 소재도 자연, 인사(人事)는 말할 것도 없고 누정, 독서, 화초, 음주, 탄금(彈琴), 법고(法鼓)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기 그지없습니다.

 

4) 선생의 시중에서 백미라고 하는 시「시우인(示友人)(자방 子芳)」 (『석천집』제3책 177쪽 참조)은 산사에서 봄을 보내며 그 감회를 적어 벗에게 보인(示-보일 시. 보게 함, 알림) 칠언 절구의 시로 허균(許筠)(선조, 광해조)이 편찬한『국조시산(國朝詩刪)』, 남용익(南龍翼)(숙종조) 편찬의『기아(箕雅)』등의 고전에도 채록되어“자연과 몰아일체의 경지를 초절한 낭만의 세계를 담고 있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또한 임기중(林基中) 교수(동국대)의『고교국어교과서』에도 인용되어“자연과 인간에 깃든 정(情)”의 소재로 한다고 하며, 대한민국 서예대전(1998)에서 대상을 받은 김효순(金孝淳)이 그 소재로 삼았음을 볼 때 4백 년 전의 선생의 시정(詩情)이 현재에도 그대로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선생의 시를 소개합니다.

 

示友人(子芳)/시우인(자방)

벗에게

古寺門前又送春(고사문전우송춘)

옛 절문 앞엔 봄이 떠나고

殘花隨雨點衣頻(잔화수우점의빈)

비에 젖은 꽃잎이 옷을 점찍네

歸來滿袖淸香在(귀래만수청향재)

향 내음 소매 속에 가득 차 있어

無數山蜂遠趁人(무수산봉원진인)

수많은 산벌이 먼데까지 따라 오네

 

p004.png 10. 석천선생(1496년 연산2~1568 선조1)의 사제(師弟)와 교우(交友)

▷ 스승

눌재(訥齋) 박상(朴祥)(22 연상)(1474 성종 5~1530 중종 25)

육봉(六峯) 박우(朴祐)(20 연상)(1476 성종 7~1546 명종 1)

▷ 제자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37 연하)(1533 중종 28~1592 선조 25)

송강(松江) 정철(鄭澈)(40 연하)(1536 중종 31~1593 선조 26)

인재(忍齋) 김성원(金成遠)(29 연하)(1525 중종 20~1597 선조 30)

- 석천과 이 세분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함.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23 연하)(1519 중종 14~1581 선조 14)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41 연하)(1537 중종 32~1582 선조 15)

백호(白湖) 임제(林悌)(53 연하)(1549 명종 4~1587 선조 20)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43 연하)(1539 중종 34~1583 선조 16)

- 이상은「성산가단(星山歌壇)」을 형성하였던 인물들.

▷ 교우(交友)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8 연상)(1488 성종 19~ ? )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5 연상)(1491 성종 22~1570 선조 3)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3 연상)(1493 성종 24~1564 명종 19)

면앙(俛仰) 송순(宋純)(3 연상)(1493 성종 24~1582 선조 15)

퇴계(退溪) 이황(李滉)(5 연하)(1501 연산 7~1570 선조 33)

남명(南冥) 조식(曺植)(5 연하)(1501 연산 7~1572 선조 5)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7 연하)(1503 연산 9~ ?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4 연하)(1510 중종 5~1560 명종15)

소제(蘇齊) 노수신(盧守愼)(19 연하)(1515 중종 10~ ? )

사암(思菴) 박순(朴淳)(27 연하)(1523 중종 18~1589 선조 22)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31 연하)(1527 중종 22~1572 선조 5)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38 연하)(1534 중종 29~1599 선조 32)

율곡(栗谷) 이이(李珥)(40 연하)(1536 중종 31~1584 선조 17)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43 연하)(1539 중종 34~1609 광해 1)

 

p004.png 11. 특히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일컫는 퇴계 이황과의 교우 관계를 보면,

1) 석천(1496 연산 2년생)은 퇴계(1501 연산 7년생)의 5년 연상이고 홍문관 응교(應敎)의 동일자 선후임 관계로서 각별한 사이로 생각됩니다.

2) 『석천집』에서의 퇴계에 대한 증시(贈詩)는 2편 7수인데 비하여『퇴계시대전(詩大全)』의 차운(次韻) 또는 동부시(同賦詩)등 석천을 거명한 시가 10편 20수에 이릅니다.

3) 그중에는

석천이 선위사(宣慰使)로 영남지방에 갔을 때 퇴계를 방문하여 유산수창(遊山酬唱)한 것이 있고

퇴계의「칠계10영(漆溪十詠)」(『퇴계시대전』489쪽 참조 )을 보면 퇴계가 광주를 방문한 것 같으며(칠계(천)는 광산 극낙천을 말함)

퇴계의「분어(盆魚)」시를 보면 석천의 방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등 두 분이 서로 자주 방문하여 수창(酬唱)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4) 두 분이 서로 주고받은 시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다(多)」자(字) 운(韻) 인데(구절의 끝 글자가「多」로 되어 있음), 석천이「증경호퇴계(贈景浩退溪)」의 제목으로 보낸 7수에 대하여, 퇴계가「次韻答林大樹(차운답임대수)」등 6수로 답하고 있는 시들입니다.

5) 그러나 두 분은 시작법(詩作法)이나 시격(詩格)에 있어서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명종 8년(1553) 10월 석천이 강원도관찰사의 임명을 받고 퇴계를 방문한 자리에서 서로의 시론(詩論)을 토론하고 있는데, 퇴계의「희임대수견방논시(喜林大樹見訪論詩)」(『退溪詩大全(퇴계시대전)』509쪽 참조)를 보면,

석천은“나의 시는 호탕함만 숭상하지 어찌 교묘하게 다듬으리오?”하니까

퇴계는“규구법도(規矩法度)를 강구해야하며 다시 허심탄회하게 다듬어서 자구를 저울질하여 음률에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왕소王甦저『퇴계시학』15쪽 참조)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시인과 근언신행(謹言愼行)한 도학자의 사이에는 그 인격의 차이만큼 그 시격에도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석천선생은 강원감사 부임 후 순력산수(巡歷山水)와 시작(詩作)에 몰두하다가 부하관원의 탄핵상소(불무직사不務職事라 하여)를 받고 파직이 되기까지 한 일화는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p004.png 12. 석천선생의「시문학 및 그의 사상」에 대한 조명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 『석천시집』의 출간

1989. 8월「민족문화추진회」가 주관하여 선조들의 문집을 가려모아 200책으로 정리 출간한『한국문집총간』의 제27책에「퇴계일고(退溪逸稿)」와 함께 간행됨

2) 『석천선생문집』의 발간

1997. 7월「한국문집편찬위원회」가 편집하여 경인문화사에 의해「한국역대문집총서 2203」으로 영인본이 발간됨

3) 「석천사상 학술대회」

「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이라는 주제로 1995. 6. 3 광주시가 주최한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 석천의 시대와 생애(홍우흠-영남대 교수)

• 조선중기 호남의 사림(士林)과 석천(이해준-공주대 교수)

• 석천의 기행시(紀行詩)에 대하여(김선기-충남대 교수)

• 16세기 호남의 시단과 석천(박준규-전남대 교수)

• 석천시문학의 특징(사상지향과 문학작품의 특징)(권두환- 서울대 교수)

• 석천시의 작품세계(작품세계의 다양성 추구)(최한선-동신대 교수)

