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재(希齋) 임백령공(林白齡)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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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사건 기간의 임백령 발론 ≫
<8월 22일>
임백령 왈“…내간(內間)의 일을 알 수는 없으나 윤임(尹任)은 왕대비(王大妃)(인종비)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니, 일이 왕대비와 관계된 것이라면 발론되지 말도록 하심이 어떻습니까?
<8월 24일>
「비망기(백인걸, 대간들의 파직)」가 내려오자 좌우가 묵묵히 한참 있는데 임백령이“간관(諫官)을 죄주는 것은 어떠한가?”하니 이언적(李彦迪)·권발(權撥)·신광한(申光漢)등도 계속해서 구원하는 말을 하였고, 이어 윤인경(尹仁鏡)등과 함께“너그럽게 용납하시길…”하고 진언(進言).
<8월 25일>
윤인경 이언적 임백령 등 9인이 써서 여쭈기를(서계왈 書啓曰) “…유관의 죄가 가볍지는 않지만 외방(外方)에 유배하는 것은 과중하니 너그럽게 계량하소서”라고 하고 있음.
<8월 26일>
임백령 왈(曰)
“…속히 조치하면 화가 오히려 작을 것이지만 늦게 발로되면 의구심이 쌓여서 화가 말할 수 없이 크게 될 것이며”
“…뜻밖에도 백인걸의 어리석은 말 때문에 다시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했다는 명목이 하나 더 늘어났으니… 3인의 죄는 유배면 충분한데 하필이면 이것으로 사연을 삼을 것인가?”
“…유배하거나 파출하는 것은 달게 여길 바이지만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데는 드러난 자취가 없으니 죄목 중에 이 일언(一言)은 삭제하여 인심을 편안케 하소서.”
“…유관을 도로 소환하여 대신을 우대하는 법도를 보이고 대간을 파직하지 말고 제왕의 언로를 넓히는 의리를 다하소서”
“…처음에 발의한 것은 화가 작은데서 그치게 하고자 함이었고, 지금 아뢴 것은 형벌이 과중할까 두려워서입니다.”
“…성명(聖明)한 시대에 형벌이 지나치지 않아서 인심이 화평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8월 28일>
(정순붕의 상소가 나온 후) 허자(許磁)왈(曰)
“…임금님이 근심하시는데 또 어찌하여 윤임이 가히 책략을 부리는가. 이 사람을 제거하면 위에서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임백령이 왔기에…신(臣)이 말하기를 윤임은 유배하고 유관은 체직, 유인숙은 파직시킨 것이 가하다 하였습니다. 이때에는 다만 위에서 상심하신다고만 들었지 이렇게까지 된 줄은 몰랐습니다. …뒤에 모위(謀危)했다는 하교(下敎)가 나오기까지는 신과 임백령 또한 알지 못했는데…” 임백령 왈(曰)
“…정순붕의 소(疏)중「함께 논의한 재상이 구원해주고 비방을 멀리하려고 한다.」고 한 것은 신을 가리키는 것이라 매우 황공합니다. …신은 윤인경에게「3인의 죄는 이미 드러났으나 조정에 풍파가 있으면 사림(士林)이 화를 입을 것이요 새 정사에 온당치 못한 것이니 단지 3인의 죄만 정하여 국가를 안정시킴이 가하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종사를 위태롭게 하려고 했다.」는하교를 받고 실로 놀랐습니다. …신은 실로 황공합니다.”
(3) 이상이「을사사건 9일간」의 선생의 발론과 행적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 여기서, 선생이“엄벌로 엄히 다스리자”고 주장한 발론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사연」의 문구를 죄목에서 빼자고 하였겠습니까? 왜 정순붕의 소에서「구원해 주고 비방을 멀리하려고 한다」는 지적을 받았겠습니까?
• 선생은, 오히려 3인을 유배정도로 처리하여 나라를 빨리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그래야 사림의 화가 적게 된다고 생각하였음)
• 왕대비(인종비)에 누가 되는 발론은 하지 말라고 옹호하였고
• 대간들의 죄를 물어 언로를 막아서는 안된다는 상계(上啓)를 유도하였으며
• 연로한 유관을 외방에 유배까지 하는 것은 과중하니 선처해달라는 서계(書啓)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순붕의 소에서「구원해 주고 비방을 멀리하려한다」는 지적까지 받고 있는 것입니다.
• 또한 정순붕의 소에「처음에 함께 논의한 재상…」에서 선생이 처음 함께 논의할 때에는「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연」의 내용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이는 위 <8월 28일>의 허자나 임백령의 발론에서 확인됩니다.)
• 만약 임백령이 이 내용을 알고도 <8월 26일>어전에서「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문구를 죄목에서 빼자고 감히 발론할 수 있었겠습니까?
• 그러나 정순붕의 상소가 발표됨으로써 사태가 일변되었음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 이후 선생은 물론 윤인경·홍언필·이언적 등 고위 신료까지 아무도 반론하지 못하고 왕(문정대비)의 결정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선생은 온건하고 신속한 처리로서 나라를 빨리 안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들과 사림을 구원하고 비방을 멀리하는 처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② <명종 3년 2월 12일> 사평(史評)에서도“임백령은 자신의 영구(營救)한 것을 해명하였으니 오히려 옳은 선비라 할 수 있으나, 그의 말은 역시 자신을 구제하는 것 같았다.”고 쓴 것을 보면 당시 선생의 영구(營救) 행적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③ 후일 <명종16년 5월 11일> 윤원형이 경연에서 상계하길,“…당초 신이 윤임 등의 역모에 대해서 임백령에게 말했더니 믿지 않았습니다. …백령이 하는 말이‘윤임은 하루아침에 권세를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불안해하고 있다. …형적(形迹)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사람은 제거하는 것은 가하나 역모로 죄를 정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중학(中學)에 모여 회의하였으나 한결같지 않았으므로 그만 두었다가 재상들이 입계(入啓)하여 단지 찬출(귀양)시키는데서 그쳤는데…정순붕의 상소가 있게 되어 그 모역의 정상이 모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고 하고 있으니, 곧 선생이「역모를 다스리는 것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그 논의조차 성립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4) 이어서 선생의 을사사건 <전>과 <후>의 행적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음은 선생의 을사사건 전후의 행적 개요입니다.(상세한 것은 별첨「을사사건 전후의 임백령 행적」 참조)
① 사건 <전>은 명종즉위년 7월 1일~8월 21일 사이로, 이때 선생은 호 조판서, 약방제조(藥房提調)로서 일상 정무이외의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② 사건 진행 중은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으며
③ 사건 <후>는 명종 즉위년 9월 1일~왕 1년 7월 17일 서거 때까지로서 단계(單啓)·합계(合啓)를 막론하고 정무처리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 선생 이 을사사건을 직접 거론한 기록은 없습니다.
④ 다만 왕 즉위년 9월 중의 사왈(史曰)(史評)부분에서 선생에 대한 비판 기록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평은,
• 후술하는 바와 같이 후대 실록 편찬시(25년 후의 선조 초기)의 사관들의 사감(私感)이 개입된 기술이며
• 서(書) 계(啓) 공사(供辭)등의 6하 원칙에 입각한 직접적인 자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정(市井)의 유언(流言)·전언(傳言)에 의지하고 있는 것 같으며 ※ 공사(供辭) - 죄인이 범죄사실을 진술하는 말
• 본체(本体)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말초적, 피상적인 사실만 말하고 있음을 다음에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5) 소위「사왈(史曰)」즉「사평(史評)」을 검토하여 보고자 합니다.
① <명종 즉위년 9월 11일>「사왈」에,“백령은 좋게 말을 꾸며 사림에게 화가 끼칠까 염려하는 척 하였지만, 속으로는 해치려는 뜻이 있었으며…”라고 평하고 있는데, 소위「사관(史官)」이 어떻게「속으로 해치려는 뜻」을 헤아렸다는 것일까요? 위에서 본「을사사건 9일간」의 기록이나 그 후 진행과정에서 해치겠다는 흔적이 어디에 있다는 말일까요? 이것은 참으로 자의적(恣意的)인억지요 일방적인 평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만일 선생께서 실제로 그러한 행적이 있었다면 서슬이 퍼런 사관들이 사실그대로 썼을 터인데 어찌하여「속으로는 운운…」하는 표현을 쓴단 말입니까? 남을 해친 언행이 일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구원코자 하여다는 사실은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을사사건을 전후하여 선생의 사림 구원의 예를 몇 가지 들어 이를 증(證)하고자 합니다.
<예1>『기재잡기(寄齋雜記)』의 기록
“임백령은 을사사화 당시 모위사직(謀危社稷)이 과중하다고 생각하고 자못 사류(士類)를 구할 뜻을 두었다 한다. 그는 을사직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도에서 작고하는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는 이 소식을 듣고‘이 사람이 죽다니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하고 탄식했다는 것이다.”(『기재잡기』및「석천집 해제」참조 )
※『기재잡기』- 박동량(1569~1635)의 저서
※ 임형수 – 평택 임씨로 나주 출생. 을사사화 때 제주목사로 쫓겨났다가 파면되고 명 종 2년(1547) 양재역 벽서사건에서 윤임의 일파로 몰려 유배된 뒤 사사됨.
<예2>『퇴계가서(退溪家書)』의 기록
“임백령이 역시 이기에게 말했다.‘이황은 근신하고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알고 있으므로, 지금 만약 이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생각하건대 필시 전날에 죄를 받은 자는 모두 무고 당했다고 여길 것이다.’(1545년 10월 이원록과 임백령이 이기에게 간했다.)”(권오봉 저『이퇴계가 전서의 종합적 연구』777쪽 참조)
※ 이 기록은 이기(李芑)가 퇴계를 모함하여 파면한 것을 임백령이 구원하여 10일 만에 다시 복직시켰다는 자료로서, 이것은「퇴계 자가(自家) 문건」이므로 능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이며, 1545년 10월은 을사사건 직후로서 이때 임백령은 이조판서, 퇴계는 홍문관 응교의 자리에 있을 때입니다.
위 사실은 이윤희 저『퇴계선생에게서 배우는 인생의 지혜』(지영사 간) 45~46쪽에도 그 기사가 나옵니다. 그런데「퇴계선생 기념사업회」간행의 권오봉 저『퇴계선생 일대기』에서는“을사 당시 임백령이 퇴계 선생을 모함하여…”운운의 정반대 왜곡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책 279쪽~280쪽) 이에 대해서는 따로 항의, 시정 요구의 서한을 보내었습니다.
② 선생의 인품과 행적이 훌륭했다는 것은『왕조실록』에서 그 근거를 찾아 이 장(章)의 서두에서 설명했습니다만,
<명종 1년 7월 19일>조 선생의 부음(訃音)에 대한「사왈」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즉「사왈(史曰)」
“…임백령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으며 사람대하는 데 겸공(謙恭)하고 일처리에 재간이 능숙하였다. 근면하게 봉직하였고 민첩하게 옥사를 처리하였으며 영광(靈光)에 걸군(乞郡)하고 영남을 안찰하여 자못 치척을 남겼다. …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이해가 얼키고 사변에 봉착한 뒤에야 그의 속셈이 환히 드러났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글의 후반부에 음해성 글을 첨가하는 형식으로「사평(史評)」을 쓰고 있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의 잘못을 지적한바 있습니다만 다시한번 되새겨 본다면, 을사사건이 일어나기 전(호조판서 승차까지)에는 선생의 인품이나 치적에 대한 비난이나 악평은 실록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긍정적인 기술뿐입니다. 그러나 을사사건 이후의 실록(전적으로「사왈」부분) 기사에서 선생은 처참하게 매도되고 난도질당하고 있으며,
그렇다면
가) 선생은 본디 나쁜 사람인데 이제까지 감추고 가장하고 있다가「을사사 건」때에 이르러 그 본색을 드러냈다는 말입니까?
나) 선생은 나쁜 사람이 아닌데(사건 때 반대편이었으니까) 사관(즉 사림 들)의 눈에 갑자기 그렇게 비추어졌다는 것입니까?
다) 사람의 성품이 그렇게 갑자기 변할 수 있는 것입니까? (본색을 그렇게 오랫동안 감출 수 있다는 것일까요)
라) 「사평」의 전반부에서는 칭찬하듯 올려 세워 놓고 후반부에서는 후려치 는 수법으로 그 인품이나 행실을 폄하하여 놓았으니 어느 쪽이 옳다는 것인지, 어떤 기준으로 평(評)하였다는 것인지, 아무리 사관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자의적(恣意的) 평이 용납된다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③ 여기서「사왈(史曰)」의 성격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첫째,「사왈」은 후대(실록 편찬 시)의 기술이라는 점과 또한 가령『명종실록』중 대윤(大尹)을 정죄(定罪)할 때의 논의기록은 그때(명종 즉위년 8월 28일) 당시의 사실 기록이겠지만, 거기에 부기한「사왈」은 25년 후(1568 선조 1년~4년)『명종실록』편찬 시 추기한 것이므로 양자사이에는 많은 시차와 여러 가지의 시각차가 있을 것입니다.