• 종합토론-최승범 교수(전북대)의 사회로 여러 교수들 참여

4) 『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출간

1996. 2. 29 광주광역시와 향토문화개발협의회가 공동으로『향토문화·조선명현연구 제 6집』으로 출간

5) 『한국인의 가훈(家訓)』에 수록

손인수(孫仁銖) 교수가 저자로 문음사(文音社)에서 간행

• 첫째-마음가짐을 강직하게 하라(심강직心剛直)

• 둘째-학문에는 법이 있다(학식유방처學識有方處-『유분록 幽憤錄』)

• 셋째-소나무는 고상하여 벼슬을 받지 않는다.(송고불수봉松高不受封- 『왕조실록』)

6) 그밖에도

• 「석천시비(詩碑)」의 건립

• 「광주가사문학관(歌辭文學館)」의 건립

• 「식영정(息影亭)」을 광주관광코스에 포함시켜 편성

7) 「조선의 가사(歌辭)」특히 한시(漢詩)를 논할 때는 석천시(石川詩)가 관련 논문이나 단행본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며, 석·박사 학위논문의 주제로도 채택되고 있다고 합니다.(이 글 말미에 첨부한「임억령 참고문헌」참조)

8) 석천 선생의 재조명 사업과 관련하여서는 후손인 임남형(林南炯)씨 및 임영주(林榮柱)씨의 역할이 컸으며, 특히『석천집』(1989. 2. 27 여강출판사 간)의 출간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9) 임남형씨는 그간의 연구논문을 모아『석천 임억령의 생애와 시문학』이라는 저서를 2011. 12. 20 도서출판 월인(月印)을 통하여 발간한 바 있습니다.

 

p004.png 13. 끝으로, 선생의 인품과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시 두 수를 소개합니다.

•「술」에 대한 시

老去方知此味甘(노거방지차미감)

늙어가니 바야흐로 술맛을 알겠구나

一杯通道不須三(일배통도불수삼)

석잔을 기다릴 것 없이 한잔이면 도가 통한다

君看稽阮陶劉李(군간계완도유리)

그대는 혜강, 완적(阮籍), 도연명, 유령(劉伶), 이백을 보라

不義公侯伯子男(불의공후백자남)

그들은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을 부러워하지 않았다네

 

• 鳥嶺(조령)

功名眞墮甑(공명진타증)

공명은 떨어뜨린 시루와 같고

聚散一浮雲(취산일부운)

사람이 모이고 흩어짐은 뜬 구름이라

獨向空山裏(독향공산리)

나홀로 빈산 깊숙히 돌아가노니

蒼蒼落日曛(창창낙일훈)

맑은 하늘 지는 해에 땅거미 짓는다

 

p004.png 14.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書院)이나 사묘(祠廟)

선생은「호남의 사종(詞宗)」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림(士林)의 사표(師表)로서도 우뚝하신 분이라 선생을 기리는 서원(書院)이나 사묘(祠廟)가 있습니다.

▷ 도원서원(道源書院)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있는 서원.

1670년(현종 11) 최산두(崔山斗)(중종 때의 문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된 서원. 1687년(숙종 13) 사액(賜額)되었으며 임억령(林億齡), 정구(鄭逑), 안방준(安邦俊)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임억령은 중종 28년 1533 동복현감을 지냄)

▷ 해촌사(海村祠)

전남 해남읍 구교리에 있습니다.

당초 1652년(효종 3)「석천사」를 세우고 선생을 독향하였으나 1689년(숙종 15) 최보(崔溥) 유희춘(柳希春)을, 1721년(경종 1) 윤구(尹衢), 윤선도(尹善道)를 추향하여「오현사」라 하였음.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1901년 다시 설단하였으며 1922년 선생의 생질 박백응(朴伯凝)이 추향되어 일명「육현사」라 함.

▷ 성산사(星山祠)

전남 담양군 창평 지곡리 성산(星山)에 있습니다.

1795년(정조 19) 세워짐. 임억령을 주벽(主壁)으로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 조흡, 김창흡(金昌翕)을 배향. 2년 후 정민하(鄭敏河), 정근(鄭根)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홍수로 훼손되어 강 건너 석저촌(石底村)으로 옮기고 환벽사(還碧祠)라 하였으나 1868년(고종 5) 사우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근년에 담양군에서 성산사로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 식영정(息影亭)에 대하여

식영정은 담양군 남면 지곡리 별뫼(星山 성산)자락 끄트머리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로서 그 뜻이‘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낭만적 이름의 정자입니다. 「식영(息影)」이라는 이름은『장자』「잡편」「어부(漁夫)」의 장에 나오는 글귀에서 따온 것입니다. 고기잡이(어부)가 다음과 같이 공자에게 충고하는 내용의 글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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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가 공자에게 말하기를,“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影영)가 두렵고 자기 발자국(迹적)이 싫어서 이것들을 떠나 달아나려 하였는데 발을 더욱 자주 놀릴수록 발자국은 더욱 많아졌고 빨리 뛰면 뛸수록 그림자는 자기 몸을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그는 빨리 뛰다가 결국 힘이 떨어져 죽어버렸다 합니다. 그는 그늘 속에 쉬면 그림자가 없어지고(處陰以休影처음이휴영) 고요한데 머물면 발자국이나지 않는다(處靜以息迹 처정이식적)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어리석음도 지나치다 하겠습니다.”

 

공자는 여러가지 곤경을 겪었던 이유를 지적하고 자기 몸을 닦고 진실함을 지키고 밖의 일이나 물건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하고 좀 쉬면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봐라 하는 충고입니다. 고품격 여행기로 스테디베스트셀러인 유홍준 교수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제1권에 남도 답사 일번지 강진, 해남과 함께「담양의 정자와 원림」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개관을 엿볼 수 있는 소개 글을 보면“광주직할시의 동북방향 무등산 북쪽기슭과 맞대고 있는 고서면과 봉산면 일대에는 참으로 많은 누각과 정자 그리고 원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면앙정(俛仰亭), 송강정(松江亭), 취가정(醉歌亭), 식영정(息影亭), 거기에 송강 정철의 별서(別墅)까지 둘러보는 답사코스는 조선시대 조원(造園)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황금코스이며 이른바 조선시대 호남가단(歌壇)이라 불리는「가사(歌辭)문학」의 본고장이니 국문학도들에게는 필수의 답사코스가 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우리의 선조 석천 선생이 머물며 시가를 쓰고 인근 정자의 주인들과 또는 원지의 내방인사들과 교유하신 본거지입니다.

 

선생이 어머니(음성박씨)의 뜻에 따라 동생 임백령과 함께 눌재 박상의 문하가 되어 배울 때 김윤제(金允悌)라는 분과도 동문수학하였는데 이분이 환벽당의 주인이고 정철의 처조부가 되며 정철이 담양에 머물도록 주선하였다 합니다.정철은 큰 누이가 인종의 귀인이며 둘째 누이가 계림군(유瑠)의 부인이었는데 을사사화 때에 계림군이 관련되어 아버지가 여러 곳으로 유배되었다가 1551년 풀려나자 그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담양의 창평으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석천에게서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 김성원에게서 학문을 배웁니다.

 

정철은 1561년(명종16) 26세에 진사시에 수석합격하고 다음해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습니다. 정철은 석천이 담양부사를 사임하고 성산(星山)에 올 때인 1559년 가을 이후 1560년 석천의 문하생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김윤제의 부인이 양씨부인인데(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동생) 이 양씨 부인에게 친척동생이 있었는데 이 분이 석천의 담양집 부인이 됩니다. 석천의 양씨부인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첫째사위가 고맹영(高孟英)이고, 둘째 사위가 김윤제의 당질(堂姪)인 김성원(金成遠)입니다.(족보에는 金聲遠으로 나옴) 임남형씨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석천은 1545년 이전에 담양에 서하당을 짓고 가솔들을 살렸다고 하며 15년 후 1559년 가을 담양부사를 그만둔 후 이곳에 정착 하였을때 김성원이 처음 찾아와 제자가 되었으며 뒤에 사위로 삼게 됩니다.식영정은 당초 서하당 옆의 부속건물로 1560년경 지은 정자인데 선생이 1568년 해남본가에서 별세하게 되니 사위 김성원이 물려받아 관리운영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력의「식영정」에 대하여

1)『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송강정, 환벽당과 더불어 송강유적으로 불린다. 원래 김성원이 1560년 임억령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2) 1972년 전라남도 지방 기념물로 지정되고 난후 그「안내기」를「정송강유적보존위원회」에서 세웠는데 석천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3) 이에 대해 시정을 건의하자 1980년「안내기」를 개정하였는데“1560년(명종 15) 김성원이 창건하여 임석천에게 증여했던 정자로(중략), 송강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星山別曲)도 이 식영정에 앉아 바라다 보이는 별뫼(星山)를 가사로 지었던 송강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4) 그 후 다시 개정된「안내기」에는“이 정자는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것이다.”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5) 2009년 9월 국가문화재로 승격(명승 제57호)한 후 안내문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여 다시 시정건의하자 다음과 같이 새롭게 바꾸게 됩니다.

 

「담양 식영정 일원」

식영정은 석천 임억령의 정자이다. 조선 명종 15년(1560) 서하당 김성원의 장인인 석천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 식영정 경내에는 서하당과 석천을 주향으로 모셨던 성산사(星山祠)가 있었는데 그간 없어진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석천은 이곳에서「식영정 20영」을 지었는데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제자들이 차운하였으며 이들 네 명을〈식영정 4선(四仙)〉이라 불렀다. 정철은 이곳 승경을 무대로 성산별곡을 비롯한 많은 시가를 지어 송강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위「안내기」변경은 임남형씨가 노력한 결과입니다. 선조의 업적이 정당히 진실되게 알려질 수 있도록 후손들이 노력해야 하는 당위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그 분의 노고가 지대하였음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그간 잘못 알려지게 된 주원인은 1868년 사우훼철령(祠宇毁撤令)으로 성산사(星山祠)가 철거되고 석천과 성산과의 연고가 희미해지던 차, 1888년 김성원의 문집『서하당유고』가 간행됨으로서 석천의 성산유적이 혼동을 일으키고 식영정 일대의 유적보존 주도권이 송강 정철 문중으로 넘어감에 따른 것입니다.(김성원은 호를 인재라 하였는데 또 다른 호를 서하당이라 하였음. 서하당은 석천선생의 담양집 당호인데 식영정과 더불어 김성원이 물려받음으로서 김성원이 호를 삼은 것으로 보임.)

 

p004.png 15.『석천집』에 수록된 석천시 편·수

 

규장각본

시 기

내 용

제1책

181

242

입사(1526중종21) 후 임치첨사(34세) 재직시까지

성수침·신잠·박우·최산두 등과의 수창시 기행시「승부록」등

제2책

186

555

중종37(1542) 이후

47세(1544)경 까지

영남행차(선위사)·강진우거시의 시

5·7고시(古詩)로 백련사 동백가·송대장군가·고기가(古器歌) 및 양응정 증답시(贈答詩) 등

제3책

215

404

명종8년(1553)

58세 전후

서울벼슬생활·관동 순려(강원감사)때,

여러승려와의 증답시, 백광훈과의 수창시(酬唱詩) 등

제4책

117

239

명종9년(1554)

59세 이후

제현(이황·성수침·박순) 수창시가 주류 송순과의 수창시·담양군수 재임시 고향 행록 등

제5책

208

421

명종14년(1559)

64세 이후

석천시문학의 총결산편, 김성원·

정철·박순·양응정·백광훈 등과 교유시 등.

성산가단(식영정 20영·서하당 8영)과 면앙정가단(면앙정 30영)의 영시(詠詩) 등

907

1,861

 

수(首)의 숫자는『석천집』의 목차를 놓고 산정한 것임. 전남대 정익섭 교수는 2,300여수(1989『금호문화』6월호)라고 발표

<목판본>습유

72

89

영암刊 제1∼7권에서 규장각본 누락분을 뽑음

단시가 많음. 촉루(燭淚)·부(賦)·청송당기 등

<보유록>습유

26

26

타인문집에서 찾아낸 것을 수습(필사본)

작자에 대한 재고(再考)를 요한 것도 있다 함

합 계

1,005

1,976

 

 

 

임억령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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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억령의 한시 연구」, 성신여대 석사논문, 1989

권혁진

「석천 임억령의 한시 연구」, 강원대 석사논문, 1995

김선기

「석천 임억령과 성산별곡」,『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 광주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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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 임억령과 성산동」,『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 광주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6

김신중

「임억령과〈소상팔경가〉에 대하여」 『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 광주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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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풍격(風格) 연구」, 고려대 석사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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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한시에 나타난 여성정감의 사적전개와 미적 특질」 고려대 박사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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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시가의 풍류고-석천과 송강을 중심으로」, 『고시가연구』제1집, 한국고시가문학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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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 임억령의 시문학 연구」, 성균관대 박사논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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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시의 작품세계」,『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 광주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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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 임억령의 환경과 생애」,『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 광주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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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식영정시단의 시세계연구」,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7

김종서

「16세기 호남시단과 당풍」,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4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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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당풍과 호남한시: 석천 임억령과 식영정시단』,월인, 2010

박은숙

『16세기 호남한시 연구』, 월인, 2004

임남형

『석천 임억령의 생애와 시문학』, 월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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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기호사림파 연구』, 일조각, 1987

이병휴

『조선전기 사림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일조각, 1999

정익섭

『호남가단연구』, 진명문화사, 1975

 

〈자료〉

임억령

『석천집』, 여강출판사, 1989

임억령

『석천시집』, 한국문집총간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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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억령(林億齡)의 글씨

명종 10년(1555) 성수침의 시에 차운(次韻)한 선생의 친필.

퇴계, 남명, 하서 등 명현 23인의 자서진적(自書眞蹟) 서첩 가운데 한 장

 

 