# 둘째,「사왈」은 사관의「역사를 보는 눈」이므로 그 눈은 눈을 가진 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사관들은 전부 신진사림 이였으므로 반대 입장인 선생을 올바르게 쓸 리가 없는 것입니다.
중종 9년(1514) 기묘사화 이후 사림들이 피해를 입고 조정에서 후퇴하였으나 중종 말년에서 인종의 즉위 후 사림파의 복권이 성취되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외척간의 다툼으로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연이어 정미사화(1547년의 양재역 벽서사건이 계기) 및 명종 3년(1548) 2월 안명세(安明世) 필화사건과 명종 4년(1549) 4월에 일어난 이홍윤(李洪胤) 무고사건 등 연쇄적 사화에 사림들이 큰 타격을 받고 대거 물러나게 됩니다. 그 후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몰락하니 귀양 갔던 사림들이 복귀하여 요직을 차지하고 재야의 신진사류가 많이 등용되어 선조 대에 이르면 사림세력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선조 초에는 재야 사림의 등용문으로 낭천제<郎薦制> 즉 과거를 통하지 않고 이조정랑의 천거를 통해 등용되는 길도 생겼습니다.)
사자(死者)는 말이 없고 역사는 쓰는 사람의 글입니다. 여기서 선생보다 백여 년 후대의 영상(領相)인 이광좌(李光佐)(소론의 거두)의「임백령」평을 소개 합니다.
• 이광좌의 사랑방에서 젊은 박문수(朴文秀)와 이광좌가 과거시험의 답안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이는 그때 과거를 본 박문수와 관련된 이야기였는데, 박문수가 내색을 않고) 이광좌가 신(神)이 시제(試題)를 가르쳐 주었다는 임백령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 박문수가“예! 괴마(槐馬)가 그랬습니까? 후세인들의 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더군요”하자 이광좌가“그렇지 않다. 그것은 당파에서 하는 소리다. 괴마는 재주 있고 글 잘 하였던 사람이란다.”라고 답한다.(이현희 저『알기 쉬운 우리나라 역사』하권 652쪽 참조-1987.4.25 대광서림 간) 후년의 임백령에 대한 평 또한 다음과 같습니다.
• <명종 6년 11월 10일> 시강관(侍講官) 윤춘년(尹春年)(후에 이·예조판서)이 상계왈(上啓曰)
“근래 10년이래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 기강이 해이해졌습니다. 저번에 역적을 제거하고 원훈이 된 4인 가운데 임백령이 가장 훌륭하였는데 가정에서의 처신이 염근(廉謹)하였으므로 죽은 후에도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습니다….”고 하며 그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외 필자가 느낀「사왈(사평)」에 대한 문제점은 별첨「충헌공 소고」에서 설명하였으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이제 핵심논제인「위훈개삭(僞勳改削)」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문제제기의 과정
문정왕후가 죽고 선조(宣祖)대가 되자 슬슬 위훈(僞勳)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 과정을 잠깐 살펴보면
① 을사사건(1545)의 여파는 더욱 확대되어 대윤파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한 정미사건(1547-양재역 벽서사건), 안명세 필화사건(1548. 2) 이홍윤(李洪胤) 무고사건(1549. 4)(기유사건) 등이 연달아 일어나, 을사 이래 5,6년간 비명에 죽은 명사만도 백여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달하여 윤원형의 세도, 횡포와 수렴정치의 폐단은 점점 심화되어 갔습니다. - 이때 만일 백령공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 아니겠는가 하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② 문정왕후는 수렴청정하여 그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였고 윤원형은 승차를 거듭하여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 영의정으로 권세와 부귀를 한 몸에 누렸습니다.
③ 그러나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음에 따라 윤원형의 20년 영화는 막을 내리고, 관직을 삭탈당하여(명종 20년 8월 27일)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 방귀 된 후 거기서 첩 정난정과 함께 죽습니다.
④ 한편 명종은 귀양 갔던 사람들을 복귀시키고 재야의 신진사류를 많이 등용시킴으로서 정계는 다시 사림 중심으로 재편성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명종 재위 전기간 동안에는 사림들의 그 매서운「을사의 위훈 개삭 문제」가 결코 제기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가) (문정왕후 생존 시에는) 그 주체 즉 몸통이 서슬이 시퍼렇게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며(후에 상술함)
나) (명종이 사림을 다시 등용한 후에도) 당사자(명종)가 생존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그 진위를 운운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 이 문제는「왕권계승에 대한 시비」라는「지극히 어렵고도 금기시되는 문제」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끄럽고도 끈질긴 사림들도 을사사건에 관한한 일체의 비판 없이 숨을 죽이고 잠잠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⑤ 명종이 죽고 선조 조에 들어감에 드디어 홍문관과 사헌부·사간원 양사(兩司)의 대간들이 을사의 신설(伸雪)과 위사(衛社)의 삭훈(削勳)을 발론하기 시작하였고 그 최선봉에 홍문관 교리인 이이(李珥)가 나선 것입니다.
-“선조가 만일 명종의 직계손 이었던들 이「위훈문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는 후사 없이 일찍 죽었고, 뒤를 이은 선조는 중종의 빈 창빈안씨 소생의 덕흥대원군의 아들이므로 명종의 이복조카가 왕이 된 것임)
※ 신설(伸雪)- 신원설치(伸寃雪恥) 즉 원한을 풀고 치욕을 씻어버림
(2)「위훈개삭」의 과정
왕조실록에서 전개되는「위훈개삭의 과정」상세편은 별첨자료와 같습니다. 그런데 선조의 실록에는『선조실록』과『선조수정실록』의 2종류가 있어 양자사이에는 이 위훈에 대한 기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선조 3년 4~8월의 5개월간 논의(제1차)가 있은 후 잠잠하였다가 선조 10년 6월 공의전(恭懿殿)(인종비)이 병이 들자 재론되어 그 죽음에 임박하여「위훈삭제교서」가 반포됨으로써 일단락을 보게 됩니다.
-「선조실록」은 1609년(광해 1)~1610(광해 2) 기자헌(奇自獻)(북인)등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여기에는 북인(北人)에 대한 칭찬이 편중되고 서인(西人)에 대한 무필(誣筆)이 많다하여 인조반정으로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1643년(인조 24)~1657(효종 8)사이에『선조수정실록』을 다시 편찬하였다. 이와 같이 선조의 실록은 당파에 오염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병화(兵火)에 불타서 거의 소실되었고 사관들의 기억과 조보(朝報), 정목(政目), 개인의 일기, 야사 등에 의존하여 편찬되었으므로 분량도 적고 정확성도 부족하여 역대 실록 중에서 그 질이 가장 떨어진다고 합니다.
① 우선『선조실록』에서 그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 선조 즉위년(1567) 11월, 기대승(奇大升)이 을사사건의 내용을 임금(上)에게 제일 먼저 설명한 후
• 선조 3년(1570) 5월에 이르러 유희춘(柳希春)이 차자(箚子)(간단한 상소문의 한 체)를 올리고 3공(三公), 동서반(東西班)이 계(啓)를 올려“이기(李芑)·정언각(鄭彦慤)의 관작 추탈”을 연거푸 상주하고
• 양사(兩司)가 합동으로“을사·정미·기유의 무고한 죄를 신면하고 4인(이기·정순붕·임백령·정언각)의 관작 추탈”을 연거푸 상주하고
• 종친 수백명이 신원(伸寃)과 토죄(討罪)를 청원하고 지방 장관, 정원(政院)에서 계속 신설(伸雪)과 토죄를 간청하였으나
• 선조는 그때마다,“고칠 수 없다”,“선조(先朝)(명종 조)의 일을 경솔히 논할 수 없다”,“이미 지난 일은 논할 것이 없다”,“고치기 어렵다”,“선조(先朝)의 훈적(勳籍)을내가 어떻게 감히 고칠 수 있겠는가, 결단코 따르지 않겠다….”하고 단호히 거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그중에서도 특히 선조 3년 8월 5일에 내린 비망기에서는“을사훈적은 선왕께서 삽혈(歃血) 맹세한 것이고, 문정대비가 종사를 위하여 정한 일이니 내가 어찌 감히 고칠 도리가 있는가…”하고 단호히 거절하여 그 명분과 의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 삽혈-굳게 맹세할 때 희생의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시고 서약을 꼭 지킨다는 단심 을 신에게 보이는 일. 일설에는, 피를 입술에 바른다고 함
• 선조의 이와 같은 확고한 의지로「위훈(僞勳)」건은 다시 거론되지 않고 7년간을 잠잠하고 있다가 선조 10년(1577) 6월 공의전(인종비)이 병이 들자 다시 논의가 시작되는데,
• 선조 10년 6월 26일 임금(上)이“공의전께서 원하시니 유관, 유인숙의 직첩을 환급하라”전교하였으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6조낭관(郎官)들의 위훈삭제의 상소는 역시 허락하지 않고 있다가
• 동년 11월 28일에 전교하기를“공의전의 병세가 위급하다……을사년의 일은 본디 내가 모르는 일이요 선조(先朝)께서 동맹(同盟)한 큰일이기 때문에 감히 손댈 수가 없다. 그러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관작을 회복시키고 위훈을 삭제할 것을 이미 공의전에게 고하였으니 하는 수 없다. 다만 내가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니 후세에 나를 구실 삼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선조자신의 부득이한 입장에 대하여 변명을 하고 있으며(이 대목은『선조수정실록』에 오히려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
• 드디어 동년 12월 8일 위훈삭제의 교서가 반포되고 공신(功臣)의 가자(加資)가 모두 개정(改定)된 것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선조가 끝까지 위훈삭제를 불윤(不允)하다가 인종비의 서거에 즈음하여 그의 간청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이를 허락하였고 그리고 후세에 대하여 이와 같은 자기의 입장까지 변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 다음『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와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선조 3년(1570) 4월 1일,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을사, 기유의 원왕을 신설(伸雪)”할 것을 청원함을 시작으로
• 같은 날, 이준경(李浚慶)(영의정)이 계(啓)하길,“…을사사건은 의심스러운 일이 너무 많아 감히 다시 논의할 수 없는 일인것 같고…다만 기유년의 옥사는 매우 억울하니…”하며 정미, 기유사건에 대해서만 신설(伸雪)을 청하고 을사사건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으나
• 같은 날, 홍문관이 1일 2회씩 상차(上箚)하고, 양사(兩司), 조정 전체가 계(啓)하고, 종친·유생·충의위(忠義衛)가 다투어 합동으로 상소(上疏)하니 임금(上)이 드디어“정미, 기유의 죄인을 신설(伸雪)하고 이기(李芑), 정언각(鄭彦慤)의 삭탈을 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또 같은 날, 홍문관의 상차에“12가지 무망(無望)의 증거”를 제시하였으나 임금이 불허하고 또“14가지 허위의 단서(端緖)”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으며, 이이(李珥)가 삭훈 논의를 제일 먼저 꺼내어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전후 41차례나 차자(箚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차후에 상술)
• 선조 3년(1570) 8월 1일에 대신, 3사(三司)가 신원(伸寃)을 연계(連啓)하였고 삼공(三公) 백관이 복합(伏閤)하고, 양사는 1일 5차례씩 상계(上啓)하고, 홍문관이 1일 3차례씩 상차(上箚)함에 임금(上)이 3공·의정부·6조·3사의 장(長)을 명소, 논의한 후 드디어“정순붕(鄭順朋)·임백령의 관작 삭탈”을 명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 그리고 동년 10월 1일 대간들이“신원(伸寃)과 삭훈(削勳)”을 청함에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의 역명(逆名)”을 신설(伸雪)하였다고 합니다.