p004.png 1. 선생은 1496년(연산 2) 병진 2월 16일 태어나시고 1568년(선조 1) 무진 3월 9일 향년 73세로 서거하셨습니다. 자(字)를 대수(大樹) 호를 석천(石川)이라 하며 별호를 하의(荷衣)라 합니다. 「석천(石川)」은 선생이 나고 자란 해남의 구교리 해촌사(海村祠) 앞을 흐르는 개울의 이름입니다. 선생이 자란 곳이기에 호로 택하였고 별호「하의(荷衣)」는“연잎으로 절어 만든 옷”즉“세속을 초월한 훌륭한 은자(隱者)의 옷”을 뜻하는데 선생의 오묘한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p004.png 2. 선생은 7세에 숙부이신 우리(遇利)의 문하에 들어가 가학을 익혔으며 14세 때에는 동생 백령과 같이 광주 외가의 주선으로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 육봉(六峯) 박우(朴祐)(1476~1546) 형제를 찾아가 수학하였습니다. 박동량(朴東亮)(1569~1635)의『기재잡기(寄齋雜記)』가 전하는 일화를 보면“눌재는 석천에게 장자를 읽도록 하면서 말하기를‘너는 반드시 문장이 될것이다’라고 하고, 백령에게는 논어를 읽도록 하면서‘족히 관각지문(館閣之文)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라 하였다”고 합니다.(관각-홍문관과 예문관) 선생은 중종 11년(1516)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0년(1525) 30세에 식년시(式年試) 문과 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홍문관에서 근무하였고 임치(臨淄) 첨사(僉使), 동복현감, 사헌부지평(持平), 장령(掌令), 홍문관 교리(校理), 전한(典翰)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중종 39년(1544) 6월 홍문관 응교(應敎), 8월 승정원 동부승지(이때 퇴계이황이 선생의 후임으로 홍문관 응교가 됨), 9월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정3)이 되었는데 그 해 11월 15일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11.20)하였으나 이듬해 을사년(1545) 7월 1일 인종이 승하하자 명종이 즉위(7.6)하게 되었는데 12세의 어린나이라 그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이해 8월 인종과 명종의 외척간의 다툼 속에 소위「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고 정국은 격동기를 맞이합니다. 「을사사화」는 명종즉위년(1545) 8월 22일부터 8월 30일 사이에 일어난 사건인데 명종2년(1547) 9월에 일어난「양재역벽서사건(정미사화)」과 함께 영의정 유관(柳灌),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기타 많은 사림파(士林派) 인물들이 처형 또는 유배되어 사림들이 일대 수난을 겪은 사건입니다.(자세한 내막은 희재(충헌)공 임백령의 장에서 다룰 것입니다.)

 

p004.png 3.「을사사건」과 관련하여 유명문인이 쓴 문집이나『명종실록』의‘사신(史臣)이 논한다’(이하「사론(史論)」혹은「사왈(史曰)」,「사평(史評)」으로 쓰겠습니다. )를 보면 선생과 충헌공(임백령)을 대립시켜 형제간을 선과 악의 관계로 기술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을사사건」의 피화자(被禍者)인 사림(士林)들이 악의적으로 충헌공을 폄하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필자는 보는 것입니다.(자세한 논구는 충헌공의 장에서 밝히겠습니다.)그 대표적인 예가『명종실록』즉위년 11월 7일의「사론」입니다. 즉, 석천선생이 신병을 핑계로 금산 군수직의 사표를 제출하니 조리하고 올 것을 명하는 기사에서“(전략) 억령은 (백령을) 굳이 말렸지만 듣지 않자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백령이 한강에서 전송하였는데 억령이 이런 시를 지어주었다.

 

好在漢江水(호재한강수) 安流不起波(안류불기파)

임억령은 사람됨이 소탈하여 얽매인데가 없었으며 또 영화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았다.(후략)” 선생이 언제 금산군수직을 제수 받았는지 명확치 않으며 또한“억령이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백령이 한강에서 전송”할 때 즉 위의 전송시를 언제 지었다는 것인지도 불명합니다. 그리고「을사사건」은 8월에 일어났고, 금산군수직은 11월에 사직하는데「사론」중간에 나오는 억령이 백령을‘말렸다’는 기사는 또 언제를 말하는지 앞뒤의 시간관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 김헌태(金憲泰)선생이 편역한「조상의 위업과 유적을 찾아서(7)」의「석천선생」편을 보면‘을사사화가 일어날 줄을 짐작하고 서울을 떠나면서 지은 시’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정확한 것이 아닌듯합니다.

• 선생의 문집인『석천집』의「부록」에도 이 기사가 실려 있는데 그 출전(出典)을 잠곡(潛谷) 김육(金堉)(1580 선조 13~1658 효종 9)의『해동명신록』이라 하고 있습니다.

• 김잠곡의 글에는“임백령이 원종공신녹권을 보내오자 산속계곡으로 들어가서 제문을 지어 불살랐다”고 하는 또 다른 기사와 함께 위「사론」의 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석천선생이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는 근거는 명확하지가 않는 일입니다. 이「사론」과 잠곡의『해동명신록』기사는 그 뒤 계속 임억령과 임백령을 대비하는 일화로 인용되는데 이「사론」은 여느「사론」과 마찬가지로 관료개인을 폄하하는 즉 임백령 개인을 폄하하는 기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기사는 사실관계의 진정성 여부를 떠나 석천선생의 고결한 인품을 나타내는 일화의 예로는 합당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서 우리는 선생의 높은 도덕성과 훌륭한 인품의 면모를 가려 새길만한 일화입니다. 이러한 일화들은 우리 선림의 쇠잔(衰殘)을 막아 준 정신적 버팀목이기도 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제」로 되어있는 송별시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습니다.

 

好在漢江水(호재한강수)

잘있거라 한강수야

安流莫起波(안류막기파)

조용히 흘러 물결 일구지 말라

孤舟宜早泊(고주의조박)

외로운 배 일찍 대어 정박함이 마땅하리

風浪夜應多(풍랑야응다)

밤새 풍랑이 많을 것 같으니

 

p004.png 4. 선생이 실록의「사왈(史曰)」에서 처럼 충헌공과 대립관계가 아님을 나타내는 예가 있습니다. 이 뜻은 선생이 쓰신 동생 임구령공의「행장(行狀)」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월당(月堂) 임구령(林九齡)공은 1561년(명종 16) 4.29 남원도호부사를 배수하여 재직 중 1562년(명종 17) 11.26 병환으로 향년 62세에 서거하셨는데 1563년(명종 18) 3월「행장」을 쓰시었습니다. 이「행장」은 월당공의 인품과 생애, 벼슬, 공훈 등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특히「을사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사건에서 월당공이“사직의 위험을 구하였다”는 사연과 이로 인해 위사2등공신이 되고 국왕(명종)이 예조좌랑 정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행장」을 쓰신 시기가 월당공 사후 이듬해 봄인데 선생이「을사사건」을 보는 시각 즉 동생들이 관여케 된「을사사건」의 원인에 대한 시각의 일단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예입니다.

 

『명종실록』은 1568년(선조 1)~1571년(선조 4) 쓰여 졌는데 이때의 사관(史官)들의 시각과 석천선생의 시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으로 관료개인을 폄하하고 있는 실록의「사론」과는 다른 시각입니다.(임구령공에 대한「사론」도 마찬가지로 폄하기사로 되어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선생은 동생에 대한 정을 시로서 나타낸바 있는,「동생 인순을 북경에 보내면서」(別舍弟仁順赴京 별사제인순부경)라는 시에서 먼길의 여행을 염려하고 있고, 귀국 도중에 불귀의 객이 되매「죽은 동생을 애도』(悼亡弟 도망제) 하면서“꿈속에서도 의지하고 즐겁게 살 것”을 염원하였습니다. 실록의「사론」이나 문인들의 문집에서처럼 두 분을 선악관계의 대립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석천 선생의 인품의 측면에서 이러한 기사들을 새겨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p004.png 5. 선생은 금산군수직에서 물러난 후 창평(담양) 성산(星山)에 별서(別墅)를 짓고 고향 해남을 오가며 시를 지으면서 여러 고명인사들과 교유하며 지내다가 57세 때인 명종 7년(1552) 7월 18일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정3)로 제수되어 관직에 복귀하고(참고로 이때 윤원형은 우의정이었음) 동년 9월 12일 병조 참지(參知)(정3), 이듬해 명종 8년(1553) 10월 21일 강원도 관찰사(종2)를 배수합니다. 그 후 명종 9년(1554) 6월 13일 강원관찰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귀향하였다가 명종12년(1557) 3월 8일 담양부사직을 제수받고 명종14년(1559) 가을까지 재직하였으며, 담양부사직에서 물러난 9년 뒤 선조1년(1568) 3월 9일 향년 73세로 서거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유의할만한 대목이, 선생이 관직에 다시 나아간 때가 윤원형이나 문정왕후가 집권중인 시기였다는 사실입니다. 선생이「을사사건」과 동생 임백령에 대하여 세인(世人)들이 논한 것처럼 크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방증(傍證)일수도 있는 것입니다.(이는 퇴계 이황도 마찬가지입니다.)

 

p004.png 6. 이제 선생의 인품에 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후학들이 펴낸『석천집(石川集)』의 부록에 안동인 김수항(金壽恒)(영의정까지 역임한 숙종때 최고의 문신)이 1678년(숙종4) 영암정배시에 쓴 석천선생의「행적기략(行蹟紀略)」이 들어있는데 (『선산임씨족보』에「석천선생행장」으로 실려 있음) 여기에서 선생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선생은 기위고결(奇偉高潔)한 천품을 타고나시어 세속에 따라 영합하기를 싫어하니 자주 간인(奸人)들의 미움을 샀고 관직에 있었으나 항상 누락되어 불우하게 지내다가...(중략)...산속에 은거하여 경전을 탐구하다가 돌아가셨다. 문장은 광대하고 준일하며 더욱이 시에 뛰어나 붓을 잡으면 일필휘지로 써내니 당시의 사람들이 다투어 음송하였다. 일찍이 창평(昌平)(담양) 성산동(星山洞)의 수석(水石)이 좋음을 사랑하여 집을 짓고 살았는데 집은「서하당(棲霞堂)」이라 이름하고 정자는「식영정(息影亭)」이라 하여 기문(記文)과 여러 시가 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성산별곡」을 지어서 선생을 찬미한 것이 지금까지 불리어 오고 있다.”

 

※ 김수항의 정배지 - 문곡(文谷) 김수항(1629-1689)은 숙종 때 종실의 추문을 들어 그 처벌을 주장하다가 집권 남인파의 미움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었는데 그 적거지(謫居地)가 구림마을(지금의 군서면 서구림리)로「회사정」앞 뜰에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p004.png 7. 석천(石川) 선생의 인품에 대하여 정익섭(丁益燮)(전남대 교수)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석천집을 읽고」- 1989. 6『금호문화(錦湖文化)』

1) 시재(詩才)의 인물

조선 최다작(총3,100여수)의 시백(詩伯)이며, 호남의 사종(詞宗)이었고, 시의 내용 또한 호탕장쾌(豪宕壯快)하였으므로 1560년(명종15) 중국사신이 래조(來朝)하였을 때 이에 겨룰만한 시재(詩才)는 송순(宋純), 이황(李滉)과 함께 석천(石川)밖에 없었다고 하였고(명종실록),

2) 청정고고(淸淨孤高)한 인물

세상 명리와 부귀재화에 초연하여 일생을 청빈하고 고고하게 살았으며 퇴계(退溪-이황)가 석천에게 준 차운시(次韻詩)에“마음은 선(善)을 좋아하니 난초같이 향기롭고 기개는 간흉을 미워하니 태산같이 높다.”고 그의 고매한 인품을 찬양하였으며,

3) 지기(志氣)의 인물

초지일관 의지와 기개가 있고 세상 영달이나 명리에 영합하지 않고 불의와 부정에 감연히 맞섰으니, 대사간(大司諫)때에는 왕에게 상소하여 언관(言官)의 역할을 당당히 주장하였고 1545년 을사(乙巳)사건 때에는 이에 편들지 않고 홀연히 하향하였고,

4) 풍류(風流)의 인물

일생을 시(詩)와 더불어 자연을 사랑하였고 쇄락고아(灑落高雅)한 품성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으니, 백옥봉(白玉峯)은“이 시대의 적선(謫仙)”이라 칭송하였고, 만년에는 식영정(息影亭)에서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를 벗하면서 탈속 고매한 신선생활을 만끽하셨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p004.png 8. 석천(石川)선생은 우리나라 역사, 문화의 결정판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다음과 같이 8개소에 그 이름이 기술되고 있습니다.

• 임억령(林億齡) - 인물소개 (18권 752쪽)

• 석천집(石川集) - 문집의 소개 (12권 152쪽)

• 해촌사(海村祠) -「해남군 편」에 나오는 사우(祠宇)의 배향인물로 소개 (24권 480쪽)

• 식영정(息影亭) - 관련인물로 소개 (13권 633쪽)

• 도원서원(道源書院) -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에 있는 서원인데 배향인물로 소개 (6권 899쪽)

• 한시(漢詩) - 조선 한시사에서의 임억령의 위상 소개(24권 251쪽)

• 근체시(近体詩) - 조선 근체시사에서의 임억령의 위상 소개(4권 128쪽)

• 시우인(示友人) - 석천시(石川詩)의 백미(白眉)임을 소개(13권 535쪽)

 

p004.png 9. 석천(石川)선생은 「호남의 사종(詞宗)」이라고 일컬어지며 우리나라 한시, 근체시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즉,

1) 석천이 일생 73년 동안 읊은 시는 총 2,700여수에 이른다고 하니 우선 시의 양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습니다.

• 『석천집(石川集)』(규장각본-영인본)에 수록된 것이 2,300여수이며(후술자료“『석천집』에 수록된 석천시 편, 수”참조), 석천 사후 제주목(濟州牧)에서 간행한 또 다른『석천집』(고려대 만송문고소장인)에도 1,200수가 있어서 이중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도합 2,700여수가 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조선시대 문인 가운데 가장 많은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임남형저『석천임억령의 생애와 시문학』-월인출판사 간 참조)

2) 석천시(石川詩)의 시격(詩格)을 보면,

▷ 칠언시(七言詩)보다 오언시(五言詩)가 압도적으로 많고 율시(律詩)보다 절구(絶句)가 훨씬 많으며, 기법은 사실적(寫實的)인 것보다 낭만적인 것이 더 많다고 합니다. (정익섭 전남대교수-1989. 6월『금호문화』참조)

▷ 그래서 윤광계(尹光啓)는『석천집』서문에 그 시격이“분방하고 웅장하여 장강대하처럼 주야로 도도히 흘러도 다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 율곡 이이(李珥)는 석천시를 읽고 감격하여 보낸 차운(次韻)시에서“평생 무릎을 꿇지 않았는데 오늘에야 공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生平不屈膝 今日爲公屈생평불굴슬 금일위공굴)”(『율곡전서』권1 )고 하였습니다.

▷ 고경명(高敬命)은“석천선생의 시는 곤륜산의 옥보다 더 아름답고, 뛰어난 재주는 이태백과 다름없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 스승인 눌재(訥齋)(박상-朴祥)가 석천에게 화답하는 차운시에서“혹 시가 제대로 되지 않은 데가 있으면 서슴치 말고 고치시오”라고 제자의 시재(詩才)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 권철(權轍)(3정승 지냄)은 석천의「권철상국과만귀경(權轍相國瓜滿歸京)…」으로 시작되는 (『석천집』4책 217쪽) 17운의 시 1편을 받고 감격하여 시지(詩紙)에 기름을 먹여 소중히 간직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한시”및“근체시”조에서는“호남시단의 선구자이며 수준높은 당법(唐法)으로서 당시의 시단(詩壇)을 다채롭게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석천시에 대하여 퇴계 이황(李滉)은 규구(規矩) 법도(法度)를 강구하고 음률을 맞추어야 할 것이라고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후술 참조) 선생이 말년에 담양 식영정(息影亭)에 은거하면서 식영정 4선(四仙) 즉, 석천, 김성원(金成遠), 고경명(高敬命), 정철(鄭澈)을 비롯한 제자들, 수많은 시인 묵객들과 교유하면서 성산(星山-담양식영정이 있는 곳) 가단(歌壇)을 주도, 계산풍류(溪山風流)를 이루는 과정에 대하여는『석천집』(1989. 2. 27 여강출판사 간) 권두의「석천집해제」(임형택 교수),「석천선생의 생애와 사상」(임용주 교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3) 한편 3천수가 된다는 석천시의 주제별 분류 연구는 아직 이루어져 있지 않으나, 대략