• 그 후 7년간을 잠잠히 있다가
• 선조 10년(1577) 5월 1일 공의전 왕대비(인종비)가 병이 들어 대비의 요청으로“유관, 유인숙의 직첩”을 돌려주었으나“위사공신의 녹권(錄券) 삭제”는 임금(上)이 불허하였으며
• 동년 11월 1일 임금이 대비의 간청에 못 이겨 녹훈(錄勳) 삭제를 약속한 경위가『선조수정실록』왕 10년 11월 1일조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 그리하여 동년 12월 1일에「위훈삭제교서」가 반포되어“이기·정순붕·임백령·정언각의 관작을 삭탈” 하고“유관, 유인숙 등의 역명(逆名)”을 씻으며 정미, 기유년의“죄입은 사람의 직첩”을 회복시켜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 대하여
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수정실록』은「선조 3년 4월 1일, 8월 1일, 10월 1일」및「선조 10년 5월 1일, 8월 1일, 11월 1일, 12월 1일」자로 모든 기사의 날짜가「1일」로 되어 있음이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며 그 날짜와 내용의 정확성이나 신빙성을 의심하게 하고 있으며
나) “상(上)(임금-선조)이 윤허하지 않았다.”하고 간단히 기록하여『선조실록』처럼 왕의 거부 이유 등이 자세히 제시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거부 건수 또한 적으며
다) 이기·정언각과 정순붕·임백령이 각각 선조 3년 4월 1일과 8월 1일자로 이미 삭탈관작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 10년 12월 1일「위훈삭제교서」에 의해 다시 관작이 삭탈됨은 명백히 모순(2중)이며
라) 선조 3년 10월 1일에 유관, 유인숙 등의 역명(逆名)이 이미 씻겨 졌는데도「위훈삭제교서」에 다시 신원(伸寃)된 것도 이상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마) 따라서 위와 같이 수모(首謀)급들(1등공신)이 7년 전에 이미 삭탈관작 되었고, 유관 등의 역명이 이미 말끔히 씻어져서 한(恨)으로 남을 거리가 거의 없을 터인데, 왕이 인종비를 문안했을 때“녹훈은 선조(先朝)에서 한 중대한 일이므로 가벼이 고치지 못합니다.”한데 대하여 인종비는 대성통곡을 하였다하니 (『선조수정실록』10년 11월 1일조) 어찌된 일일까요? 이미 7년 전에 중요한 사항은 모두 마무리되었는데도 왕은 무엇 때문에 녹훈삭제불가를 다시 천명하였고 인종비는 이를 듣고 왜 대성통곡을 하였단 말입니까? 그 줄거리가 모순되지 않습니까?
바) 그래서 저는 앞의『선조실록』의 기록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결론지은 바와 같이『선조실록』 쪽의 기록을 믿고자 합니다.즉, 선조(宣祖)께서 끝까지 위훈삭제를 불윤(不允)하다가 인종비의 서거에 즈음하여 대비의 간청(대성통곡)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이를 수락하였고 그리고 후세에 대하여 자기의 입장까지 밝혀 놓았다는 것입니다.
사) 따라서 뒤의『선조수정실록』의 기록, 즉“수모(首謀)급 4인의 삭탈관작(선조 3년 4월 1일·8월 1일) 및 유관 등의 역명 신면(동년 10월 1일)의 기록”은 조정신료와 사림들의 시위가 얼마나 거세었고 그것의 효과가 즉효(卽效)하였던가를 보여주기 위하여『수정실록』작성 시 삽입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선조 10년 인종비의 서거 시 상황과 맞지 않아 설명이 되지 않으며, 또한 7년간의 침묵에 대한 이유도 설명이 되지 않으므로 믿기 어려운 바, 필자는 결국『선조실록』의 기록대로「선조 10년 12월 8일 교서 반포로서「위훈개삭(僞勳改削)」이 확정된 것으로 보고자 합니다.
(3)「위훈(僞勳)」의 본질
여기서「위훈」의 본질을 다시 한 번 고찰해 보기로 합니다.
①「위훈(僞勳)」이란, 글자 그대로「거짓공훈(功勳)」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 그「공훈」의 내용이 허위(虛僞)라는 것입니까.
• 그「공훈」의 효과가 거짓이라는 말입니까.(무효란 것입니까)
• 명종 조에서는 그러한 거짓을 공훈 하였으며 삽혈(歃血) 맹세까지 하였단 말입니까.
② 을사의 공훈은 분명「종사(宗社)를 보위한 공훈」즉「위사공신(衛社功臣)」이었고 종사는「명종의 보위(寶位)」이며 공적이란「종묘사직을 모위(謀危)하려 했던 역적을 제거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 만일 이러한「위사공훈」을「위훈」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그 효과 즉, 그 원인행위인 명종임금의 즉위까지도 허위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 논리적 딜레마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종묘사직을 모위 하려는 역적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였더라면 그들은 결국「종묘사직을 모위」하였을 것이고, 만일 그 일이 성사되었을 시에는 분명히 명종임금의 즉위는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위훈의 주장」은「명종 즉위의 당위성」을 자칫 훼손할 우려까지 생긴다는 것입니다.
• 또한「위사공훈」을 위훈이라고 한다면, 그 공적 즉「종사를 모위 하려는 역적을 제거한 일」은 분명 잘못한 일이 되고(그대로 방치한 것이 옳았다는 논리가 되고), 이와 같이 잘못된 일을 공훈하고 삽혈맹세까지 시킨 왕 또한 책임을 면할 수 없고, 도리어 탄핵을 받아야 마땅한 국가의「일대 오류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위훈」논리의 부당성에 대한 인식
가) 이와 같은 위훈 논리의 위험성을 제일 먼저 깨달은 분은 바로 선조(宣祖)입니다. 그리하여 선조께서는「을사훈적은 선왕께서 삽혈맹세한 중대사이고 문정대비께서 종사를 위하여 정한 일인데 내가 어찌 감히 고칠 도리가 있는가」하고 끝까지 삭훈을 반대한 것이며
나) 당시의 영의정 이준경(李浚慶)도「을사사건은 의심스러운 점이 너무 많아 다시 논할 수 없다….」하여 을사의 거론을 피하였고(정미, 기유사건만 거론함)
다) 당시의 거유(巨儒)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공신삭훈의 문제에 신중한 입장임이『선조실록』의 기록에도 나와 있으며, 더불어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윤임(尹任)의 신원을 주장하자 윤임 등은 사직에 대한 죄가 없지 않다고 하여 이이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윤임도 선조 10년 신원됨). 즉,『선조실록』<10년 12월 4일>조를 보면“이황이 언제인가 말하기를‘윤임과 유(柳)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고 또한 공신을 삭제하는 문제를 매우 어렵게 여겼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라) 위훈논쟁의 최첨단에 선 율곡의『전서(全書)』에서도「선생(율곡)이 위사위훈 삭제를 청원하였는데 명현 대신들이 난색을 표시하므로 선생이 홀로 항의하였다…….」라고 당시의 사정을 실토하고 있습니다.(『율곡전서』경오 4년〈선생 35세〉조 참조 )
③ 따라서 을사사건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이「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의 내용이 무엇이며 / 누가 제일 잘 알고 / 누가 제일 먼저 발론하였으며 / 이에 대한 이해관계가 제일 많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파악해보면 될 것입니다.
• 「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의 내용을 다시한번 정리한다면,(명종 즉위년 8월 28일 교서)
가) 윤임(尹任)은 인종 승하 당시 3부자가 임의로 입내(入內)하여 옥체를 안고 불경하게 거동하였으며 발상(發喪)을 저지하려 했고 자기의 생질인 계림군(桂林君) 또는 봉성군(鳳城君)의 추대를 발설하였고
나) 유관(柳灌)은 밖에서 윤임으로 하여금 후사의 취품(取稟)을 사주하였고, 또한 모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하였으며
다) 유인숙(柳仁淑)은 명종의 현(賢), 불현(不賢)을 질문하고, 유병설(有病說)을 발설하는 등 명종의 대통 승계를 직간접적으로 방해하였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가)「윤임의 불경사건」은 구중궁궐 내간(內間)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오직 문정왕후만이 능히 알 수 있는 일들이며(외간에서는 알 수 없는 일임)
나)「유(柳) 등의 후사 취품 문제」(윤인경이 들음),「명종의 자질 문제」(이언적이 들음)와
다)「모후의 수렴청정반대 문제」등은 정순붕의 상소가 발표된 직후 그에 대한 증언들이 속속 나왔던 것입니다.(『명종실록』즉위년 8월 28일 조 참조)
• 문정왕후는 처음에는「내간의 일」이라고만 발설하였다가 대신, 대간들이 그 내용을 잘 모르고 반대가 있자「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이라 하였고, 연이어 계속 관용의 청원이 잇따르자 드디어「종사를 위태롭게 한 역적」이라는 막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 이와 같이 대신, 신료들이 처음에는「내간의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가벼운 처벌(찬축, 파직, 체차)을 건의하여 그대로 수용되었다가, 신료들이 다시 구원을 계속 청원함에 문정왕후는 한심스럽다고 한탄하였으며
• 이때 정순붕의 상소가 있게 되자「내간의 일」즉「종사를 위태롭게 하는 사건」의 내용이 소상히 알려지고, 대신, 대간들이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상황 아래에서 왕후는「제 신(臣)들의 의득(議得)(의결) 사항이 아니라 내가 결정할 사항」이라 하여 이들에게 사죄(死罪)를 결정한 것입니다.
• 이와 같이「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의 내용은 왕위계승을 위요한 처절한「내간의 일」이었고, 이것을 제일 잘 안 사람은 물론 이것을 몸소 겪은 문정왕후 자신이며, 따라서 제일 먼저 발론한 사람도 왕후밖에 없으며 왕후야 말로 이해관계가 제일 큰 이해의 당사자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후는 그 처절했던「내간의 일」을 빌미로 윤임 일파와의 구조적인 대립과 원한관계에 대한 철저한 보복과,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최선의 안전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몸소 앞장서서 대윤(大尹) 일파의 숙청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아집니다.
• 이상으로서 을사사건의 실제 본체(몸통)는 바로 문정왕후이며 소위 위사공신들이란 이를 동조 추종했던 대리전사(代理戰士)(깃털)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해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즉,「을사사건」은 문정왕후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 최근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한 모임에서「유학적(儒學的)으로 본 조선시대의 최대 악덕여인」으로「문정왕후」를 선정하였다고 합니다.
(4)「위훈개삭(僞勳改削)」상소의 논지와 그 검토
그러나 후대(선조 조)에서의「위훈개삭」상소의 논지는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① 위에서 말한 을사사건의 본질은 아예 외면하고 있습니다.
<선조 2년 9월>
이이(李珥) 계왈(啓曰)“위사(衛社)는 바로 위훈(僞勳)이고, 그때 죄를 당한 자들은 모두 선한 선비였습니다. 인종이 승하하자 중종의 적자(嫡子)로서 명종만 있을 뿐 어찌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가겠습니까. 간특한 무리들이 감히 사림을 참벌(斬伐)하였는데…”(『선조수정실록』)
<선조 3년 4월 1일>
홍문관(弘文館) 상차 왈(上箚 曰)“…인종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왕위의 수수는 분명히 적통(嫡統) 아우인 명종으로 이어질 것은 하늘도 사람도 인정하는 바인데...윤원형, 이기 등이 사감을 품고 독기를 뿌려…근거 없는 말을 떠들어…윤임을 도마위의 고기로 만들고 유(柳)등을 대죄로 하였으니…”(『선조수정실록』)
◇ 위 상계(上啓)에 대하여
가) 위에서 보면, 인종·명종 간의 왕권수수가 순조로워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을사사건 9일간의 진행과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별첨참조) 명종 즉위년 8월 25일 대비가 어째서“…우리 모자가 고립되고 종사가 위태로워서…”라고 당시의 긴박했던 입장을 절규하였으며,
나) 또한 왜 을사사건의 진행과정에서 대비는 조정신료들 앞에서“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 역적 운운”의 발언을 연거푸 하는 것입니까. 문정왕후는 희대의 거짓말쟁이란 말입니까. 이것을 기록한『명종실록』이 위서(僞書)란 말입니까.
다) “윤원형 등이 근거 없는 말을 떠들어 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엄청난“내간의 일”을 외간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또는 외간에서 만들어진 각본에 의거 대비가 궁중 내간에서 그대로 연출했다는 말입니까.
라) 사림의 주장대로「위사(衛社)」가 위훈이라면 종사(宗社) 즉 명종의 즉위는「괴뢰정권」이며 삽혈맹세는「거짓 맹세」라는 말입니까.
• 이와 같이 위훈소(僞勳疏)의 논지들은〈명종의 왕권 수수는 자명한 일〉〈근거 없는 말의 조작〉등으로『명종실록』의 기록과는 상치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으니 즉 을사사건의 본질(본체)은 외면한 채 이를 빗겨 가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선조 3년 4월 1일〉자 기록을 보면,
홍문관 재차 왈(再次 曰)“…화(禍)를 꾸밀 당시 윤원형이 사설(邪說)을 조작 문정왕후를 기망하여 밀지(密旨)를 내리도록 하였는데…”(『선조수정실록』)
가) 여기서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대비(문정왕후)를 기망하여 밀지를 내리도록 하였다는데 이미 위에서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처절했던「내간의 일」이란 오직 대비만이 알고 있는(외간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사실인데 「대비를 기망」하였다 하니 도대체 무엇을 기망하였단 말입니까.