-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시(抒情詩)

- 전설 따위를 서사적으로 읊은 서사시(敍事詩)

- 무위(無爲), 무심(無心), 무아(無我)의 자연회귀에 몰입하는 사상시(思想詩)

- 제현들과의 수창시(酬唱詩)등이 있으며, 또한 여유시(旅遊詩), 누정시(樓 亭詩)도 많습니다. 즉,『석천집』을 보면

〈제1책〉승부록(乘桴錄) - 임치(臨淄) 첨사(僉使)때 서남 여러 섬의 말(馬)을 점검하면서 쓴 기행시

〈제2책〉강진 우거(寓居)시 남방 여러 곳을 순회했을 때의 시

〈제3책〉강원도 관찰사 때 관동지방의 아름다운 자연을 순력하며 지은 시

〈제4책〉행록(行錄) - 담양에서 고향(해남)을 오가며 지은 시

 

그 외 선위사(宣慰使)로 영남을 순방하였을 때의 시, 지리산, 해인사 탐방시 등이 있습니다. 유명한 누정(樓亭)을 들러 머물면서 감회를 읊은 시는 식영정 20영(詠), 서하당(棲霞堂) 8영, 요월당(邀月堂), 쌍취정(雙醉亭)의 제영(題詠)이외에도 전국 각처의 누정시가 수많이 있습니다.(『을해보』1권 276~278쪽에 몇 편 소개) 이와 같이 시의 소재도 자연, 인사(人事)는 말할 것도 없고 누정, 독서, 화초, 음주, 탄금(彈琴), 법고(法鼓)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기 그지없습니다.

 

4) 선생의 시중에서 백미라고 하는 시「시우인(示友人)(자방 子芳)」 (『석천집』제3책 177쪽 참조)은 산사에서 봄을 보내며 그 감회를 적어 벗에게 보인(示-보일 시. 보게 함, 알림) 칠언 절구의 시로 허균(許筠)(선조, 광해조)이 편찬한『국조시산(國朝詩刪)』, 남용익(南龍翼)(숙종조) 편찬의『기아(箕雅)』등의 고전에도 채록되어“자연과 몰아일체의 경지를 초절한 낭만의 세계를 담고 있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또한 임기중(林基中) 교수(동국대)의『고교국어교과서』에도 인용되어“자연과 인간에 깃든 정(情)”의 소재로 한다고 하며, 대한민국 서예대전(1998)에서 대상을 받은 김효순(金孝淳)이 그 소재로 삼았음을 볼 때 4백 년 전의 선생의 시정(詩情)이 현재에도 그대로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선생의 시를 소개합니다.

 

示友人(子芳)/시우인(자방)

벗에게

古寺門前又送春(고사문전우송춘)

옛 절문 앞엔 봄이 떠나고

殘花隨雨點衣頻(잔화수우점의빈)

비에 젖은 꽃잎이 옷을 점찍네

歸來滿袖淸香在(귀래만수청향재)

향 내음 소매 속에 가득 차 있어

無數山蜂遠趁人(무수산봉원진인)

수많은 산벌이 먼데까지 따라 오네

 

p004.png 10. 석천선생(1496년 연산2~1568 선조1)의 사제(師弟)와 교우(交友)

▷ 스승

눌재(訥齋) 박상(朴祥)(22 연상)(1474 성종 5~1530 중종 25)

육봉(六峯) 박우(朴祐)(20 연상)(1476 성종 7~1546 명종 1)

▷ 제자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37 연하)(1533 중종 28~1592 선조 25)

송강(松江) 정철(鄭澈)(40 연하)(1536 중종 31~1593 선조 26)

인재(忍齋) 김성원(金成遠)(29 연하)(1525 중종 20~1597 선조 30)

- 석천과 이 세분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함.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23 연하)(1519 중종 14~1581 선조 14)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41 연하)(1537 중종 32~1582 선조 15)

백호(白湖) 임제(林悌)(53 연하)(1549 명종 4~1587 선조 20)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43 연하)(1539 중종 34~1583 선조 16)

- 이상은「성산가단(星山歌壇)」을 형성하였던 인물들.

▷ 교우(交友)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8 연상)(1488 성종 19~ ? )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5 연상)(1491 성종 22~1570 선조 3)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3 연상)(1493 성종 24~1564 명종 19)

면앙(俛仰) 송순(宋純)(3 연상)(1493 성종 24~1582 선조 15)

퇴계(退溪) 이황(李滉)(5 연하)(1501 연산 7~1570 선조 33)

남명(南冥) 조식(曺植)(5 연하)(1501 연산 7~1572 선조 5)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7 연하)(1503 연산 9~ ?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4 연하)(1510 중종 5~1560 명종15)

소제(蘇齊) 노수신(盧守愼)(19 연하)(1515 중종 10~ ? )

사암(思菴) 박순(朴淳)(27 연하)(1523 중종 18~1589 선조 22)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31 연하)(1527 중종 22~1572 선조 5)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38 연하)(1534 중종 29~1599 선조 32)

율곡(栗谷) 이이(李珥)(40 연하)(1536 중종 31~1584 선조 17)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43 연하)(1539 중종 34~1609 광해 1)

 

p004.png 11. 특히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일컫는 퇴계 이황과의 교우 관계를 보면,

1) 석천(1496 연산 2년생)은 퇴계(1501 연산 7년생)의 5년 연상이고 홍문관 응교(應敎)의 동일자 선후임 관계로서 각별한 사이로 생각됩니다.

2) 『석천집』에서의 퇴계에 대한 증시(贈詩)는 2편 7수인데 비하여『퇴계시대전(詩大全)』의 차운(次韻) 또는 동부시(同賦詩)등 석천을 거명한 시가 10편 20수에 이릅니다.

3) 그중에는

• 석천이 선위사(宣慰使)로 영남지방에 갔을 때 퇴계를 방문하여 유산수창(遊山酬唱)한 것이 있고

• 퇴계의「칠계10영(漆溪十詠)」(『퇴계시대전』489쪽 참조 )을 보면 퇴계가 광주를 방문한 것 같으며(칠계(천)는 광산 극낙천을 말함)

• 퇴계의「분어(盆魚)」시를 보면 석천의 방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등 두 분이 서로 자주 방문하여 수창(酬唱)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4) 두 분이 서로 주고받은 시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다(多)」자(字) 운(韻) 인데(구절의 끝 글자가「多」로 되어 있음), 석천이「증경호퇴계(贈景浩退溪)」의 제목으로 보낸 7수에 대하여, 퇴계가「次韻答林大樹(차운답임대수)」등 6수로 답하고 있는 시들입니다.

5) 그러나 두 분은 시작법(詩作法)이나 시격(詩格)에 있어서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명종 8년(1553) 10월 석천이 강원도관찰사의 임명을 받고 퇴계를 방문한 자리에서 서로의 시론(詩論)을 토론하고 있는데, 퇴계의「희임대수견방논시(喜林大樹見訪論詩)」(『退溪詩大全(퇴계시대전)』509쪽 참조)를 보면,

• 석천은“나의 시는 호탕함만 숭상하지 어찌 교묘하게 다듬으리오?”하니까

• 퇴계는“규구법도(規矩法度)를 강구해야하며 다시 허심탄회하게 다듬어서 자구를 저울질하여 음률에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왕소王甦저『퇴계시학』15쪽 참조)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시인과 근언신행(謹言愼行)한 도학자의 사이에는 그 인격의 차이만큼 그 시격에도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석천선생은 강원감사 부임 후 순력산수(巡歷山水)와 시작(詩作)에 몰두하다가 부하관원의 탄핵상소(불무직사不務職事라 하여)를 받고 파직이 되기까지 한 일화는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p004.png 12. 석천선생의「시문학 및 그의 사상」에 대한 조명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 『석천시집』의 출간

1989. 8월「민족문화추진회」가 주관하여 선조들의 문집을 가려모아 200책으로 정리 출간한『한국문집총간』의 제27책에「퇴계일고(退溪逸稿)」와 함께 간행됨

2) 『석천선생문집』의 발간

1997. 7월「한국문집편찬위원회」가 편집하여 경인문화사에 의해「한국역대문집총서 2203」으로 영인본이 발간됨

3) 「석천사상 학술대회」

「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이라는 주제로 1995. 6. 3 광주시가 주최한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 석천의 시대와 생애(홍우흠-영남대 교수)

• 조선중기 호남의 사림(士林)과 석천(이해준-공주대 교수)

• 석천의 기행시(紀行詩)에 대하여(김선기-충남대 교수)

• 16세기 호남의 시단과 석천(박준규-전남대 교수)

• 석천시문학의 특징(사상지향과 문학작품의 특징)(권두환- 서울대 교수)

• 석천시의 작품세계(작품세계의 다양성 추구)(최한선-동신대 교수)

• 종합토론-최승범 교수(전북대)의 사회로 여러 교수들 참여

4) 『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출간

1996. 2. 29 광주광역시와 향토문화개발협의회가 공동으로『향토문화·조선명현연구 제 6집』으로 출간

5) 『한국인의 가훈(家訓)』에 수록

손인수(孫仁銖) 교수가 저자로 문음사(文音社)에서 간행

• 첫째-마음가짐을 강직하게 하라(심강직心剛直)

• 둘째-학문에는 법이 있다(학식유방처學識有方處-『유분록 幽憤錄』)

• 셋째-소나무는 고상하여 벼슬을 받지 않는다.(송고불수봉松高不受封- 『왕조실록』)

6) 그밖에도

• 「석천시비(詩碑)」의 건립

• 「광주가사문학관(歌辭文學館)」의 건립

• 「식영정(息影亭)」을 광주관광코스에 포함시켜 편성

7) 「조선의 가사(歌辭)」특히 한시(漢詩)를 논할 때는 석천시(石川詩)가 관련 논문이나 단행본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며, 석·박사 학위논문의 주제로도 채택되고 있다고 합니다.(이 글 말미에 첨부한「임억령 참고문헌」참조)

8) 석천 선생의 재조명 사업과 관련하여서는 후손인 임남형(林南炯)씨 및 임영주(林榮柱)씨의 역할이 컸으며, 특히『석천집』(1989. 2. 27 여강출판사 간)의 출간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9) 임남형씨는 그간의 연구논문을 모아『석천 임억령의 생애와 시문학』이라는 저서를 2011. 12. 20 도서출판 월인(月印)을 통하여 발간한 바 있습니다.

 

p004.png 13. 끝으로, 선생의 인품과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시 두 수를 소개합니다.

•「술」에 대한 시

老去方知此味甘(노거방지차미감)

늙어가니 바야흐로 술맛을 알겠구나

一杯通道不須三(일배통도불수삼)

석잔을 기다릴 것 없이 한잔이면 도가 통한다

君看稽阮陶劉李(군간계완도유리)

그대는 혜강, 완적(阮籍), 도연명, 유령(劉伶), 이백을 보라

不義公侯伯子男(불의공후백자남)

그들은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을 부러워하지 않았다네

 

• 鳥嶺(조령)

功名眞墮甑(공명진타증)

공명은 떨어뜨린 시루와 같고

聚散一浮雲(취산일부운)

사람이 모이고 흩어짐은 뜬 구름이라

獨向空山裏(독향공산리)

나홀로 빈산 깊숙히 돌아가노니

蒼蒼落日曛(창창낙일훈)

맑은 하늘 지는 해에 땅거미 짓는다

 

p004.png 14.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書院)이나 사묘(祠廟)

선생은「호남의 사종(詞宗)」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림(士林)의 사표(師表)로서도 우뚝하신 분이라 선생을 기리는 서원(書院)이나 사묘(祠廟)가 있습니다.

▷ 도원서원(道源書院)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있는 서원.

1670년(현종 11) 최산두(崔山斗)(중종 때의 문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된 서원. 1687년(숙종 13) 사액(賜額)되었으며 임억령(林億齡), 정구(鄭逑), 안방준(安邦俊)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임억령은 중종 28년 1533 동복현감을 지냄)

▷ 해촌사(海村祠)

전남 해남읍 구교리에 있습니다.

당초 1652년(효종 3)「석천사」를 세우고 선생을 독향하였으나 1689년(숙종 15) 최보(崔溥) 유희춘(柳希春)을, 1721년(경종 1) 윤구(尹衢), 윤선도(尹善道)를 추향하여「오현사」라 하였음.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1901년 다시 설단하였으며 1922년 선생의 생질 박백응(朴伯凝)이 추향되어 일명「육현사」라 함.

▷ 성산사(星山祠)

전남 담양군 창평 지곡리 성산(星山)에 있습니다.

1795년(정조 19) 세워짐. 임억령을 주벽(主壁)으로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 조흡, 김창흡(金昌翕)을 배향. 2년 후 정민하(鄭敏河), 정근(鄭根)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홍수로 훼손되어 강 건너 석저촌(石底村)으로 옮기고 환벽사(還碧祠)라 하였으나 1868년(고종 5) 사우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근년에 담양군에서 성산사로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 식영정(息影亭)에 대하여

식영정은 담양군 남면 지곡리 별뫼(星山 성산)자락 끄트머리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로서 그 뜻이‘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낭만적 이름의 정자입니다. 「식영(息影)」이라는 이름은『장자』「잡편」「어부(漁夫)」의 장에 나오는 글귀에서 따온 것입니다. 고기잡이(어부)가 다음과 같이 공자에게 충고하는 내용의 글에 나옵니다.

 

pp004.jpg

 

어부가 공자에게 말하기를,“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影영)가 두렵고 자기 발자국(迹적)이 싫어서 이것들을 떠나 달아나려 하였는데 발을 더욱 자주 놀릴수록 발자국은 더욱 많아졌고 빨리 뛰면 뛸수록 그림자는 자기 몸을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그는 빨리 뛰다가 결국 힘이 떨어져 죽어버렸다 합니다. 그는 그늘 속에 쉬면 그림자가 없어지고(處陰以休影처음이휴영) 고요한데 머물면 발자국이나지 않는다(處靜以息迹 처정이식적)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어리석음도 지나치다 하겠습니다.”