나) 그것은 대비의“밀지”에 대한 발언을 보면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즉, 명종 즉위년 실록기사를 보면,
<8월 24일>
“내전에 변고가 있으나 발설하지 않는 것은 선왕의 시신이 아직 빈전에 있기 때문이었으나 종사의 위급을 구하기 위하여 부득이 밀지를 내린 것…”
<8월 25일>
“우리 모자가 고립되고 종사가 위태로워 조정의 논계를 기다려도 움직임이 없어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밀지를 내렸는데…”
<8월 28일>
“이와 같이 내외가 결탁하여 종사를 위급지에 빠트려 놓고 아직도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타심(他心)을 먹고 있으니 모위(謀危)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을 조정도 모르고 판서도 모르니 할 수 없이 밀지를 내려 대신들에게 알렸다….”
다) 위와 같이 대비는
종사의 위급을 위하여, 조정의 움직임이 없어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조정도 모르고 판서도 모르니 할 수 없이 밀지를 내렸다는 것인데, 이것이「대비가 내용도 모르고 피동적으로 한 행동(밀지를 내림)」이라는 말입니까. 이것이「윤원형이 조작한 사설(邪說)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입니까.
라) 〈윤임 등을 제거하는 일로 자전(慈殿)이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려 이기·정순붕 등을 설득하게 하였다.〉(명종 즉위년 8월 28일 실록)는 기록이 능히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이 문정왕후의 밀지까지도“대비는 모르고 기망당하여 내렸다.”는 식으로 대비나 왕실을 빗겨 가려하고 있으니, 즉 본체는 건드리지 않고 그 대리자들에게만 책임을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왕권은 지엄한 것이며 함부로 논하다가는 자칫 대역(大逆)에 저촉되고 스스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 선조는〈선조 3년 8월 5일〉자 비망기에서 하교 왈(下敎 曰)
“…이 세 가지 상소는 분수를 벗어났거늘 하물며 자전(문정왕후)까지 거론하여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였고 또 사특한 이야기까지 썼으니...자전이 과연 사특한 말에 현혹된 분인가?…이 상소에 참언이 자전에게 들어갔다고 하니 그를 하옥시켜 근원에 대하여 국문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선조 대에 들어서도 이미 고인이 된 자전(문정왕후)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 못할 정도의 분위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 사림들의「위훈소」는, 본론은 회피한 채 말초적인 주변문제만 맴돌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선조 3년 4월 1일〉자의 홍문관 상차(上箚)에서 을사훈작이 위훈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로서「12개의 무망(無望)의 증거」와「14개의 허위의 단서」를 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므로「12개의 무망의 증거」각 항목만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12개의 무망의 증거」 내용
가) 을사사건이 반역 사건이라면 천하에 공개하여 바른 정상(情狀)을 밝혀야 하는데, 비밀리에 모의하여 양사(兩司)와 결탁하려 했으나 대간들이 반대하였다는 점
나) 이기가 처음 발론할 때“윤임(尹任) 등이 스스로 불안하였느니, 행적이 있느니”하여 반역의 증거를 충분히 밝히지 못했다는 점
다) 왕명에 의거 처음 모였을 때, 정순붕이 아무 말 않고 있다가 상소문에서 비로소 윤임 등의 불궤(不軌)를 말하니, 그동안(6일간)에 불궤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냐 하는 점(※ 불궤-법이나 도리를 지키지 아니함)
라) 공의대비(恭懿大妃/인종비)는 사려 깊은 성신(聖神)한 분인데 만일 그 지친(至親/윤임)이 흉모를 도모했다면 이를 밝히고 성토했을 것인즉 어찌 감추고 그들과 통했겠느냐 하는 점
마) 반역의 무리(윤임·柳 등)를 다스리면서 심문도 하지 않고 승복도 받지 않는 것은 이들을 빨리 죽여 입을 막고 사술(邪述)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냐 하는 점
바) 2성(聖)(중종·인종)이 아직 재세(在世)해 계시는데 어떻게 계림군(桂林君) 류(瑠)를 왕위에 오르도록 음모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점
사) 인종이 위독 시 적제(嫡弟)(명종) 전수가 명백하였는데 어찌 윤임이 불궤를 부릴 수 있었겠느냐(즉 대권 전수 시에는 아무의의가 없다가 이덕응(李德應)의 무복(誣服)이 있은 후 반역으로 단정, 2柳까지 죄가 미쳤느냐)하는 점
아) 역적을 정법(正法)으로 다스리지 않고 이덕응을 유혹과 협박으로 자백을 받아내어 다스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는 점
자) 공신 허자(許磁)는 뒤에 후회하여 멀어진 후 죄까지 받았으며, 민제인(閔濟仁)은 삭훈까지 당하는 등 자기들끼리 모순을 드러냈는데 어찌 그들의 주장을 공론(公論)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점
차) 명현(名賢)(이언적·권발)을 공훈한 것은 소인이 군자를 위망하고 의지하여 백성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냐 하는 점
카) 심연원(沈連源)은 모의에 가담치 않았고 본인이 원치도 않았는데 공훈으로 끌어 들인 것은 외척을 끌어드려 공훈을 단단하게 하려는 계략이 아닌가 라는 점.(※심연원-명종비 인순왕후의 조부. 영의정까지 지냄)
타) 자기들을 조금이라도 비난하면 가차 없이 유형(流刑)·음형(陰刑)으로 다스려 입을 막으려 했다는 점
- 그러나 임금(上)은 불윤(不允)하였음
◇ 「12개 증거 항목」에 대한 검토
위의 12개 항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공통적인 특징은 문제를 제기함에 있어 모두「네거티브(negative)형」즉「소극형(消極型)」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그때 누구는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 아니다.」라는 6하 원칙에 입각한「적극적(positive)」반증이 필요할 터인데,「무엇이 되려면 무엇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그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간접적이고「소극적(negative)」인 방법으로 논리를 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 즉,「을사사건이 반역사건이라고 한다면 천하에 공개하여 그 정상(正狀)을 밝혀야 할진대, 이를 비밀리에 모의하였으니 반역사건이 아니다」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명종실록 및 교서(敎書)에, 을사사건은 윤임·유(柳) 등의「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이「반역 사건」이라 규정하였으므로, 이것을 뒤엎으려면 「그때 윤·유 등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상황 및 알리바이 입증) 반역이 아니다.」라고 포지티브(positive) 반증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법이론(法理論)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역사건」이란 국가의 중대사건이며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 없는 것이고 명종 조에서의 반역 사건을 선조 조에서 번복하려면 애매한 부인(否認)이 아니라 포지티브적인 직접적 반증이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나) 또 위훈소(僞勳疏)에서는,「인종이 위독시 적제(嫡弟)(명종)가 왕위를 이어 받는 것은 하늘도 알고 사람도 아는 명명백백한 사실인데 어찌 윤임 등이 불궤(不軌)를 부릴 수 있겠느냐」하고 왕위의 전수가 아무 문제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명종실록」즉위년 8월 25일 조의“…우리 모자(母子)가 고립되어 종사가 위태로워…”라는 문정왕후의 절규가 왜 나왔으며 동년 8월 28일 반포된 교서의 내용(윤임 등의 불궤)은 위서(僞書)라는 말입니까. 그들 말대로“왕위 전수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만 간단히 적을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명종실록』의 기록들을 뒤집을만한 포지티브한 반증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 문정왕후가 본체라는 것은「위훈소(僞勳疏)」의 자체 내에서도 볼 수 있으니 즉,「이기가 반역의 증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 것」「정순붕이 처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들은 그들도 처음에는 그 사실(종사모위의 사실)의 내용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라) 반역의 무리를 심문치도 않고 승복 받지도 않고 처단을 결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문정왕후이고(“제신의 의득사항이 아니라 내가 결정할 사항”), 신료들로서는 감히 참견할 수 없었던 실정이었으며
마) 역적을 정법(正法)으로 다스리지 않고 이덕응을 협박하여 자백을 받아낸 것은, 위와 같이 문정왕후의 사죄(死罪)결정이 먼저 정해지고 이를 뒷받침하라는 왕명에 의한 추관(推官)들의 후속조치로서, 따라서 이것은 을사사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 또는 과정이며(본래 죄인을 문초한 후 정죄(定罪)하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조선왕조 시대에는 이 같은 역추궁이 다반사로 이루어졌음)
바) 그 외 항목들도 위훈의 명분에 대한 적극적인 반증이라기보다는 결과론적인, 지엽적인 주변 문제만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 이와 같이 후대의 사림들이「위훈소」에서 포지티브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 증거를 네거티브식으로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도 명종 즉위 시 「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에 관련된 본체가 바로 문정왕후임을 능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문정왕후를 정면에서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것을 피하면서 오히려“왕후는 모르는 일”이라느니“왕후를기망하였느니”하여 사건에서 격리시키면서 단지「줄서기」한 대리전사인 위사공신들을 오히려 사건을 일으킨 본체로 꾸미려하니 이와 같이 네거티브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때로는 정반대의 상황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사림들은 본체에의 접근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주변문제만으로 인해전술로 왕(선조)에게 상주(上奏) 또 상주하였으나, 요새 문자로「증거불충분」으로 결과는「임금(上)의 불윤(不允)」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영의정 이준경이 말한 것처럼 을사사건은 참으로 의심스러운 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③「위훈소(僞勳疏)」는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최첨단에 섰으며 전후 41회에 걸쳐 상소(上疏)를 하고 있습니다.
• 『선조수정실록』<3년 4월 1일>조는“…… 이때 이이(李珥)가 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서 삭훈(削勳)논의를 맨 먼저 꺼내어 강력히 주장하여 전후 41차에 걸쳐 차자(箚子)(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문서)를 올렸는데 41편 모두 이이가 쓴 것이어서 훈귀(勳貴)들이 대부분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율곡선생전서』에도「옥당 논 을사 위훈 차(玉堂 論 乙巳 僞勳 箚)」의 제목으로 41차(箚)가 실려 있는데, 내용은 거의 같으며 어떤 차는 완전히 동일하여「상동(上仝)」이라 표시해 놓고 있습니다.(※玉堂-홍문관)
• 이미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다른『율곡전서』에는“선생이 주동이 되어 동료와 더불어 위사(衛社)의 위훈 삭제를 청하였으나 명현대신들이 혹은 난색을 표시하였으므로 선생이 홀로 40여 차례나 항의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가) 율곡이 신진 사림으로서 지금으로 말하면 재야운동권처럼 최선봉에서서 이와 같이 끈질기고 집요하게 삭훈을 주장한 의도는 언필칭「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아 질서를 세우고 시의에 맞도록 폐법(弊法)을 개혁하며 사회(士禍)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하고 을사의 위훈을 삭탈하여 정의를 밝히고 붕당의 폐혜를 씻어서 화합을 구해야한다.」는 것입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이」조 참조)
※ 선조 때 사림간의 붕당이 생기자 율곡이 중재노력을 하였으나 결국은 선조 16년 서인으로 자정(自定)하게 됩니다.-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참조
나) 그런데 율곡 자신이 스스로 밝혔고『선조수정실록』에도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훈귀(勳貴)들이 삭훈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명현대신들이 난색을 표시하였고 퇴계 이황도 이것을 매우 어렵게 여겼던(『선조실록』10년 12월 1일 조) 사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필자가 생각하건대,
첫째, 을사사건은 문제자체가 왕실에 관련된 매우 미묘하고 난감한 사건일 뿐 아니라
둘째, 장차 또 다른 붕쟁(朋爭)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과연 율곡의 생각과는 달리,
다) 조광조(趙光祖) 이래로 사림의 타도대상이었던 훈구·외척 세력이 무너지고, 그 대신 사림들이 정권을 독점한 이후에도 그들은 동·서로 갈라지고(율곡은 서인의 편에 섬) 다시 사분오열되어 또다시 건저(建儲)(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피로 피를 씻는 붕쟁을 일삼았으니, 사림 그들이 과연 대윤·소윤의 파벌을 운운하며 죄악시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儲-태자 저)
라) 한편, 을사 위사(衛社)의 일등공신인 이기(李芑)가 율곡의 가까운 집안(재종조)인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덕수이씨세보』참조) 행여 왕조시대 사림의 결백증이 그와 같은 돌출행동을 야기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임백령의 스승인 박상의 친조카 박순이 임백령의 시호를 반대한 사건도 같은 맥락으로 보고 싶습니다.)
≪ 을사사건 기간의 임백령 발론 ≫
<8월 22일>
임백령 왈“…내간(內間)의 일을 알 수는 없으나 윤임(尹任)은 왕대비(王大妃)(인종비)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니, 일이 왕대비와 관계된 것이라면 발론되지 말도록 하심이 어떻습니까?
<8월 24일>
「비망기(백인걸, 대간들의 파직)」가 내려오자 좌우가 묵묵히 한참 있는데 임백령이“간관(諫官)을 죄주는 것은 어떠한가?”하니 이언적(李彦迪)·권발(權撥)·신광한(申光漢)등도 계속해서 구원하는 말을 하였고, 이어 윤인경(尹仁鏡)등과 함께“너그럽게 용납하시길…”하고 진언(進言).
<8월 25일>
윤인경 이언적 임백령 등 9인이 써서 여쭈기를(서계왈 書啓曰) “…유관의 죄가 가볍지는 않지만 외방(外方)에 유배하는 것은 과중하니 너그럽게 계량하소서”라고 하고 있음.
<8월 26일>
임백령 왈(曰)
“…속히 조치하면 화가 오히려 작을 것이지만 늦게 발로되면 의구심이 쌓여서 화가 말할 수 없이 크게 될 것이며”
“…뜻밖에도 백인걸의 어리석은 말 때문에 다시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했다는 명목이 하나 더 늘어났으니… 3인의 죄는 유배면 충분한데 하필이면 이것으로 사연을 삼을 것인가?”
“…유배하거나 파출하는 것은 달게 여길 바이지만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데는 드러난 자취가 없으니 죄목 중에 이 일언(一言)은 삭제하여 인심을 편안케 하소서.”
“…유관을 도로 소환하여 대신을 우대하는 법도를 보이고 대간을 파직하지 말고 제왕의 언로를 넓히는 의리를 다하소서”
“…처음에 발의한 것은 화가 작은데서 그치게 하고자 함이었고, 지금 아뢴 것은 형벌이 과중할까 두려워서입니다.”
“…성명(聖明)한 시대에 형벌이 지나치지 않아서 인심이 화평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8월 28일>
(정순붕의 상소가 나온 후) 허자(許磁)왈(曰)
“…임금님이 근심하시는데 또 어찌하여 윤임이 가히 책략을 부리는가. 이 사람을 제거하면 위에서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임백령이 왔기에…신(臣)이 말하기를 윤임은 유배하고 유관은 체직, 유인숙은 파직시킨 것이 가하다 하였습니다. 이때에는 다만 위에서 상심하신다고만 들었지 이렇게까지 된 줄은 몰랐습니다. …뒤에 모위(謀危)했다는 하교(下敎)가 나오기까지는 신과 임백령 또한 알지 못했는데…” 임백령 왈(曰)
“…정순붕의 소(疏)중「함께 논의한 재상이 구원해주고 비방을 멀리하려고 한다.」고 한 것은 신을 가리키는 것이라 매우 황공합니다. …신은 윤인경에게「3인의 죄는 이미 드러났으나 조정에 풍파가 있으면 사림(士林)이 화를 입을 것이요 새 정사에 온당치 못한 것이니 단지 3인의 죄만 정하여 국가를 안정시킴이 가하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종사를 위태롭게 하려고 했다.」는하교를 받고 실로 놀랐습니다. …신은 실로 황공합니다.”
(3) 이상이「을사사건 9일간」의 선생의 발론과 행적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 여기서, 선생이“엄벌로 엄히 다스리자”고 주장한 발론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사연」의 문구를 죄목에서 빼자고 하였겠습니까? 왜 정순붕의 소에서「구원해 주고 비방을 멀리하려고 한다」는 지적을 받았겠습니까?
• 선생은, 오히려 3인을 유배정도로 처리하여 나라를 빨리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그래야 사림의 화가 적게 된다고 생각하였음)
• 왕대비(인종비)에 누가 되는 발론은 하지 말라고 옹호하였고
• 대간들의 죄를 물어 언로를 막아서는 안된다는 상계(上啓)를 유도하였으며
• 연로한 유관을 외방에 유배까지 하는 것은 과중하니 선처해달라는 서계(書啓)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순붕의 소에서「구원해 주고 비방을 멀리하려한다」는 지적까지 받고 있는 것입니다.
• 또한 정순붕의 소에「처음에 함께 논의한 재상…」에서 선생이 처음 함께 논의할 때에는「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연」의 내용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이는 위 <8월 28일>의 허자나 임백령의 발론에서 확인됩니다.)
• 만약 임백령이 이 내용을 알고도 <8월 26일>어전에서「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문구를 죄목에서 빼자고 감히 발론할 수 있었겠습니까?
• 그러나 정순붕의 상소가 발표됨으로써 사태가 일변되었음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 이후 선생은 물론 윤인경·홍언필·이언적 등 고위 신료까지 아무도 반론하지 못하고 왕(문정대비)의 결정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선생은 온건하고 신속한 처리로서 나라를 빨리 안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들과 사림을 구원하고 비방을 멀리하는 처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② <명종 3년 2월 12일> 사평(史評)에서도“임백령은 자신의 영구(營救)한 것을 해명하였으니 오히려 옳은 선비라 할 수 있으나, 그의 말은 역시 자신을 구제하는 것 같았다.”고 쓴 것을 보면 당시 선생의 영구(營救) 행적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③ 후일 <명종16년 5월 11일> 윤원형이 경연에서 상계하길,“…당초 신이 윤임 등의 역모에 대해서 임백령에게 말했더니 믿지 않았습니다. …백령이 하는 말이‘윤임은 하루아침에 권세를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불안해하고 있다. …형적(形迹)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사람은 제거하는 것은 가하나 역모로 죄를 정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중학(中學)에 모여 회의하였으나 한결같지 않았으므로 그만 두었다가 재상들이 입계(入啓)하여 단지 찬출(귀양)시키는데서 그쳤는데…정순붕의 상소가 있게 되어 그 모역의 정상이 모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고 하고 있으니, 곧 선생이「역모를 다스리는 것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그 논의조차 성립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4) 이어서 선생의 을사사건 <전>과 <후>의 행적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음은 선생의 을사사건 전후의 행적 개요입니다.(상세한 것은 별첨「을사사건 전후의 임백령 행적」 참조)
① 사건 <전>은 명종즉위년 7월 1일~8월 21일 사이로, 이때 선생은 호 조판서, 약방제조(藥房提調)로서 일상 정무이외의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② 사건 진행 중은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으며
③ 사건 <후>는 명종 즉위년 9월 1일~왕 1년 7월 17일 서거 때까지로서 단계(單啓)·합계(合啓)를 막론하고 정무처리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 선생 이 을사사건을 직접 거론한 기록은 없습니다.
④ 다만 왕 즉위년 9월 중의 사왈(史曰)(史評)부분에서 선생에 대한 비판 기록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평은,
• 후술하는 바와 같이 후대 실록 편찬시(25년 후의 선조 초기)의 사관들의 사감(私感)이 개입된 기술이며
• 서(書) 계(啓) 공사(供辭)등의 6하 원칙에 입각한 직접적인 자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정(市井)의 유언(流言)·전언(傳言)에 의지하고 있는 것 같으며 ※ 공사(供辭) - 죄인이 범죄사실을 진술하는 말
• 본체(本体)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말초적, 피상적인 사실만 말하고 있음을 다음에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5) 소위「사왈(史曰)」즉「사평(史評)」을 검토하여 보고자 합니다.
① <명종 즉위년 9월 11일>「사왈」에,“백령은 좋게 말을 꾸며 사림에게 화가 끼칠까 염려하는 척 하였지만, 속으로는 해치려는 뜻이 있었으며…”라고 평하고 있는데, 소위「사관(史官)」이 어떻게「속으로 해치려는 뜻」을 헤아렸다는 것일까요? 위에서 본「을사사건 9일간」의 기록이나 그 후 진행과정에서 해치겠다는 흔적이 어디에 있다는 말일까요? 이것은 참으로 자의적(恣意的)인억지요 일방적인 평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만일 선생께서 실제로 그러한 행적이 있었다면 서슬이 퍼런 사관들이 사실그대로 썼을 터인데 어찌하여「속으로는 운운…」하는 표현을 쓴단 말입니까? 남을 해친 언행이 일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구원코자 하여다는 사실은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을사사건을 전후하여 선생의 사림 구원의 예를 몇 가지 들어 이를 증(證)하고자 합니다.
<예1>『기재잡기(寄齋雜記)』의 기록
“임백령은 을사사화 당시 모위사직(謀危社稷)이 과중하다고 생각하고 자못 사류(士類)를 구할 뜻을 두었다 한다. 그는 을사직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도에서 작고하는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는 이 소식을 듣고‘이 사람이 죽다니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하고 탄식했다는 것이다.”(『기재잡기』및「석천집 해제」참조 )
※『기재잡기』- 박동량(1569~1635)의 저서
※ 임형수 – 평택 임씨로 나주 출생. 을사사화 때 제주목사로 쫓겨났다가 파면되고 명 종 2년(1547) 양재역 벽서사건에서 윤임의 일파로 몰려 유배된 뒤 사사됨.
<예2>『퇴계가서(退溪家書)』의 기록
“임백령이 역시 이기에게 말했다.‘이황은 근신하고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알고 있으므로, 지금 만약 이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생각하건대 필시 전날에 죄를 받은 자는 모두 무고 당했다고 여길 것이다.’(1545년 10월 이원록과 임백령이 이기에게 간했다.)”(권오봉 저『이퇴계가 전서의 종합적 연구』777쪽 참조)
※ 이 기록은 이기(李芑)가 퇴계를 모함하여 파면한 것을 임백령이 구원하여 10일 만에 다시 복직시켰다는 자료로서, 이것은「퇴계 자가(自家) 문건」이므로 능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이며, 1545년 10월은 을사사건 직후로서 이때 임백령은 이조판서, 퇴계는 홍문관 응교의 자리에 있을 때입니다.
위 사실은 이윤희 저『퇴계선생에게서 배우는 인생의 지혜』(지영사 간) 45~46쪽에도 그 기사가 나옵니다. 그런데「퇴계선생 기념사업회」간행의 권오봉 저『퇴계선생 일대기』에서는“을사 당시 임백령이 퇴계 선생을 모함하여…”운운의 정반대 왜곡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책 279쪽~280쪽) 이에 대해서는 따로 항의, 시정 요구의 서한을 보내었습니다.
② 선생의 인품과 행적이 훌륭했다는 것은『왕조실록』에서 그 근거를 찾아 이 장(章)의 서두에서 설명했습니다만,
<명종 1년 7월 19일>조 선생의 부음(訃音)에 대한「사왈」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즉「사왈(史曰)」
“…임백령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으며 사람대하는 데 겸공(謙恭)하고 일처리에 재간이 능숙하였다. 근면하게 봉직하였고 민첩하게 옥사를 처리하였으며 영광(靈光)에 걸군(乞郡)하고 영남을 안찰하여 자못 치척을 남겼다. …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이해가 얼키고 사변에 봉착한 뒤에야 그의 속셈이 환히 드러났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글의 후반부에 음해성 글을 첨가하는 형식으로「사평(史評)」을 쓰고 있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의 잘못을 지적한바 있습니다만 다시한번 되새겨 본다면, 을사사건이 일어나기 전(호조판서 승차까지)에는 선생의 인품이나 치적에 대한 비난이나 악평은 실록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긍정적인 기술뿐입니다. 그러나 을사사건 이후의 실록(전적으로「사왈」부분) 기사에서 선생은 처참하게 매도되고 난도질당하고 있으며,
그렇다면
가) 선생은 본디 나쁜 사람인데 이제까지 감추고 가장하고 있다가「을사사 건」때에 이르러 그 본색을 드러냈다는 말입니까?
나) 선생은 나쁜 사람이 아닌데(사건 때 반대편이었으니까) 사관(즉 사림 들)의 눈에 갑자기 그렇게 비추어졌다는 것입니까?
다) 사람의 성품이 그렇게 갑자기 변할 수 있는 것입니까? (본색을 그렇게 오랫동안 감출 수 있다는 것일까요)
라) 「사평」의 전반부에서는 칭찬하듯 올려 세워 놓고 후반부에서는 후려치 는 수법으로 그 인품이나 행실을 폄하하여 놓았으니 어느 쪽이 옳다는 것인지, 어떤 기준으로 평(評)하였다는 것인지, 아무리 사관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자의적(恣意的) 평이 용납된다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③ 여기서「사왈(史曰)」의 성격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첫째,「사왈」은 후대(실록 편찬 시)의 기술이라는 점과 또한 가령『명종실록』중 대윤(大尹)을 정죄(定罪)할 때의 논의기록은 그때(명종 즉위년 8월 28일) 당시의 사실 기록이겠지만, 거기에 부기한「사왈」은 25년 후(1568 선조 1년~4년)『명종실록』편찬 시 추기한 것이므로 양자사이에는 많은 시차와 여러 가지의 시각차가 있을 것입니다.