 

공자는 여러가지 곤경을 겪었던 이유를 지적하고 자기 몸을 닦고 진실함을 지키고 밖의 일이나 물건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하고 좀 쉬면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봐라 하는 충고입니다. 고품격 여행기로 스테디베스트셀러인 유홍준 교수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제1권에 남도 답사 일번지 강진, 해남과 함께「담양의 정자와 원림」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개관을 엿볼 수 있는 소개 글을 보면“광주직할시의 동북방향 무등산 북쪽기슭과 맞대고 있는 고서면과 봉산면 일대에는 참으로 많은 누각과 정자 그리고 원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면앙정(俛仰亭), 송강정(松江亭), 취가정(醉歌亭), 식영정(息影亭), 거기에 송강 정철의 별서(別墅)까지 둘러보는 답사코스는 조선시대 조원(造園)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황금코스이며 이른바 조선시대 호남가단(歌壇)이라 불리는「가사(歌辭)문학」의 본고장이니 국문학도들에게는 필수의 답사코스가 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우리의 선조 석천 선생이 머물며 시가를 쓰고 인근 정자의 주인들과 또는 원지의 내방인사들과 교유하신 본거지입니다.

 

선생이 어머니(음성박씨)의 뜻에 따라 동생 임백령과 함께 눌재 박상의 문하가 되어 배울 때 김윤제(金允悌)라는 분과도 동문수학하였는데 이분이 환벽당의 주인이고 정철의 처조부가 되며 정철이 담양에 머물도록 주선하였다 합니다.정철은 큰 누이가 인종의 귀인이며 둘째 누이가 계림군(유瑠)의 부인이었는데 을사사화 때에 계림군이 관련되어 아버지가 여러 곳으로 유배되었다가 1551년 풀려나자 그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담양의 창평으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석천에게서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 김성원에게서 학문을 배웁니다.

 

정철은 1561년(명종16) 26세에 진사시에 수석합격하고 다음해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습니다. 정철은 석천이 담양부사를 사임하고 성산(星山)에 올 때인 1559년 가을 이후 1560년 석천의 문하생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김윤제의 부인이 양씨부인인데(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동생) 이 양씨 부인에게 친척동생이 있었는데 이 분이 석천의 담양집 부인이 됩니다. 석천의 양씨부인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첫째사위가 고맹영(高孟英)이고, 둘째 사위가 김윤제의 당질(堂姪)인 김성원(金成遠)입니다.(족보에는 金聲遠으로 나옴) 임남형씨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석천은 1545년 이전에 담양에 서하당을 짓고 가솔들을 살렸다고 하며 15년 후 1559년 가을 담양부사를 그만둔 후 이곳에 정착 하였을때 김성원이 처음 찾아와 제자가 되었으며 뒤에 사위로 삼게 됩니다.식영정은 당초 서하당 옆의 부속건물로 1560년경 지은 정자인데 선생이 1568년 해남본가에서 별세하게 되니 사위 김성원이 물려받아 관리운영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력의「식영정」에 대하여

1)『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송강정, 환벽당과 더불어 송강유적으로 불린다. 원래 김성원이 1560년 임억령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2) 1972년 전라남도 지방 기념물로 지정되고 난후 그「안내기」를「정송강유적보존위원회」에서 세웠는데 석천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3) 이에 대해 시정을 건의하자 1980년「안내기」를 개정하였는데“1560년(명종 15) 김성원이 창건하여 임석천에게 증여했던 정자로(중략), 송강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星山別曲)도 이 식영정에 앉아 바라다 보이는 별뫼(星山)를 가사로 지었던 송강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4) 그 후 다시 개정된「안내기」에는“이 정자는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것이다.”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5) 2009년 9월 국가문화재로 승격(명승 제57호)한 후 안내문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여 다시 시정건의하자 다음과 같이 새롭게 바꾸게 됩니다.

 

「담양 식영정 일원」

식영정은 석천 임억령의 정자이다. 조선 명종 15년(1560) 서하당 김성원의 장인인 석천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 식영정 경내에는 서하당과 석천을 주향으로 모셨던 성산사(星山祠)가 있었는데 그간 없어진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석천은 이곳에서「식영정 20영」을 지었는데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제자들이 차운하였으며 이들 네 명을〈식영정 4선(四仙)〉이라 불렀다. 정철은 이곳 승경을 무대로 성산별곡을 비롯한 많은 시가를 지어 송강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위「안내기」변경은 임남형씨가 노력한 결과입니다. 선조의 업적이 정당히 진실되게 알려질 수 있도록 후손들이 노력해야 하는 당위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그 분의 노고가 지대하였음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그간 잘못 알려지게 된 주원인은 1868년 사우훼철령(祠宇毁撤令)으로 성산사(星山祠)가 철거되고 석천과 성산과의 연고가 희미해지던 차, 1888년 김성원의 문집『서하당유고』가 간행됨으로서 석천의 성산유적이 혼동을 일으키고 식영정 일대의 유적보존 주도권이 송강 정철 문중으로 넘어감에 따른 것입니다.(김성원은 호를 인재라 하였는데 또 다른 호를 서하당이라 하였음. 서하당은 석천선생의 담양집 당호인데 식영정과 더불어 김성원이 물려받음으로서 김성원이 호를 삼은 것으로 보임.)

 

p004.png 15.『석천집』에 수록된 석천시 편·수

 

규장각본

시 기

내 용

제1책

181

242

입사(1526중종21) 후 임치첨사(34세) 재직시까지

성수침·신잠·박우·최산두 등과의 수창시 기행시「승부록」등

제2책

186

555

중종37(1542) 이후

47세(1544)경 까지

영남행차(선위사)·강진우거시의 시

5·7고시(古詩)로 백련사 동백가·송대장군가·고기가(古器歌) 및 양응정 증답시(贈答詩) 등

제3책

215

404

명종8년(1553)

58세 전후

서울벼슬생활·관동 순려(강원감사)때,

여러승려와의 증답시, 백광훈과의 수창시(酬唱詩) 등

제4책

117

239

명종9년(1554)

59세 이후

제현(이황·성수침·박순) 수창시가 주류 송순과의 수창시·담양군수 재임시 고향 행록 등

제5책

208

421

명종14년(1559)

64세 이후

석천시문학의 총결산편, 김성원·

정철·박순·양응정·백광훈 등과 교유시 등.

성산가단(식영정 20영·서하당 8영)과 면앙정가단(면앙정 30영)의 영시(詠詩) 등

907

1,861

 

수(首)의 숫자는『석천집』의 목차를 놓고 산정한 것임. 전남대 정익섭 교수는 2,300여수(1989『금호문화』6월호)라고 발표

<목판본>습유

72

89

영암刊 제1∼7권에서 규장각본 누락분을 뽑음

단시가 많음. 촉루(燭淚)·부(賦)·청송당기 등

<보유록>습유

26

26

타인문집에서 찾아낸 것을 수습(필사본)

작자에 대한 재고(再考)를 요한 것도 있다 함

합 계

1,005

1,976

 

 

 

임억령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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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 임억령의 한시 연구」, 강원대 석사논문, 1995

김선기

「석천 임억령과 성산별곡」,『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 광주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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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 임억령과 성산동」,『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 광주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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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억령과〈소상팔경가〉에 대하여」 『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 광주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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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풍격(風格) 연구」, 고려대 석사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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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시의 작품세계」,『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 광주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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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 임억령의 환경과 생애」,『석천 임억령의 문학과 사상』 광주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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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식영정시단의 시세계연구」,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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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호남시단과 당풍」,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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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호남한시 연구』, 월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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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사림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일조각,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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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가단연구』, 진명문화사, 1975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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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집』, 여강출판사, 1989

임억령

『석천시집』, 한국문집총간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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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억령(林億齡)의 글씨

명종 10년(1555) 성수침의 시에 차운(次韻)한 선생의 친필.

퇴계, 남명, 하서 등 명현 23인의 자서진적(自書眞蹟) 서첩 가운데 한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