# 둘째,「사왈」은 사관의「역사를 보는 눈」이므로 그 눈은 눈을 가진 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사관들은 전부 신진사림 이였으므로 반대 입장인 선생을 올바르게 쓸 리가 없는 것입니다.
중종 9년(1514) 기묘사화 이후 사림들이 피해를 입고 조정에서 후퇴하였으나 중종 말년에서 인종의 즉위 후 사림파의 복권이 성취되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외척간의 다툼으로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연이어 정미사화(1547년의 양재역 벽서사건이 계기) 및 명종 3년(1548) 2월 안명세(安明世) 필화사건과 명종 4년(1549) 4월에 일어난 이홍윤(李洪胤) 무고사건 등 연쇄적 사화에 사림들이 큰 타격을 받고 대거 물러나게 됩니다. 그 후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몰락하니 귀양 갔던 사림들이 복귀하여 요직을 차지하고 재야의 신진사류가 많이 등용되어 선조 대에 이르면 사림세력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선조 초에는 재야 사림의 등용문으로 낭천제<郎薦制> 즉 과거를 통하지 않고 이조정랑의 천거를 통해 등용되는 길도 생겼습니다.)
사자(死者)는 말이 없고 역사는 쓰는 사람의 글입니다. 여기서 선생보다 백여 년 후대의 영상(領相)인 이광좌(李光佐)(소론의 거두)의「임백령」평을 소개 합니다.
• 이광좌의 사랑방에서 젊은 박문수(朴文秀)와 이광좌가 과거시험의 답안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이는 그때 과거를 본 박문수와 관련된 이야기였는데, 박문수가 내색을 않고) 이광좌가 신(神)이 시제(試題)를 가르쳐 주었다는 임백령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 박문수가“예! 괴마(槐馬)가 그랬습니까? 후세인들의 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더군요”하자 이광좌가“그렇지 않다. 그것은 당파에서 하는 소리다. 괴마는 재주 있고 글 잘 하였던 사람이란다.”라고 답한다.(이현희 저『알기 쉬운 우리나라 역사』하권 652쪽 참조-1987.4.25 대광서림 간) 후년의 임백령에 대한 평 또한 다음과 같습니다.
• <명종 6년 11월 10일> 시강관(侍講官) 윤춘년(尹春年)(후에 이·예조판서)이 상계왈(上啓曰)
“근래 10년이래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 기강이 해이해졌습니다. 저번에 역적을 제거하고 원훈이 된 4인 가운데 임백령이 가장 훌륭하였는데 가정에서의 처신이 염근(廉謹)하였으므로 죽은 후에도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습니다….”고 하며 그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외 필자가 느낀「사왈(사평)」에 대한 문제점은 별첨「충헌공 소고」에서 설명하였으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이제 핵심논제인「위훈개삭(僞勳改削)」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문제제기의 과정
문정왕후가 죽고 선조(宣祖)대가 되자 슬슬 위훈(僞勳)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 과정을 잠깐 살펴보면
① 을사사건(1545)의 여파는 더욱 확대되어 대윤파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한 정미사건(1547-양재역 벽서사건), 안명세 필화사건(1548. 2) 이홍윤(李洪胤) 무고사건(1549. 4)(기유사건) 등이 연달아 일어나, 을사 이래 5,6년간 비명에 죽은 명사만도 백여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달하여 윤원형의 세도, 횡포와 수렴정치의 폐단은 점점 심화되어 갔습니다. - 이때 만일 백령공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 아니겠는가 하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② 문정왕후는 수렴청정하여 그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였고 윤원형은 승차를 거듭하여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 영의정으로 권세와 부귀를 한 몸에 누렸습니다.
③ 그러나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음에 따라 윤원형의 20년 영화는 막을 내리고, 관직을 삭탈당하여(명종 20년 8월 27일)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 방귀 된 후 거기서 첩 정난정과 함께 죽습니다.
④ 한편 명종은 귀양 갔던 사람들을 복귀시키고 재야의 신진사류를 많이 등용시킴으로서 정계는 다시 사림 중심으로 재편성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명종 재위 전기간 동안에는 사림들의 그 매서운「을사의 위훈 개삭 문제」가 결코 제기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가) (문정왕후 생존 시에는) 그 주체 즉 몸통이 서슬이 시퍼렇게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며(후에 상술함)
나) (명종이 사림을 다시 등용한 후에도) 당사자(명종)가 생존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그 진위를 운운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 이 문제는「왕권계승에 대한 시비」라는「지극히 어렵고도 금기시되는 문제」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끄럽고도 끈질긴 사림들도 을사사건에 관한한 일체의 비판 없이 숨을 죽이고 잠잠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⑤ 명종이 죽고 선조 조에 들어감에 드디어 홍문관과 사헌부·사간원 양사(兩司)의 대간들이 을사의 신설(伸雪)과 위사(衛社)의 삭훈(削勳)을 발론하기 시작하였고 그 최선봉에 홍문관 교리인 이이(李珥)가 나선 것입니다.
-“선조가 만일 명종의 직계손 이었던들 이「위훈문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는 후사 없이 일찍 죽었고, 뒤를 이은 선조는 중종의 빈 창빈안씨 소생의 덕흥대원군의 아들이므로 명종의 이복조카가 왕이 된 것임)
※ 신설(伸雪)- 신원설치(伸寃雪恥) 즉 원한을 풀고 치욕을 씻어버림
(2)「위훈개삭」의 과정
왕조실록에서 전개되는「위훈개삭의 과정」상세편은 별첨자료와 같습니다. 그런데 선조의 실록에는『선조실록』과『선조수정실록』의 2종류가 있어 양자사이에는 이 위훈에 대한 기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선조 3년 4~8월의 5개월간 논의(제1차)가 있은 후 잠잠하였다가 선조 10년 6월 공의전(恭懿殿)(인종비)이 병이 들자 재론되어 그 죽음에 임박하여「위훈삭제교서」가 반포됨으로써 일단락을 보게 됩니다.
-「선조실록」은 1609년(광해 1)~1610(광해 2) 기자헌(奇自獻)(북인)등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여기에는 북인(北人)에 대한 칭찬이 편중되고 서인(西人)에 대한 무필(誣筆)이 많다하여 인조반정으로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1643년(인조 24)~1657(효종 8)사이에『선조수정실록』을 다시 편찬하였다. 이와 같이 선조의 실록은 당파에 오염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병화(兵火)에 불타서 거의 소실되었고 사관들의 기억과 조보(朝報), 정목(政目), 개인의 일기, 야사 등에 의존하여 편찬되었으므로 분량도 적고 정확성도 부족하여 역대 실록 중에서 그 질이 가장 떨어진다고 합니다.
① 우선『선조실록』에서 그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 선조 즉위년(1567) 11월, 기대승(奇大升)이 을사사건의 내용을 임금(上)에게 제일 먼저 설명한 후
• 선조 3년(1570) 5월에 이르러 유희춘(柳希春)이 차자(箚子)(간단한 상소문의 한 체)를 올리고 3공(三公), 동서반(東西班)이 계(啓)를 올려“이기(李芑)·정언각(鄭彦慤)의 관작 추탈”을 연거푸 상주하고
• 양사(兩司)가 합동으로“을사·정미·기유의 무고한 죄를 신면하고 4인(이기·정순붕·임백령·정언각)의 관작 추탈”을 연거푸 상주하고
• 종친 수백명이 신원(伸寃)과 토죄(討罪)를 청원하고 지방 장관, 정원(政院)에서 계속 신설(伸雪)과 토죄를 간청하였으나
• 선조는 그때마다,“고칠 수 없다”,“선조(先朝)(명종 조)의 일을 경솔히 논할 수 없다”,“이미 지난 일은 논할 것이 없다”,“고치기 어렵다”,“선조(先朝)의 훈적(勳籍)을 내가 어떻게 감히 고칠 수 있겠는가, 결단코 따르지 않겠다….”하고 단호히 거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그중에서도 특히 선조 3년 8월 5일에 내린 비망기에서는“을사훈적은 선왕께서 삽혈(歃血) 맹세한 것이고, 문정대비가 종사를 위하여 정한 일이니 내가 어찌 감히 고칠 도리가 있는가…”하고 단호히 거절하여 그 명분과 의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 삽혈-굳게 맹세할 때 희생의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시고 서약을 꼭 지킨다는 단심 을 신에게 보이는 일. 일설에는, 피를 입술에 바른다고 함
• 선조의 이와 같은 확고한 의지로「위훈(僞勳)」건은 다시 거론되지 않고 7년간을 잠잠하고 있다가 선조 10년(1577) 6월 공의전(인종비)이 병이 들자 다시 논의가 시작되는데,
• 선조 10년 6월 26일 임금(上)이“공의전께서 원하시니 유관, 유인숙의 직첩을 환급하라”전교하였으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6조낭관(郎官)들의 위훈삭제의 상소는 역시 허락하지 않고 있다가
• 동년 11월 28일에 전교하기를“공의전의 병세가 위급하다……을사년의 일은 본디 내가 모르는 일이요 선조(先朝)께서 동맹(同盟)한 큰일이기 때문에 감히 손댈 수가 없다. 그러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관작을 회복시키고 위훈을 삭제할 것을 이미 공의전에게 고하였으니 하는 수 없다. 다만 내가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니 후세에 나를 구실 삼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선조자신의 부득이한 입장에 대하여 변명을 하고 있으며(이 대목은『선조수정실록』에 오히려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
• 드디어 동년 12월 8일 위훈삭제의 교서가 반포되고 공신(功臣)의 가자(加資)가 모두 개정(改定)된 것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선조가 끝까지 위훈삭제를 불윤(不允)하다가 인종비의 서거에 즈음하여 그의 간청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이를 허락하였고 그리고 후세에 대하여 이와 같은 자기의 입장까지 변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 다음『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와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선조 3년(1570) 4월 1일,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을사, 기유의 원왕을 신설(伸雪)”할 것을 청원함을 시작으로
• 같은 날, 이준경(李浚慶)(영의정)이 계(啓)하길,“…을사사건은 의심스러운 일이 너무 많아 감히 다시 논의할 수 없는 일인것 같고…다만 기유년의 옥사는 매우 억울하니…”하며 정미, 기유사건에 대해서만 신설(伸雪)을 청하고 을사사건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으나
• 같은 날, 홍문관이 1일 2회씩 상차(上箚)하고, 양사(兩司), 조정 전체가 계(啓)하고, 종친·유생·충의위(忠義衛)가 다투어 합동으로 상소(上疏)하니 임금(上)이 드디어“정미, 기유의 죄인을 신설(伸雪)하고 이기(李芑), 정언각(鄭彦慤)의 삭탈을 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또 같은 날, 홍문관의 상차에“12가지 무망(無望)의 증거”를 제시하였으나 임금이 불허하고 또“14가지 허위의 단서(端緖)”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으며, 이이(李珥)가 삭훈 논의를 제일 먼저 꺼내어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전후 41차례나 차자(箚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차후에 상술)
• 선조 3년(1570) 8월 1일에 대신, 3사(三司)가 신원(伸寃)을 연계(連啓)하였고 삼공(三公) 백관이 복합(伏閤)하고, 양사는 1일 5차례씩 상계(上啓)하고, 홍문관이 1일 3차례씩 상차(上箚)함에 임금(上)이 3공·의정부·6조·3사의 장(長)을 명소, 논의한 후 드디어“정순붕(鄭順朋)·임백령의 관작 삭탈”을 명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 그리고 동년 10월 1일 대간들이“신원(伸寃)과 삭훈(削勳)”을 청함에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의 역명(逆名)”을 신설(伸雪)하였다고 합니다.
• 그 후 7년간을 잠잠히 있다가
• 선조 10년(1577) 5월 1일 공의전 왕대비(인종비)가 병이 들어 대비의 요청으로“유관, 유인숙의 직첩”을 돌려주었으나“위사공신의 녹권(錄券) 삭제”는 임금(上)이 불허하였으며
• 동년 11월 1일 임금이 대비의 간청에 못 이겨 녹훈(錄勳) 삭제를 약속한 경위가『선조수정실록』왕 10년 11월 1일조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 그리하여 동년 12월 1일에「위훈삭제교서」가 반포되어“이기·정순붕·임백령·정언각의 관작을 삭탈” 하고“유관, 유인숙 등의 역명(逆名)”을 씻으며 정미, 기유년의“죄입은 사람의 직첩”을 회복시켜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 대하여
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수정실록』은「선조 3년 4월 1일, 8월 1일, 10월 1일」및「선조 10년 5월 1일, 8월 1일, 11월 1일, 12월 1일」자로 모든 기사의 날짜가「1일」로 되어 있음이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며 그 날짜와 내용의 정확성이나 신빙성을 의심하게 하고 있으며
나) “상(上)(임금-선조)이 윤허하지 않았다.”하고 간단히 기록하여『선조실록』처럼 왕의 거부 이유 등이 자세히 제시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거부 건수 또한 적으며
다) 이기·정언각과 정순붕·임백령이 각각 선조 3년 4월 1일과 8월 1일자로 이미 삭탈관작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 10년 12월 1일「위훈삭제교서」에 의해 다시 관작이 삭탈됨은 명백히 모순(2중)이며
라) 선조 3년 10월 1일에 유관, 유인숙 등의 역명(逆名)이 이미 씻겨 졌는데도「위훈삭제교서」에 다시 신원(伸寃)된 것도 이상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마) 따라서 위와 같이 수모(首謀)급들(1등공신)이 7년 전에 이미 삭탈관작 되었고, 유관 등의 역명이 이미 말끔히 씻어져서 한(恨)으로 남을 거리가 거의 없을 터인데, 왕이 인종비를 문안했을 때“녹훈은 선조(先朝)에서 한 중대한 일이므로 가벼이 고치지 못합니다.”한데 대하여 인종비는 대성통곡을 하였다하니 (『선조수정실록』10년 11월 1일조) 어찌된 일일까요? 이미 7년 전에 중요한 사항은 모두 마무리되었는데도 왕은 무엇 때문에 녹훈삭제불가를 다시 천명하였고 인종비는 이를 듣고 왜 대성통곡을 하였단 말입니까? 그 줄거리가 모순되지 않습니까?
바) 그래서 저는 앞의『선조실록』의 기록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결론지은 바와 같이『선조실록』 쪽의 기록을 믿고자 합니다.즉, 선조(宣祖)께서 끝까지 위훈삭제를 불윤(不允)하다가 인종비의 서거에 즈음하여 대비의 간청(대성통곡)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이를 수락하였고 그리고 후세에 대하여 자기의 입장까지 밝혀 놓았다는 것입니다.
사) 따라서 뒤의『선조수정실록』의 기록, 즉“수모(首謀)급 4인의 삭탈관작(선조 3년 4월 1일·8월 1일) 및 유관 등의 역명 신면(동년 10월 1일)의 기록”은 조정신료와 사림들의 시위가 얼마나 거세었고 그것의 효과가 즉효(卽效)하였던가를 보여주기 위하여『수정실록』작성 시 삽입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선조 10년 인종비의 서거 시 상황과 맞지 않아 설명이 되지 않으며, 또한 7년간의 침묵에 대한 이유도 설명이 되지 않으므로 믿기 어려운 바, 필자는 결국『선조실록』의 기록대로「선조 10년 12월 8일 교서 반포로서「위훈개삭(僞勳改削)」이 확정된 것으로 보고자 합니다.
(3)「위훈(僞勳)」의 본질
여기서「위훈」의 본질을 다시 한 번 고찰해 보기로 합니다.
①「위훈(僞勳)」이란, 글자 그대로「거짓공훈(功勳)」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 그「공훈」의 내용이 허위(虛僞)라는 것입니까.
• 그「공훈」의 효과가 거짓이라는 말입니까.(무효란 것입니까)
• 명종 조에서는 그러한 거짓을 공훈 하였으며 삽혈(歃血) 맹세까지 하였단 말입니까.
② 을사의 공훈은 분명「종사(宗社)를 보위한 공훈」즉「위사공신(衛社功臣)」이었고 종사는「명종의 보위(寶位)」이며 공적이란「종묘사직을 모위(謀危)하려 했던 역적을 제거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 만일 이러한「위사공훈」을「위훈」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그 효과 즉, 그 원인행위인 명종임금의 즉위까지도 허위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 논리적 딜레마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종묘사직을 모위 하려는 역적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였더라면 그들은 결국「종묘사직을 모위」하였을 것이고, 만일 그 일이 성사되었을 시에는 분명히 명종임금의 즉위는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위훈의 주장」은「명종 즉위의 당위성」을 자칫 훼손할 우려까지 생긴다는 것입니다.
• 또한「위사공훈」을 위훈이라고 한다면, 그 공적 즉「종사를 모위 하려는 역적을 제거한 일」은 분명 잘못한 일이 되고(그대로 방치한 것이 옳았다는 논리가 되고), 이와 같이 잘못된 일을 공훈하고 삽혈맹세까지 시킨 왕 또한 책임을 면할 수 없고, 도리어 탄핵을 받아야 마땅한 국가의「일대 오류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위훈」논리의 부당성에 대한 인식
가) 이와 같은 위훈 논리의 위험성을 제일 먼저 깨달은 분은 바로 선조(宣祖)입니다. 그리하여 선조께서는「을사훈적은 선왕께서 삽혈맹세한 중대사이고 문정대비께서 종사를 위하여 정한 일인데 내가 어찌 감히 고칠 도리가 있는가」하고 끝까지 삭훈을 반대한 것이며
나) 당시의 영의정 이준경(李浚慶)도「을사사건은 의심스러운 점이 너무 많아 다시 논할 수 없다….」하여 을사의 거론을 피하였고(정미, 기유사건만 거론함)
다) 당시의 거유(巨儒)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공신삭훈의 문제에 신중한 입장임이『선조실록』의 기록에도 나와 있으며, 더불어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윤임(尹任)의 신원을 주장하자 윤임 등은 사직에 대한 죄가 없지 않다고 하여 이이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윤임도 선조 10년 신원됨). 즉,『선조실록』<10년 12월 4일>조를 보면“이황이 언제인가 말하기를‘윤임과 유(柳)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고 또한 공신을 삭제하는 문제를 매우 어렵게 여겼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라) 위훈논쟁의 최첨단에 선 율곡의『전서(全書)』에서도「선생(율곡)이 위사위훈 삭제를 청원하였는데 명현 대신들이 난색을 표시하므로 선생이 홀로 항의하였다…….」라고 당시의 사정을 실토하고 있습니다.(『율곡전서』경오 4년〈선생 35세〉조 참조 )
③ 따라서 을사사건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이「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의 내용이 무엇이며 / 누가 제일 잘 알고 / 누가 제일 먼저 발론하였으며 / 이에 대한 이해관계가 제일 많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파악해보면 될 것입니다.
• 「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의 내용을 다시한번 정리한다면,(명종 즉위년 8월 28일 교서)
가) 윤임(尹任)은 인종 승하 당시 3부자가 임의로 입내(入內)하여 옥체를 안고 불경하게 거동하였으며 발상(發喪)을 저지하려 했고 자기의 생질인 계림군(桂林君) 또는 봉성군(鳳城君)의 추대를 발설하였고
나) 유관(柳灌)은 밖에서 윤임으로 하여금 후사의 취품(取稟)을 사주하였고, 또한 모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하였으며
다) 유인숙(柳仁淑)은 명종의 현(賢), 불현(不賢)을 질문하고, 유병설(有病說)을 발설하는 등 명종의 대통 승계를 직간접적으로 방해하였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가)「윤임의 불경사건」은 구중궁궐 내간(內間)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오직 문정왕후만이 능히 알 수 있는 일들이며(외간에서는 알 수 없는 일임)
나)「유(柳) 등의 후사 취품 문제」(윤인경이 들음),「명종의 자질 문제」(이언적이 들음)와
다)「모후의 수렴청정반대 문제」등은 정순붕의 상소가 발표된 직후 그에 대한 증언들이 속속 나왔던 것입니다.(『명종실록』즉위년 8월 28일 조 참조)
• 문정왕후는 처음에는「내간의 일」이라고만 발설하였다가 대신, 대간들이 그 내용을 잘 모르고 반대가 있자「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이라 하였고, 연이어 계속 관용의 청원이 잇따르자 드디어「종사를 위태롭게 한 역적」이라는 막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 이와 같이 대신, 신료들이 처음에는「내간의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가벼운 처벌(찬축, 파직, 체차)을 건의하여 그대로 수용되었다가, 신료들이 다시 구원을 계속 청원함에 문정왕후는 한심스럽다고 한탄하였으며
• 이때 정순붕의 상소가 있게 되자「내간의 일」즉「종사를 위태롭게 하는 사건」의 내용이 소상히 알려지고, 대신, 대간들이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상황 아래에서 왕후는「제 신(臣)들의 의득(議得)(의결) 사항이 아니라 내가 결정할 사항」이라 하여 이들에게 사죄(死罪)를 결정한 것입니다.
• 이와 같이「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의 내용은 왕위계승을 위요한 처절한「내간의 일」이었고, 이것을 제일 잘 안 사람은 물론 이것을 몸소 겪은 문정왕후 자신이며, 따라서 제일 먼저 발론한 사람도 왕후밖에 없으며 왕후야 말로 이해관계가 제일 큰 이해의 당사자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후는 그 처절했던「내간의 일」을 빌미로 윤임 일파와의 구조적인 대립과 원한관계에 대한 철저한 보복과,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최선의 안전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몸소 앞장서서 대윤(大尹) 일파의 숙청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아집니다.
• 이상으로서 을사사건의 실제 본체(몸통)는 바로 문정왕후이며 소위 위사공신들이란 이를 동조 추종했던 대리전사(代理戰士)(깃털)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해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즉,「을사사건」은 문정왕후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 최근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한 모임에서「유학적(儒學的)으로 본 조선시대의 최대 악덕여인」으로「문정왕후」를 선정하였다고 합니다.
(4)「위훈개삭(僞勳改削)」상소의 논지와 그 검토
그러나 후대(선조 조)에서의「위훈개삭」상소의 논지는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① 위에서 말한 을사사건의 본질은 아예 외면하고 있습니다.
<선조 2년 9월>
이이(李珥) 계왈(啓曰)“위사(衛社)는 바로 위훈(僞勳)이고, 그때 죄를 당한 자들은 모두 선한 선비였습니다. 인종이 승하하자 중종의 적자(嫡子)로서 명종만 있을 뿐 어찌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가겠습니까. 간특한 무리들이 감히 사림을 참벌(斬伐)하였는데…”(『선조수정실록』)
<선조 3년 4월 1일>
홍문관(弘文館) 상차 왈(上箚 曰)“…인종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왕위의 수수는 분명히 적통(嫡統) 아우인 명종으로 이어질 것은 하늘도 사람도 인정하는 바인데...윤원형, 이기 등이 사감을 품고 독기를 뿌려…근거 없는 말을 떠들어…윤임을 도마위의 고기로 만들고 유(柳)등을 대죄로 하였으니…”(『선조수정실록』)
◇ 위 상계(上啓)에 대하여
가) 위에서 보면, 인종·명종 간의 왕권수수가 순조로워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을사사건 9일간의 진행과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별첨참조) 명종 즉위년 8월 25일 대비가 어째서“…우리 모자가 고립되고 종사가 위태로워서…”라고 당시의 긴박했던 입장을 절규하였으며,
나) 또한 왜 을사사건의 진행과정에서 대비는 조정신료들 앞에서“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 역적 운운”의 발언을 연거푸 하는 것입니까. 문정왕후는 희대의 거짓말쟁이란 말입니까. 이것을 기록한『명종실록』이 위서(僞書)란 말입니까.
다) “윤원형 등이 근거 없는 말을 떠들어 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엄청난“내간의 일”을 외간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또는 외간에서 만들어진 각본에 의거 대비가 궁중 내간에서 그대로 연출했다는 말입니까.
라) 사림의 주장대로「위사(衛社)」가 위훈이라면 종사(宗社) 즉 명종의 즉위는「괴뢰정권」이며 삽혈맹세는「거짓 맹세」라는 말입니까.
• 이와 같이 위훈소(僞勳疏)의 논지들은〈명종의 왕권 수수는 자명한 일〉〈근거 없는 말의 조작〉등으로『명종실록』의 기록과는 상치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으니 즉 을사사건의 본질(본체)은 외면한 채 이를 빗겨 가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선조 3년 4월 1일〉자 기록을 보면,
홍문관 재차 왈(再次 曰)“…화(禍)를 꾸밀 당시 윤원형이 사설(邪說)을 조작 문정왕후를 기망하여 밀지(密旨)를 내리도록 하였는데…”(『선조수정실록』)
가) 여기서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대비(문정왕후)를 기망하여 밀지를 내리도록 하였다는데 이미 위에서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처절했던「내간의 일」이란 오직 대비만이 알고 있는(외간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사실인데 「대비를 기망」하였다 하니 도대체 무엇을 기망하였단 말입니까.
나) 그것은 대비의“밀지”에 대한 발언을 보면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즉, 명종 즉위년 실록기사를 보면,
<8월 24일>
“내전에 변고가 있으나 발설하지 않는 것은 선왕의 시신이 아직 빈전에 있기 때문이었으나 종사의 위급을 구하기 위하여 부득이 밀지를 내린 것…”
<8월 25일>
“우리 모자가 고립되고 종사가 위태로워 조정의 논계를 기다려도 움직임이 없어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밀지를 내렸는데…”
<8월 28일>
“이와 같이 내외가 결탁하여 종사를 위급지에 빠트려 놓고 아직도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타심(他心)을 먹고 있으니 모위(謀危)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을 조정도 모르고 판서도 모르니 할 수 없이 밀지를 내려 대신들에게 알렸다….”
다) 위와 같이 대비는
종사의 위급을 위하여, 조정의 움직임이 없어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조정도 모르고 판서도 모르니 할 수 없이 밀지를 내렸다는 것인데, 이것이「대비가 내용도 모르고 피동적으로 한 행동(밀지를 내림)」이라는 말입니까. 이것이「윤원형이 조작한 사설(邪說)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입니까.
라) 〈윤임 등을 제거하는 일로 자전(慈殿)이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려 이기·정순붕 등을 설득하게 하였다.〉(명종 즉위년 8월 28일 실록)는 기록이 능히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이 문정왕후의 밀지까지도“대비는 모르고 기망당하여 내렸다.”는 식으로 대비나 왕실을 빗겨 가려하고 있으니, 즉 본체는 건드리지 않고 그 대리자들에게만 책임을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왕권은 지엄한 것이며 함부로 논하다가는 자칫 대역(大逆)에 저촉되고 스스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 선조는〈선조 3년 8월 5일〉자 비망기에서 하교 왈(下敎 曰)
“…이 세 가지 상소는 분수를 벗어났거늘 하물며 자전(문정왕후)까지 거론하여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였고 또 사특한 이야기까지 썼으니...자전이 과연 사특한 말에 현혹된 분인가?…이 상소에 참언이 자전에게 들어갔다고 하니 그를 하옥시켜 근원에 대하여 국문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선조 대에 들어서도 이미 고인이 된 자전(문정왕후)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 못할 정도의 분위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 사림들의「위훈소」는, 본론은 회피한 채 말초적인 주변문제만 맴돌고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선조 3년 4월 1일〉자의 홍문관 상차(上箚)에서 을사훈작이 위훈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로서「12개의 무망(無望)의 증거」와「14개의 허위의 단서」를 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므로「12개의 무망의 증거」각 항목만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12개의 무망의 증거」 내용
가) 을사사건이 반역 사건이라면 천하에 공개하여 바른 정상(情狀)을 밝혀야 하는데, 비밀리에 모의하여 양사(兩司)와 결탁하려 했으나 대간들이 반대하였다는 점
나) 이기가 처음 발론할 때“윤임(尹任) 등이 스스로 불안하였느니, 행적이 있느니”하여 반역의 증거를 충분히 밝히지 못했다는 점
다) 왕명에 의거 처음 모였을 때, 정순붕이 아무 말 않고 있다가 상소문에서 비로소 윤임 등의 불궤(不軌)를 말하니, 그동안(6일간)에 불궤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냐 하는 점(※ 불궤-법이나 도리를 지키지 아니함)
라) 공의대비(恭懿大妃/인종비)는 사려 깊은 성신(聖神)한 분인데 만일 그 지친(至親/윤임)이 흉모를 도모했다면 이를 밝히고 성토했을 것인즉 어찌 감추고 그들과 통했겠느냐 하는 점
마) 반역의 무리(윤임·柳 등)를 다스리면서 심문도 하지 않고 승복도 받지 않는 것은 이들을 빨리 죽여 입을 막고 사술(邪述)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냐 하는 점
바) 2성(聖)(중종·인종)이 아직 재세(在世)해 계시는데 어떻게 계림군(桂林君) 류(瑠)를 왕위에 오르도록 음모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점
사) 인종이 위독 시 적제(嫡弟)(명종) 전수가 명백하였는데 어찌 윤임이 불궤를 부릴 수 있었겠느냐(즉 대권 전수 시에는 아무의의가 없다가 이덕응(李德應)의 무복(誣服)이 있은 후 반역으로 단정, 2柳까지 죄가 미쳤느냐)하는 점
아) 역적을 정법(正法)으로 다스리지 않고 이덕응을 유혹과 협박으로 자백을 받아내어 다스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는 점
자) 공신 허자(許磁)는 뒤에 후회하여 멀어진 후 죄까지 받았으며, 민제인(閔濟仁)은 삭훈까지 당하는 등 자기들끼리 모순을 드러냈는데 어찌 그들의 주장을 공론(公論)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점
차) 명현(名賢)(이언적·권발)을 공훈한 것은 소인이 군자를 위망하고 의지하여 백성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냐 하는 점
카) 심연원(沈連源)은 모의에 가담치 않았고 본인이 원치도 않았는데 공훈으로 끌어 들인 것은 외척을 끌어드려 공훈을 단단하게 하려는 계략이 아닌가 라는 점.(※심연원-명종비 인순왕후의 조부. 영의정까지 지냄)
타) 자기들을 조금이라도 비난하면 가차 없이 유형(流刑)·음형(陰刑)으로 다스려 입을 막으려 했다는 점
- 그러나 임금(上)은 불윤(不允)하였음
◇ 「12개 증거 항목」에 대한 검토
위의 12개 항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공통적인 특징은 문제를 제기함에 있어 모두「네거티브(negative)형」즉「소극형(消極型)」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그때 누구는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 아니다.」라는 6하 원칙에 입각한「적극적(positive)」반증이 필요할 터인데,「무엇이 되려면 무엇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그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간접적이고「소극적(negative)」인 방법으로 논리를 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 즉,「을사사건이 반역사건이라고 한다면 천하에 공개하여 그 정상(正狀)을 밝혀야 할진대, 이를 비밀리에 모의하였으니 반역사건이 아니다」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명종실록 및 교서(敎書)에, 을사사건은 윤임·유(柳) 등의「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이「반역 사건」이라 규정하였으므로, 이것을 뒤엎으려면 「그때 윤·유 등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상황 및 알리바이 입증) 반역이 아니다.」라고 포지티브(positive) 반증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법이론(法理論)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역사건」이란 국가의 중대사건이며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 없는 것이고 명종 조에서의 반역 사건을 선조 조에서 번복하려면 애매한 부인(否認)이 아니라 포지티브적인 직접적 반증이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나) 또 위훈소(僞勳疏)에서는,「인종이 위독시 적제(嫡弟)(명종)가 왕위를 이어 받는 것은 하늘도 알고 사람도 아는 명명백백한 사실인데 어찌 윤임 등이 불궤(不軌)를 부릴 수 있겠느냐」하고 왕위의 전수가 아무 문제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명종실록」즉위년 8월 25일 조의“…우리 모자(母子)가 고립되어 종사가 위태로워…”라는 문정왕후의 절규가 왜 나왔으며 동년 8월 28일 반포된 교서의 내용(윤임 등의 불궤)은 위서(僞書)라는 말입니까. 그들 말대로“왕위 전수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만 간단히 적을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명종실록』의 기록들을 뒤집을만한 포지티브한 반증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 문정왕후가 본체라는 것은「위훈소(僞勳疏)」의 자체 내에서도 볼 수 있으니 즉,「이기가 반역의 증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 것」「정순붕이 처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들은 그들도 처음에는 그 사실(종사모위의 사실)의 내용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라) 반역의 무리를 심문치도 않고 승복 받지도 않고 처단을 결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문정왕후이고(“제 신의 의득사항이 아니라 내가 결정할 사항”), 신료들로서는 감히 참견할 수 없었던 실정이었으며
마) 역적을 정법(正法)으로 다스리지 않고 이덕응을 협박하여 자백을 받아낸 것은, 위와 같이 문정왕후의 사죄(死罪)결정이 먼저 정해지고 이를 뒷받침하라는 왕명에 의한 추관(推官)들의 후속조치로서, 따라서 이것은 을사사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 또는 과정이며(본래 죄인을 문초한 후 정죄(定罪)하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조선왕조 시대에는 이 같은 역추궁이 다반사로 이루어졌음)
바) 그 외 항목들도 위훈의 명분에 대한 적극적인 반증이라기보다는 결과론적인, 지엽적인 주변 문제만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 이와 같이 후대의 사림들이「위훈소」에서 포지티브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 증거를 네거티브식으로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도 명종 즉위 시 「종사를 위태롭게 한 사건」에 관련된 본체가 바로 문정왕후임을 능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문정왕후를 정면에서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것을 피하면서 오히려“왕후는 모르는 일”이라느니“왕후를 기망하였느니”하여 사건에서 격리시키면서 단지「줄서기」한 대리전사인 위사공신들을 오히려 사건을 일으킨 본체로 꾸미려하니 이와 같이 네거티브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때로는 정반대의 상황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사림들은 본체에의 접근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주변문제만으로 인해전술로 왕(선조)에게 상주(上奏) 또 상주하였으나, 요새 문자로「증거불충분」으로 결과는「임금(上)의 불윤(不允)」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영의정 이준경이 말한 것처럼 을사사건은 참으로 의심스러운 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③「위훈소(僞勳疏)」는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최첨단에 섰으며 전후 41회에 걸쳐 상소(上疏)를 하고 있습니다.
• 『선조수정실록』<3년 4월 1일>조는“…… 이때 이이(李珥)가 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서 삭훈(削勳)논의를 맨 먼저 꺼내어 강력히 주장하여 전후 41차에 걸쳐 차자(箚子)(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문서)를 올렸는데 41편 모두 이이가 쓴 것이어서 훈귀(勳貴)들이 대부분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율곡선생전서』에도「옥당 논 을사 위훈 차(玉堂 論 乙巳 僞勳 箚)」의 제목으로 41차(箚)가 실려 있는데, 내용은 거의 같으며 어떤 차는 완전히 동일하여「상동(上仝)」이라 표시해 놓고 있습니다.(※玉堂-홍문관)
• 이미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다른『율곡전서』에는“선생이 주동이 되어 동료와 더불어 위사(衛社)의 위훈 삭제를 청하였으나 명현대신들이 혹은 난색을 표시하였으므로 선생이 홀로 40여 차례나 항의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가) 율곡이 신진 사림으로서 지금으로 말하면 재야운동권처럼 최선봉에서서 이와 같이 끈질기고 집요하게 삭훈을 주장한 의도는 언필칭「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아 질서를 세우고 시의에 맞도록 폐법(弊法)을 개혁하며 사회(士禍)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하고 을사의 위훈을 삭탈하여 정의를 밝히고 붕당의 폐혜를 씻어서 화합을 구해야한다.」는 것입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이」조 참조)
※ 선조 때 사림간의 붕당이 생기자 율곡이 중재노력을 하였으나 결국은 선조 16년 서인으로 자정(自定)하게 됩니다.-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참조
나) 그런데 율곡 자신이 스스로 밝혔고『선조수정실록』에도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훈귀(勳貴)들이 삭훈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명현대신들이 난색을 표시하였고 퇴계 이황도 이것을 매우 어렵게 여겼던(『선조실록』10년 12월 1일 조) 사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필자가 생각하건대,
첫째, 을사사건은 문제자체가 왕실에 관련된 매우 미묘하고 난감한 사건일 뿐 아니라
둘째, 장차 또 다른 붕쟁(朋爭)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과연 율곡의 생각과는 달리,
다) 조광조(趙光祖) 이래로 사림의 타도대상이었던 훈구·외척 세력이 무너지고, 그 대신 사림들이 정권을 독점한 이후에도 그들은 동·서로 갈라지고(율곡은 서인의 편에 섬) 다시 사분오열되어 또다시 건저(建儲)(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피로 피를 씻는 붕쟁을 일삼았으니, 사림 그들이 과연 대윤·소윤의 파벌을 운운하며 죄악시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儲-태자 저)
라) 한편, 을사 위사(衛社)의 일등공신인 이기(李芑)가 율곡의 가까운 집안(재종조)인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덕수이씨세보』참조) 행여 왕조시대 사림의 결백증이 그와 같은 돌출행동을 야기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임백령의 스승인 박상의 친조카 박순이 임백령의 시호를 반대한 사건도 같은 맥락으로 보고 싶습니다.)